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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습관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8월
평점 :

94년 출간된 도리스 레싱의 단편집 To Room Nineteen : Collected Stories Volume One에 수록된 작품 20편 가운데 <19호실로 가다>에 11편, <사랑하는 습관>에 9편이 실려서 차례로 출간되었습니다.
<19호실로 가다>의 경우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고 주부로 살아가는 여성의 허무감을 표현하고 있었다면,
<사랑하는 습관>은 남성의 입장에서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는 외로움과 쓸쓸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그녀는 기묘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기묘하고, 슬프고, 약간의 존경심이 깃든 표정이었다. "있잖아요, 조지, 당신은 그저 사랑이 습관이 되었을 뿐이에요."" 37쪽
이 남자는 계속해서 다른 여자와 만나지만, 밤이면 어김없이 외로움을 느낍니다.
도리스 레싱이 그녀의 작품에서 묘사하는 1950년대 영국은 결혼과 상관없이 남여가 수없이 사랑을 나누고 헤어지기를 반복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들은 거짓이었나요. 아니면 너무 흔해서 가치가 떨어진 것일까요. 쓸쓸하고, 외롭고, 허무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게다가 조지의 세 번째 부인 보비는 마흔 살이 되던 날, 자식뻘로 보이는 어린 남자친구와 헤어지며 더 이상 사랑을 하기에는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예순 살이 되어도 사랑이 필요해서 딸 같은 보비와 결혼한 조지와, 40살 생일에 사랑 같은 허튼짓을 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여기는 보비의 결혼생활은 서로 상반되어 묘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하지만 책 뒤 편의 작품해설에서는 "보비도 결국 조지처럼 사랑을 습관처럼 하게 된 것"이라하네요. 제가 보기에는 보비가 사랑을 포기한 것처럼 보였기에 살짝은 다른 해석에 정말 그런가를 한참이나 생각했습니다.

<두 여자>를 살펴보면,
한 호텔에 묶고 있는 두 남자가 그 곳의 웨이트리스에게 추파를 던집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윽고 평화전선을 형성한 두 남자는 각자 젊은 시절 이 호텔에서 만난 여성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서로 다른 여성을 떠올리는 듯 하지만, 대화가 끝난 무렵 웨이트리스는 다가와 말합니다.
"어쩌면 그 여자분이 두 분 취향에 맞춰서 머리 색깔을 바꾼 게 아닐까요?" (78쪽)
다시 생각해보니 두 신사는 각각 영국인과 독일인입니다.
<동굴을 지나서>에서는 다른 아이들처럼 바닷속 동굴을 지나고 싶어 하는 아이가 나옵니다. 여러 날 끝에 결국 성공하지만, 이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필요치 않게 됩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외동아들을 너무 끼고 돌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공감이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가 적당한 것일까요.
<즐거움>이라는 단편에서는 프랑스 중년 부부가 휴가를 떠나고, 그 곳에서 영국인 젊은부부를 만납니다.
프랑스 부인 메리는 일 년을 휴가와 크리스마스 계획으로 사는 유행을 좇는 사람인데, 자신처럼 유행을 따르는 영국인 젊은 부인을 보고는 기분이 상합니다.
자신도 젊은 시절에는 그녀처럼 예뻐서 자매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여기는 메리는 자존감이 약한 사람이었나봅니다.

<스탈린이 죽은 날>에서는 스탈린이 곧 죽을 것이라는 신문기사가 난 날의 하루를 보여줍니다.
아직 소식을 알기 전, 노동당을 위해 일하는 진은 여자에게 끈질기게 믿음을 요구하는데, 그 모습이 길에서 만난 '도를 아십니까'를 말하는 자들 혹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자들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탈린이 죽을꺼라는 뉴스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죽은 날이 떠올랐네요.
<와인>이라는 아주 짧은 단편에서는 남자가 어린 날에 한 여자를 거절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여자는 과거에 자신이 겪었던 일인양 분노합니다. 어쩌면 실제로 그런 일을 겪었을지도 모르지요.
<그 남자>라는 단편을 보면서는 눈물이 울컥 나왔는데요. 애니의 헌신적인 결혼생활에도 불구하고 외도를 하는 남편. 그럼에도 남편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애니가 우리 시대에도 많이 있었잖아요.
"자신이 지독히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생각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를 곁에 두고 싶다면 이 생각을 반드시 억눌러서 다시 올라오지 못하게 해야 했다."(172쪽)

<다른 여자>에서는 세상의 이념에 넌덜머리가 난 여자가 나옵니다. 그 어떤 것도 그녀의 평온한 일상을 지켜주지 못해서 화가 난 듯 보였습니다.
"히틀러, 처칠, 스탈린, 루스벨트, 전부 속이 뒤집혀요." (194쪽)
<낙원에 뜬 신의 눈>에서는 독일의 외곽으로 휴가를 떠난 남녀 의사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슈뢰더 박사, 팔 다리가 없는 사람들, 정신분열을 겪는 크롤박사, 그리고 전후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평화의 수호자처럼 구는 화려한 미군들.
"그때는 우리가 불구대천의 원수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같은 공간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네. 전쟁의 패배자는 당신들이었지." 288쪽

노벨상수상작가 도리스레싱의 단편집 '사랑하는 습관'
도리스레싱의 1950년대 단편들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공산주의가 퍼지던 때, 일상적인 가치관이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이념면에도 <스탈린이 죽던 날>, <다른 여자>, <사랑하는 습관>, <두 여자>라는 작품들을 통해서 당시 유럽의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의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고,
<낙원에 뜬 신의 눈>이라는 작품은 전후의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어, 당시 한국의 모습과 오버랩되더군요.
가정을 이루는 것에 대한 남녀의 가치관의 차이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와인>이라는 작품에서는 대화로 해결하기도 하지만, 특히 <다른 여자>를 통해서 파격적인 가정의 모습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문제점이 있다면 그 문제점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대안을 찾아야 올바른 대안을 찾을 수 있겠지요.
도리스레싱의 그런 고민에 대한 흔적이 많이 보이는 작품들이었으며, 전반적으로 등장하는 여성들이 남성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성공적이든 아니든 간에 독립적인 인생을 모색하는 모습이 인상깊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