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에리크 로메르 - 아마추어리즘의 가능성 ㅣ 마음산책 영화감독 인터뷰집
에리크 로메르 지음, 피오나 핸디사이드 엮음, 이수원 옮김 / 마음산책 / 2017년 3월
평점 :
품절
작년 이맘때쯤 영화를 그만두고 취업을 하겠다고 결심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영화에 대한 열정이 남아 있었는데 그때 내가 떠올린 감독이 요나스 메카스와 에릭 로메르였다. 요나스 메카스는 그의 필름 다이어리 프로젝트처럼 나도 내 일상을 영화로 만들고 싶게 한 감독이었고(인스타그램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에릭 로메르는 극영화 감독으로서 내가 가장 찍고 싶은 류의 영화를 만든 감독이었다. 특히 에릭 로메르는 나의 최애 감독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영화는 단조로우면서도 단단하고 동시에 아름답다. 한번은 내가 애인에게 로메르처럼 되고 싶다고 말했더니 그럴려면 공부도 엄청 많이해야 하고 책도 많이 읽어야한다고 했다. 너무 맞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번은 영화 현장에서 친해진 분이 에릭 로메르를 좋아한다하고 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분의 지인이 프랑스로 유학 가서 로메르의 수업을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로메르가 수업 때 다룬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그 지인 분이 수업을 못 따라갔다는데.... 대체 로메르는 어떤 사람인지... 그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그래서 읽게 된 <에리크 로메르>는 피오나 핸디사이드가 엮은 에릭 로메르의 인터뷰집이다. 부제목이 '아마추어리즘의 가능성'인데 로메르의 박학다식과는 거리가 느껴진다. 물론 그가 아마추어라는 것은 전혀 아니고, 그의 영화 찍는 방식이 아마추어스럽다는 것이다. 로메르는 5,6명의 적은 인원의 스탭들과 일하며 적은 제작비로 대중이 아닌 자신의 영화를 좋아하는 일부 관객들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 심지어 제작지원을 받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그는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한(사실 날씨의 노예이지만) 자신만의 영화 제작 시스템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와같이 그는 자신만의 미학을 완성시킨 거장이기도 하지만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면에서는 한명의 아마추어 감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로메르의 영화의 룩뿐만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방식까지 본받고 싶어졌다. 쉬운 일은 아니다. 날씨의 우연을 받아들이고, 배우의 무의식적인 몸짓을 포착하는 일은 흉내낸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사람을 지배하는 일과 영화의 과장과 부풀리기, 캐릭터의 영웅주의, 그리고 스튜디오의 인공적인 면을 싫어한다고 해서 더욱 좋았는데, 그런 면에서 자신이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망은 자연현상을 찍고 싶은 욕망이었다는 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p.159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내 욕망은 원래 자연현상을 찍고자 하는 욕망이었어요. p.253 내가 영화를 사랑하도록 인도한 것은 자연이며, 그런 이유로 나는 다른 모든 예술보다 영화를 더 좋아합니다).
나는 이제 한국 상업 영화를 보고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의 대다수의 영화 학교나 영화제는 단편 영화조차 상업적인 때깔을 띤 영화를 원하는 것 같다. 그런 제도 안에 들어가서 원하지도 않는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러니 앞으로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에릭 로메르를 품을 것이다. 낭비가 없는 절약의 덕목. 그의 영화처럼 단단하고 깊이 있는 영화를 찍기란 어렵겠지만 그래도 그의 영화에 대한 태도만은 닮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흔들릴 때마다 이 책이 나를 붙잡아 줄 것이다. 아마추어주의에 입각한 영화 제작 시스템뿐만 아니라 캐릭터와 시나리오, 캐스팅과 연기, 의상과 색깔, 대사와 음악, 촬영과 조명, 16밀리와 1.33포맷 등 영화의 전반적인 요소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책이다. 아마추어리즘! 취미로써의 영화 만들기! 부디 내가 잘 해낼 수 있으면 좋겠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우선 직장부터 생겨야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