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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영감에 관하여 - 천천히 사유할 때 얻는 진정한 통찰의 기쁨
머리나 밴줄렌 지음, 박효은 옮김 / 다산초당 / 2025년 6월
평점 :
이 책을 읽으며 독자들이
산만함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산만한 정신에서 날카로운 통찰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산만함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 29면
150쪽 남짓의 작은 책 《창조적 영감에 관하여》
몇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는데 감이 왔다. "Destiny~!" 이번처럼 한눈에 빠져버리는 책을 만날 때면 설레발이 실망이 될까 걱정도 된다. 하지만 처음의 기대를 넘어서는 웅장함이 마지막 페이지에서 덮칠 때, 책을 바로 알아본 안목에 도취되어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역시 나야, 음하하하~!)
이 책이 딱 그랬다. 나아지고 있던 줄긋기 병을 도지게 만든, 짧지만 밀도 높은 문장들. “산만함의 예찬”이라는 낯설지만 매혹적인 개념에 내 삶의 외연이 한층 넓어진 기분이다.
저자 이름이 낯익다 했더니, 바로 《평범하여 찬란한 삶을 향한 찬사》의 마리나 반 주일렌! 작년 5월을 행복하게 만들어준 책의 저자와 다시 연결되는 순간, 이 만남은 한 권의 독서가 아닌 재회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이 책은 내가 평소 사랑해 마지않는 '중용'의 미학을 '산만함'을 통해 새로운 시선으로 풀었다. 비교 문학 교수인 저자의 글은 이분법을 넘어선 균형과 리듬의 맥락으로 사유의 기쁨을 확보해낸다. 이렇게나 깊고 넓은 통찰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정신이 산만해지는 것이
그토록 심각한 문제라면,
왜 진화 과정에서 이 결점이 퇴화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왜 온전한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걸까?
혹시 산만함은 인간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비밀 병기 같은 것이 아닐까?"
-40면
이 책이 말하는 산만함은 주의력 결핍이나 정신없는 부산함이 아니다. 느긋하고 게으른 몽상이나 성찰, 반추에 가깝다. 생각이나 감정이 흐트러진 그대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하고 관조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마음챙김과도 닮았다.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것 같지만 불꽃이 터지는 천지창조 직전의 상태, 의식에 매달려 있지 않되 끊임없이 주변을 감지하고 자유롭게 연결하며 다양한 가능성을 허용하는 여백의 상태.
"여행 중에는 글을 쓰지 않는다.
나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듣는 것도 좋아한다.
바라보는 것도, 관찰하는 것도 좋아한다.
어쩌면 나는 '주의력 과잉 장애'일지도 모른다.
무언가에 집중하는 일,
그것이 내겐 가장 쉬운 일이다."
- 수전 손태그
그렇다. 결국 이 책에서 읽은 산만함은 집중력과 산만함의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한, 집중보다 더 고차원에 있는 열린 집중이었다.
산만함이 없다면 집중력을 발휘할 수 없고, 최소한의 동기부여와 끈기가 없다면 산만함은 무기력으로 변해버리기 십상이다. 정신을 느슨하게 하지 않으면 집중력은 지속되기 어렵다. 집중력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작금의 세태에 맞설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해결책은 집중력과 산만함 사이에서 중용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 (56,57면)
"존재하면서도 부재하고, 떨어져 있으면서도 연결되며, 능동적이면서 수동적일 수 있는" 비선형적이고 동적인 균형. (그게 도대체 뭐냐고 물으신다면 책을 꼭 읽어보시라! 저도 사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
잡힐 듯 말 듯 , 알듯 말듯 한 개념이지만 그래서 좋았다. "바람에 실려 이리저리 떠다니는 사유"(49면)를 맛보게 하기 때문이다. 나약하고 자기중심적이며, 과도한 욕망으로 효율성과 생산성에 집착하는 사람은 누릴 수 없는 기쁨이 이렇게 애매한 공간에 있다.
이런 책은 평소의 나다운 생각에서 벗어나 한계를 깨고 날아갈 수 있는 잠재력의 무대가 되어준다. 주제에 맞게 책의 구성 또한 체계적인 목차도, 논리적인 전개도 없이 수다처럼 흘러서 여기저기 비어있는 틈으로 내 맘대로의 사유가 피어났다.
덕분에 이런 비유도 떠올랐다.
이 책은 "산만함이라는 바다에서 선수급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 태평양 한가운데서 즐기는 물놀이" 같다. 생각이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책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유영하듯 책을 읽다 보니 번뜩 이런 그림이 그려졌다.
이 책은 산만함이 결함이 아니라,
창조의 본질임을 증명한다.
집중력은 도구일 뿐,
창조는 흐트러짐에서 솟아나는 것이었다. 가능성의 전조로서
산만하고 게으른 시간의 중요성을
확실히 인식시킨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
세상에 없던 창조적 영감을 원하다면
반대로 가보자.
주위가 흩어지면 세상은 더 충만하게 풍요로워진다.
느슨하게 산만한 여백에서
색다른 연결과 침투가 시작될 것이다.
"가치 있는 것은 쉽게 얻을 수 없다."
어려워 보이지만 산만한 여유 속에서
천천히 사유하는 법을 통해
진정한 통찰의 기쁨을 만끽하길!
"인간의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인식을 통합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것을 주기적으로 해체하는 능력이다."
-14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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