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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 - 새로운 세상을 꿈꾼 25명의 20세기 한국사
강부원 지음 / 믹스커피 / 2022년 5월
평점 :

최근 변화가 없는 일터에 지쳐있었다. 아무리 건의해도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 코로나로 일을 쉬다가 다시 할 수 있게 된 것까지는 좋았지만 여전히 인식은 부족했고 예산도 부족했고 그래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있는 듯한 그들이 더욱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이럴 때 나는 대게 힘을 빼버린다. 안 되는 일을 억지로 하는 피로함이란 정신적·육체적 한계를 넘겨버리고 이내 정신을 차렸을 땐 어김없이 깜빡깜빡~ 경로 이탈 메시지에 불이 들어와있기 일쑤다. 아마 또다시 내일부터는 마음을 모조리 비우고 빈 눈동자로 일터로 향할 터. 이런 상황에서 만난 이 글의 주인공들은 사뭇 존경스러웠다. 그들의 인생 역시 고속도로가 아니었다. 나의 신념이 그들의 것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아니 오히려 자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닌 민족과 우리 사회를 위해 처음 마음을 끝까지 지키며 끊임없이 나아가는 그 다양한 여정을 한 명, 두 명 만나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사르르 녹고 있었다.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에는 수많은 불꽃 인생이 담겨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역사적 주요인물은 남성인 경우가 많은데, 여자들조차도 왜 여자보다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이 기록되어 있고 후손들에게 회자되는지 의문조차 품지 않는다. 나 또한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서야 여러 매체를 통해 부족함을 인식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위의 사진과 같은 독립운동가의 사진을 볼 때 이제는 종종 질문한다. 그 옆에 있는 여인은 누구냐고. 이 책은 수많은 발길에 밟혀서 빛을 발하지 못했던 이런 불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만 조명 받지 못한 분들을 이야기하다 보니 남성보다는 여성이 다소 많아 보일 뿐.
독립운동가 정칠성·남자현, 일본군 전쟁 범죄 피해자 김학순,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박열, 나운규, 이쾌대, 김수근, 김승옥 등 25명의 불꽃 인생을 한 권의 작디작은 책으로 만나자니 살짝 아쉬움도 느껴졌으나,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문장들을 곱세기며 읽다 보니 아직은 내 노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쉬이 놓을 수가 없었다.
처음 알게 된 인물이 많아 한 번에 읽기보다는 한 사람씩 천천히 만나보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한 번에 읽어버린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 영화 등의 매체로 한 번쯤 들어본 분들을 책에서 다시 볼 때는 또 한없이 반가워서 책을 덮자마자 그들에 대한 영화와 역사자료를 찾아볼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그 첫 번째 순서는 영화 암살을 통해 세상에 새롭게 알려진 남자현이 될 듯하다.
열아홉에 유생 김영주와 혼인하여
밥 짓고 빨래하고 유복자나 키우다가
딱 깨친 바 있어
안동 땅에 자자한
효부 열녀 쇠사슬에 찬물을 끼얹고
여필종부 오랏줄을 싹둑 끊으니
서로군정독립단 일원이 되니라
고정희, <남자현의 무명지>에서
세 손가락의 여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졌다던 남자현. 영화를 볼 때만 해는 과장이 심하겠지라고 저 시대에 여자가 저렇게 무기를 다루고 잘 싸우는 게 쉬운 일이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손가락을 잘라 조선인 각 단체의 단합과 협력을 요청하는 혈서를 쓰고, 길림사건으로 투옥된 안창호를 비롯 47명의 조선인 인사의 석방운동을 하고, 할머니라 불릴 나이가 되어서도 재만 전권대사인 '부토 노부유시'를 암살하기 위해 직접 나선 남자현. 뒤늦게나마 자손들이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그녀의 유해를 찾지 못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은 말한다.
'아무렇게나 잊혀도 무방한 이름은 없다. 이 책이 소개하는 스물다섯 명은 누가 뭐래도 20세기 한국사의 한복판에서 자신만의 규칙과 리듬으로 세상에 맞선 존재들이다. 이들은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이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를 해결하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덕분에 세상은 조금씩 바뀌었고, 역사의 물줄기도 방향을 틀었다.' <'들어가며' 중에서>
자신만의 규칙과 리듬으로 세상에 맞섰다는 말이 뇌리에 남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