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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아이 ㅣ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84
로이스 로리 지음, 강나은 옮김 / 비룡소 / 2024년 9월
평점 :
《최초의 아이》는 "빈데비 아이"라 불리는 늪지 미라의 사진 한 장에서 시작한다.
산성도가 높아 부패가 느린 습지에서 썩다만 유기물질인 토탄이 수백 년 동안 쌓여 축축한 늪이 된다. (토탄이 계속 탄화되면 석탄이 된다)
늪 속에서 시체는 몹시도 느리게 부패해 두개골과 피부, 털, 손톱까지도 썩지 않아 시신은 오그라든 고무 인형처럼 보존된다. 표정이 살아있고, 남자 턱에 짧게 깎은 수염과 땋은 머리카락 모양까지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한다.
사진의 늪지 미라 "빈데비 아이"는 1952년 독일에서 발견됐다. 특이한 점은 13살의 여자아이라는 것. (대부분의 늪지 미라는 성인이었다) 표정은 평화로웠고, 눈가리개를 하고 있었다. 부상 당한 흔적도 없이 금발이 남아 있었지만 머리의 왼쪽 머리카락은 깎여 있었다.
"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 닫힌 문을 열어 보고, 구석진 곳을 들여다보고, 사람들을 그들 자신이게끔 하는 모든 이유를 알아내려 애쓰는 사람."
18면
《최초의 아이》의 저자 로이스 로리는 두 번이나 뉴베리상을 수상한 미국 청소년 문학의 대표 작가이다. 현대 고전 SF로 불리는 《기억 전달자》도 우리나라에서 오랜 사랑을 받고 있다.
자신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정의한 저자는 빈데비 소녀를 알게 되자 호기심에 온통 마음을 사로잡혔다. 그리고 역사에 남은 사실에서 아이의 흔적을 찾았다. 그렇게 모든 자료를 퍼즐 삼아 소녀의 이야기를 재창조한다.
"나는 이 여자아이의 퍼즐을 맞추고 싶었다. 이 아이의 이야기를 알고 싶었다."
18면
"각각의 사실에 자세한 내용을 더하면, 또 그 자세한 내용이 어떤 의미이고 얼마나 중요한지를 덧붙이면, 이야기가 채워지고 질문이 생겨나고 의미를 띄며, 점점 '나'에 가까워진다."
17면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면 다른 자료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그런 자료마저 바닥나면, 그때부터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19면
그렇게 완성된 《최초의 아이》는 매우 독특한 구성을 취한다. 총 5개의 장에서 사이에 끼어있는 2장이 소설이고, 나머지 3장은 저자의 에세이이다.
그런데 2장의 소설은 주인공이 다르다. 친구인 두 아이의 관점에서 각각 쓰여 2편이 단편 연작소설처럼 읽힌다.
소설을 둘러싼 3장의 에세이에서 저자는 자신이 어떻게 이 소설을 시작하고 상상해서 완성했는지, 이야기의 창작 과정을 그대로 공개한다. 세상에 없던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설계하고 건축하는지 작가의 작업을 엿볼 수 있어 정말 흥미로웠다. 해설서이자 제작기로 보여서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동시에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역사와 이야기 사이를 지그재그로 건너다보니 《최초의 아이》의 이야기에 몰입하기 어려울까 우려도 헸지만 우리의 로이스 로리가 아니던가. 이상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2000년 전 철기시대를 살다간 아이들은 너무 멀리 있지만 왠지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억압과 차별 속에서 여전히 고통 받음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아이》를 짓기 위해 인류학과 고고학까지 섭렵한 것이 틀림없다. 저자는 철기시대의 작은 마을을 생생히 살려내 독자의 눈 앞에 내놓는다. 고된 노동으로 종일 쉴 틈이 없지만 항상 굶주리고, 헐벗고, 추위에 떠는 혹독한 시대의 생활상을 자연스럽게 펼쳐냈다.
"봄에 폭우가 내리고, 여름에 가뭄이 와 지독한 흉작이 든 해였다. 그해 가을에 에스트릴트의 엄마가 낳은 남자아이는 얼마 안 가 비쩍 마른 채 이름도 없이, 울지도 않고 생을 마감했다. ... 갓 태어나 죽어 가는 자식들, 이미 다 자랐으나 굶주림에 겨울을 못 나고 죽어 간 자식들을 부르는 애달픈 신음과 처절한 울음소리. 가장자리에 선 에스트릴트는 그 모든 소리가 끔찍했고 배가 고팠다. 배가 고픈 자신이 미웠다."
52면
엄중한 성 역할을 깨고 최초의 여전사를 꿈꾸던 소녀, 에스트릴트. 하지만 나는 《최초의 아이》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파리크가 좋았다.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여의고 아빠마저 전사해 평생을 고아로 산 아이. 척추 기형 탓에 절뚝거리는 불편한 몸으로 다섯 살부터 대장간 보조 일을 하며 헛간에서 혼자 살고 있다. 에스트릴트는 파리크의 유일한 친구다.
"사람은 죽기 전에 꼭 용감하고 좋은 일을 한 가지 해야 하는데, 우리 외삼촌은 그렇게 했대. 전쟁터에서 다른 전사를 도와줬거든. 용감하고 좋은 일을 했다면 충분히 준비된 채 죽은 거니까, 다른 사람들도 슬퍼하지 말아야 한대. 그 사람도, 그 사람이 한 일도 늘 기억될 테니까."
130면
에스트릴트가 파리크에게 해 준 말이다. 곱씹을수록 애달픈 말. (파리크의 마지막을 암시한다.) 파리크라는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없다. 파리크는 늘 배가 고팠다. 아이들은 늘 파리크를 업신여기고 따돌리고 조롱했다. 단 하나, 초원과 숲만은 항상 그를 편안하게 맞아주었다. 토끼와 들쥐, 몇몇 새들까지 파리크가 손을 내밀면 다가왔다. 이곳에서 친구들을 만난 것이다.
자연에서 죽어가는 동물 사체를 관찰하며 뼈 구조를 꼼꼼히 살피고 자신의 몸과 비교하며 어떻게 몸이 이루어지는지 스스로 공부한다. '배움의 선반'을 마련해 동물의 뼈를 모으며 더더 배우고픈 열정을 이어간다.
"파리크는? 과학이 존재하기도 전에 자라나는 과학자였다. ... 파리크처럼 강렬한 호기심과 학구열을 품은 젊은이들은 그 전부터 언제나 존재했을 것이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로도 과학의 길을 터 왔을 것이다."
184면
《최초의 아이》 파리크가 자연 속에서 편안하게 숨을 쉬며 그 속의 생명들을 공부하고 소통하는 장면들이 좋았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지독히도 외로운 일생을 잘 웃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간 파리크의 강인한 따스함에 자꾸 울컥했다.
"절름발이 고아가 어떻게 아무도 몰래 또 하나의 삶을 살아왔는지, 들판과 늪과 숲에서 주운 이끼 낀 돌멩이, 죽은 다람쥐, 깃털, 딱정벌레, 뱀 허물, 동물 머리뼈 따위에서 어떻게 가치 있는 것을 배웠는지를 말읻. 그리고 그렇게 배운 것으로, 어떻게 내내 자신을 때리고 조롱하고 굶긴 사람을 치료해 줄 수가 있는지를 말이다."
172면
로이스 로리가 완성한 퍼즐 작품, 《최초의 아이》가 어떤 소설이라고 설명하고 싶지 않다. 마음이 가고 정이 가는 한 존재를 만났다고 그저 소개하고 싶다. 가상 인물이 아니라 현대를 사는 우리가 실제로 만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이러한 아이가 있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그저 《최초의 아이》를 들려주고 싶다.
책을 덮으니 많은 물음표가 뛰쳐나온다. 소설이란 뭘까? 삶은? 역사는? 작가는? 답을 찾지 못해도, 답을 찾아가며 만나는 전에 없던 감정과 생각 끝에 맺힌 작은 이슬 한 방울이 보인다. 까마득한 역사 속을 살다 스러졌을 수많은 인생에게 소중한 것들을 빚지고 지금을 사는 우리라는 작디 작은 생명 한 방울을 말이다. 《최초의 아이》는 무구한 역사 속 반짝하고 사라진 별 같은 존재들을 향한 감사와 경이로움을 느끼게 했다.
로이스 로리가 천착한 주제로 보이는 "기억"이라는 실마리로 아름답게 직조한 《최초의 아이》 색다른 구성과 2천년 전 빈데비 소녀와 소년의 이야기를 만나는 시간은 절대 헛되지 않을 것이다.
*** 출판사 비룡소의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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