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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2012년 이미 한번 만나보았던 김범 장편소설 <할매가 돌아왔다>가 다산책방을 통해 다시 한번 새롭게 선보인다고 하여 만나보았다. 광복 직전 염병에 걸려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던 할머니가 67년 만에 60억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나타났다는 설정의 놀랍고도 코믹한 이야기. 당시에도 너무 재미있어서 책으로만 3번이나 읽었는데, 7년 만에 다시 나타난 <할매가 돌아왔다>는 어떤 느낌일까 싶었다.
독립운동가로 명성이 높은 이 시대의 선비 최종태 할아버지, 나이 든 진보 최달수와 그의 부인, 그리고 아들 동석과 딸 동주 3대가 살고 있는 충남 부여 명문가 집안 최씨 가문에 2012년 한여름, 할머니 정끝순 여사가 돌아왔다. '드러운 잡년'이라는 할아버지의 폭언과 폭력,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아버지와 고모. 하지만 할머니의 60억 유산 이야기에 가족들은 혼란에 빠진다. 정말 60억 유산은 존재하는가. 유산에 대한 궁금증 속에 최씨 가족의 숨겨진 갈등이 드러난다.
사실 처음 이 소설을 접했을 때는 상황이 재미나서, 60억 유산을 두고 벌이는 가족들의 에피소드가 재미있어서 순식간에 읽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드러나는 가족들의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다. 입사시험 88연패의 대기록을 보유한 '나', 백수 최동석. 그의 찌질한 인생이 우리 시대를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씁쓸했는데, 교사를 그만두고 진보 정당 후보로 시의원 선거에 연거푸 세 번을 낙선한 아버지와 조선시대 마지막 선비를 자처하던 최씨 문중의 장손 할아버지까지 어느새 그 찌질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이 집안의 가정경제는 두 여인이 책임지고 있었는데, 바로 동네 슈퍼를 운영하는 어머니와 사학과 전임강사이자 이혼녀인 여동생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할머니의 잠꼬대를 통해 할아버지의 가정폭력까지 밝혀진다. 이쯤 되니 이 소설 페미니즘 소설의 한 획을 긋고 있었구나 싶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를 일본 순사에게 밀고했다는 누명을 쓰고 눈물을 머금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정끝순 여사. 그녀를 통해 일본에 끌려갔던 '위안부' 할머니들이나 병자호란 때 오랑캐에게 끌려갔다 돌아왔다던 '환향년'이 떠올랐다. 정끝순 여사는 그나마 화끈하게 60억 유산을 들고 나타났다지만, 역사 속에 희생되었던 이 할머니들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소설은 2012년 발표되자마자 이례적으로 영화, 드라마, 연극, 뮤지컬 판권이 모두 팔렸다고 한다. 당시 책도 재미있었지만, KBS 라디오 극장에서 하는 <할매가 돌아왔다>도 실감 나서 수차례 반복해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주말드라마를 별로 즐기지 않는 탓에 <떴다 패밀리>는 보지 못했는데 다시 보기로 보고 싶어졌다.
좋은 작품은 인생의 어느쯤에 읽느냐에 따라 주는 그 감동과 교훈이 다르다고 했던가. 수년이 지나 다시 읽은 <할매가 돌아왔다>는 나에게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여주었다. 나이가 들면서 성장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지만, 감동적인 만큼 가슴이 아프고 먹먹한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