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 해피엔딩
강화길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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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어느 날이었어요. 정확히 어느 해였는지, 계절은 어떠했는지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하나 기억하는 것은 도서관 책꽂이 사이를 지나다가 손에 잡히는 대로 뽑은 책. 표지도 확인하지 않고 스르륵 넘겨 본 한 페이지를 읽고는 그대로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선채로 읽어내려갔던 책. 

이것이 제가 기억하는 박완서 작가와의 첫 만남입니다. 그날 그 책을 통해 저는 아직 학생이던 시절, 나의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었고, 아들만 귀하게 여기던 외할머니를 이해하게 돼버렸지요. 그리고 어렴풋이 한국 사회에서 어머니들의 세상에 들어가야 할 나의 운명 또한 쉽지 않겠다고 직감했더랍니다.

이 날 이후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언제나 박완서 작가라고 망설임 없이 말하게 되었는데요. 이번에 박완서 작가의 문학 정신을 기리며 8주기를 추모하기 위하여 <멜랑콜리 해피엔딩>이 나왔습니다. 

이 책은 강화길, 권지예, 김사과, 김숨, 김종광, 박민정 등 한국의 소설가 29명의 단편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단편 모음집입니다. 짧은 글에 함축된 메시지에는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제가 박완서라는 이름에 이끌려 용기 있게 선택했다지요. 

그런데 이 책의 단편들은 단편에 대한 제 편견을 단 한 번에 없애주었습니다. 노안이 오기 시작하는, 종종 침침해지는 눈에도 보기 편한 활자와 행간으로 읽는 내내 편안함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쉽고 편안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어서, 한국 소설가들의 문장의 힘이 이렇게 강렬했던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멜랑콜리 해피엔딩>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외할아버지가 궁금한 손자, 대학 입학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고3 딸과 엄마, 창문 하나 없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20대 청춘, 부부싸움하는 부부 등 인생의 어디쯤을 살고 있는 다소 평범한 사람들이 나오지만 각각의 작품에 단편 소설 특유의 독특한 위트가 있어서 기억에 남았어요.

자신의 처지가 부담스러워 주저하다 보니 쉰 살까지 혼자 살거나, 남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년을 자원봉사하게 되는 등 크고 작은 인생의 파도를 나름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짠한 마음도 들었네요.

또한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유령 쥐처럼 다소 SF 영화를 보는 듯한 단편도 있었는데요.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먼저 찾아보아도 좋겠고, 순서대로 읽어도 좋을 듯합니다.







제가 가장 먼저 찾아본 조남주 작가의 <어떤 전형>에는 크리스천 전형이든 불교 전형이든 상관없이 어떻게든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애쓰는 고등학생이 나와서, 우리나라의 대학입시제도인 수시전형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어요. 

최수철 작가의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자의 죽음>을 통해서는 어떻게든 타인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 씁쓸하면서도 그래도 주인공이 소외된 사람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윤이형 작가의 <여성의 신비>에서는 직장맘이든 전업맘이든 나름의 힘든 삶을 볼 수 있었고, 이기호 작가의 <다시 봄>을 보면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세대를 거친 그들의 인생이 눈앞에 그려지기도 했고, 계층 이동이 더욱 힘들어지는 한국 사회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이렇게 <멜랑콜리 해피엔딩>은 박완서 작가를 그리워하며 한국 작가들의 짧은 단편을 한 권의 책으로 볼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시간이었는데요. 워낙 대단한 작가들이 모여있는지라 이렇게 몇 가지만 꼽는 것도 정말 힘들었네요. 다만 이 책을 통해 좋아하는 작가의 단편을 만나는 즐거운 기회도 되었고,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작가를 만나보는 귀한 시간도 되었습니다.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불공평함에서 시작된 성난 마음을 딛고 언제가 되든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서로를 조금 더 좋아하는 법을 배우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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