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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일대의 거래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평점 :

"기적이 필요한 모든 아버지와 아들을 위한,
프레드릭 배크만의 인생소설!"
한때 세상 모든 아버지들이 이해가 되는 듯하면서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삶의 의미라고 하면서도 하루의 대부분을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매어 있던 그들. 언제나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가 막상 아이들이 성장하여 떠나면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했음에 아쉬워하면서도 미안해하는 그들. 마침내 죽음을 앞두고는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며 눈을 감는 그들.
하지만 또 어느 날에는 아이의 첫 뒤집기를 보지 못하고, 첫 기어감을 보지 못하고, 첫 걸음마를 보지 못하고, 아이가 내뱉은 처음 단어 '엄마'에 못내 아쉬우면서도 감격하던 그들이 안타깝고 안쓰러웠다.
그런데 이런 아버지로서의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프레드릭 베크만의 <일생일대의 거래>를 만나게 되었다. 사실 <오베라는 남자>, <베어 타운>, <브릿 마리 여기 있다> 등 워낙에 유명한 작품이 많아서 프레드릭 베크만의 책이라는 점만으로도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더 큰 소득을 올린 기분이었다. 2016년 크리스마스이브 늦은 밤에 잠든 아내와 아들 곁에서 써 내려갔다는 이 소설은 어쩌면 작가 자신의 아버지와의 화해이면서 또한 아들과의 화해일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아들에게 보내는 화해의 선물이라 느껴지기도 했다.
사업가로서는 성공하였지만 아버지로서는 실패한 한 남자가 암 선고를 받는다. 병원에 입원한 그는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를 만난다. 그 아이는 어른이 보고 좋아할 만한 행동을 하며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고 있었다. 엄마가 슬프지 않도록.
"나는 곧 죽을 거야, 또끼. 사람은 누구나 죽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십만 년 뒤에 죽을 테지만 나는 내일 바로 죽을지 모른다는 것만 다를 뿐이지." 아이는 소곤소곤 덧붙였다. "내일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남자는 죽음을 앞두고 과거를 돌아보니 아들에게 책 한 권 다정하게 읽어준 적이 없고, 아들의 생일날 함께 시간을 보낸 적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내와 아들은 오래전 자신이 출장을 떠났을 때 떠나버렸지만, 자신과 달리 무너질 듯한 술집 바텐더로 일하면서도 행복할 줄 아는 아들에게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자 한다. 자신의 부모님과 동생, 친구가 떠날 때도 보았던 그 사신을 만나 일생일대의 거래를 한다.
"가족과 못다 한 삶을 후회하는 남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안한 일생일대의 거래"
프레드릭 배크만 특유의 따스한 문장 덕분인지, 책은 순식간에 읽혔다. 100페이지 가량의 워낙에 작고 이쁜 책이기도 했지만, 두세 번 읽어도 순식간에 읽힐 책이 아닐까 싶다. 죽음을 앞둔 남자는 우리가 그동안 아버지들에게 느꼈던 복잡한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문화가 다른데도 아버지라는 자리는 같은 무게를 가졌다는 것이 새삼스러웠고,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변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라는 게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처음 부모가 되어 느꼈던 책임감을 다시금 떠올려보면 너무 공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남자가 보여준 일생일대의 거래를 보며 표현하지 못했던 사랑이 이만큼이나 컸구나 싶어 가슴이 뭉클했고, 가족들과 함께 하는 동안에 그 사랑을 표현하고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기도 했다.
모든 부모는 가끔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5분쯤 그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거다.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숨 막히는 부담감을 달래며. 모든 부모는 가끔 열쇠를 들고 열쇠 구멍에 넣지 않은 채 계단에 10초쯤 서 있을 거다. 그저 숨을 쉬고, 온갖 책임이 기다리고 있는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갈 용기를 그러모으면서.
예전에 비하면 이제 아버지들도 엄마 못지않게 아이들에게 사랑을 많이 표현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책임감 때문일까. 뭔가 방향이 다르고 방법이 다른 것도 사실이다. 아이들은 언제나 맑디맑은 눈으로 마음껏 그들의 부모에게 사랑을 표현하는데, 책임감에 찌들려 그러지 못하는 부모들보다 훨씬 현명하다는 생각도 든다. 더 이상 나중으로 미루지도 다른 핑계도 대지 말고, 사랑한다면 매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사랑을 표현하며 사는 삶이 진짜 행복한 삶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