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내가 읽어본 게 별로 없어서 그의 작품들을 찬찬히 하나씩 찾아 읽고 있다. <햄릿>은 예전에 예술의 전당에서 <연극 햄릿>이라는 각색한 연극으로도 본 적이 있는데 그럼에도 작품의 내용은 잘 몰랐다. 그래도 막연하게 알고 있던 유령과 왕자 햄릿의 내적 혼란은 막상 활자로 보니 기대보다 차분했다. 유령도 시시때때로 나타나 햄릿을 혼란스럽게 만드나 싶었는데 의외로 희곡 안에서 자주 등장하지 않았다.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왕자 햄릿이 삼촌이자 덴마크 왕인 클로디어스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극중 앞부분에 한 번 나오는데, 그때 클로디어스가 회개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이유로, 만약 이때 죽이면 회개의 기회조차 없었던 아버지와 달리 클로디어스는 저승에서 용서를 받을까 걱정되어서 살인을 뒤로 미루는 장면이다. 단지 살인으로 아버지의 원한을 갚겠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후세계까지 고려해 살인 시기를 의식한다는 게 나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할 이유라 재밌었다. 그리고 또 재밌었던 것은 왕의 대신 폴로니어스가 햄릿의 광기가 자신의 딸 오필리아를 향한 사랑 때문이라고 진지하게 믿는 거... 선왕이 죽고 한 달도 안되어 어머니 거트루드가 삼촌 클로디어스와 결혼했다는 누가봐도 짐작할만한 이유가 있음에도, 햄릿이 미친 것은 자신의 딸을 너무나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믿는 게... 자기애라고 해야하나... 너무 자기중심적이라 해야하나... 암튼 웃겼다. 그리고 햄릿이 자신의 추측(클로디어스가 아버지를 독살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클로디어스에게 독살을 연상시키는 마임 연극을 보여주는데, 그때 클로디어스가 극한 반응을 보인다는 게 의외였다. 자기 형을 죽이고 형수와 결혼할 정도의 대범한 인물이라면 이런 연극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지점이 셰익스피어의 미덕인가? 아무리 냉혈한으로 보이는 인물도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 이것만은 아니겠지... 가장 강렬했던 장면은 당연히 엔딩이다. 애초에 4대 비극 중 하나이기에 엔딩에 대해서는 당연히 비극을 예감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모두가 죽어버리는 피비린내 나는 엔딩일 줄은 몰랐다. 이런 엔딩이 슬프다거나 참혹하다기보단 오히려 통쾌했다. 햄릿만 죽는 게 아니라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우리 모두가 죽으니 억울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고... 깔끔한 느낌, 다시 시작하는 기분, 리셋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그 유명한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내가 읽은 김정환 번역본에는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p.89)'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읽으면서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감흥이 없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닐 거다. 이건 마치...(유운성 강의에서 들은 것처럼) <네 멋대로 해라>를 보고 점프컷에 아무 감흥이 없는 것과 비슷한 거 아닐까... 아니면 당대에도 대부분 감흥없이 읽다가 후에 다른 작가들에 의해 회자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 대사보다 바로 뒤에 따라나오는 대사가 더 인상적이었다. '마음에 더 숭고한 태도는, 고통으로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견디는 것인가, 아니면 무기를 쳐들어 난관의 바다에 맞서는, 그리고, 거부하며 그것을 끝장내는 것인가(p.89)'인데 더 구체적으로 묘사해서 더 쉽게 와닿은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와 산책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시와 산책은 내게 먼 것이었다. 시는 어렵고 산책은 귀찮은 일이라 생각해온 것이다. 하지만 매일 시를 읽고 산책을 해서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면 나도 기꺼이 매일 시를 읽고 산책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쓸 수 없는 한정원만의 글과 문장이지만... 그럼에도 이 책에는 분명 시 읽는 이의 눈길과 산책하는 이의 숨결이 담겨있다. 그리고 긴 세월을 그런 마음으로 살아온 작가의 습관과 사려깊음이 읽는 이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데워준다. 주변을 낯설게 그리고 오래 바라보는 문장들이 책을 느리게 읽는 나에게 딱 알맞았다. 평소에 시를 거의 읽지 않음에도 책에 실린 시 구절들은 내 마음을 저릿하게 했다. 글과 문장에 군더더기가 없는 것마저 시와 닮았다. 정지돈이 <영화와 시>에서 점심에 읽기 좋은 시에 대해 썼는데, 점심의 시 대신 이 책을 골라도 좋을 것 같다. 그만큼 책 자체가 제목 그대로 시이고 산책이었다.


나는 걸음이 많이 느린 편이다. 중학생 때는 빨리빨리 걸어다녔는데 고등학생 때는 거의 걷지 않다가 20대인 지금은 느리게 걷는다. 몸이 무거워진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걷는 습관을 생각해보면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걸음이 느려진 것 같다. <시와 산책>을 읽으면서 내가 산책을 잘 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지만 나의 걸음이 산책자의 걸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어다니면서 이것저것을 줍줍한다는 한정원은 작고 하찮은 것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애정을 표한다. 나는 사진 찍을 때 꼭 그렇다. 나는 멀리 있는 대단하고 멋진 광경을 찍는 것보다 가까운 우리집 주변의 사소한 것들을 찍는 걸 좋아한다. 매일 걸어도 결코 같은 길이 아니다. 어느 날은 꽃이 피고, 어느 날은 잎이 자라고, 어느 날은 나뭇잎에 단풍이 들어있다. 어느 날은 빛이 들고 어느 날은 그림자가 진다. 어느 날은 귀여운 물건이 버려져 있고 어느 날은 멀쩡했던 구조물이 깨져 있다. 오래 찬찬히 구석구석 봐야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 나의 걸음은 당연히 느려진다. 이것은 한정원이 말한대로 열심히 걷는 일, 생활 체육자가 하는 일과 다르다. 걸으며 관찰하지 않는 자는 산책자라고 부르기 어렵다.


이처럼 산책하기와 사진 찍기가 닮은 일임에도 같은 일이라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그 차이를 생각해보면, 사진을 찍으면서는 나는 생각에 빠지진 않는 것 같다. 사진 찍기는 관찰을 포함하지만 그것은 분명 어떤 결과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다소 결과지향적인 일이다. 반면 산책은 그보다 자유롭다. 바깥을 바라보다가 언제든지 안을 바라볼 수 있다. 외부에 시선을 건네다가 내면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단 말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사진을 찍기 위해 산책하는 사람이 아니라, 산책하다보니 사진도 찍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내 걸음은 지금도 느리지만 더 느려도, 걷다가 잠시 멈춰 생각에 빠져도 좋을 것 같다.


한편 나에겐 없지만 한정원에겐 있는 것...그래서 부러운 것... 그것은 언어였다. 단어이고 문장이었다. 한정원의 단어와 문장은 새롭고 낯설면서 아름다웠다. 시를 사랑하면 이런 단어와 문장을 쓸 수 있게 되는 걸까. 시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세상을 겹겹이로 사는 것 같다. 사람과 사물과 세상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며 작은 균열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찬찬히 바라본다. 하지만 단순히 언어의 외피만 바꾼다고, 시를 열심히 읽는다고, 단어의 양만 늘인다고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태도 혹은 세상을 껴안는 방식이 아닐까. 그런면에서 나는 작가 한정원을 넘어서 사람 한정원에게 존경심이 들었다. 동시에 나의 세속적인 마음과 이기적인 마음이 부끄러웠다. 그의 문장을 탐하는 것까지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그저 한정원의 글이 더 읽고 싶다고, 이번 기회에 나도 시를 읽어보겠다고 말할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호크니 리커버 에디션)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평점 :
품절


읽으면서 과학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이 많이 떠올랐다. 지금은 과학책은커녕 SF소설조차 안 읽는 과학문맹러에 전형적인 문과순이로 살고 있지만... 초등학생 땐 장래희망이 과학자였고, 학원비가 조금 비쌌음에도 엄마한테 졸라서 직접 실험을 하며 배우는 과학 학원을 다녔으며, 학교 준거집단 활동으로 우주정보소년단을 선택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만의 현미경과 천체망원경을 갖고 싶어했고, 중학교 1학년 때까지는 남몰래 과학고등학교를 꿈꿀 정도로 과학에 대해 큰 애착을 가졌던 시절이 있다. 하지만 중2때 영화를 좋아하게 되면서 영화감독이 되려면 당연히 문과를 가야지! 라는 생각과 함께 과학에 대한 꿈은 점점 멀어졌다. 그래도 수학 과학은 나름 잘한다고 생각한 과목이었는데, 중3 때 과학선생님이 학생들 많이 틀리라고 시험 문제를 너무 어렵게 낸 바람에 난생처음 60점대의 점수를 받았고(지금 생각하니 그 선생님 참 나빴다), 그때부터 과학에 자신이 없어졌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학교의 과학 수업이 너무 재미 없어서, 또 대학 갈때 성적이 반영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과학 공부에 아예 손을 놓았다. 그렇게 과학은 내게 점점 멀어지다가 지금은 거의 눈길조차 주지 않는 분야가 되었는데 이번에 김초엽의 소설을 읽으면서 과학을 좋아했던 그 시절이 많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때 내가 이런 소설을 만나서 과학을 계속 좋아했더라면, 그래서 이과를 갔더라면(공무원시험 준비 안했겠지...)라는 부질없는 후회의 시간도 짧게 가졌다. 


책에 실린 단편들 중 <스펙트럼>이 제일 좋았고 <공생가설>과 표제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도 정말 좋았다. 어쩐지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책 제목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건 아마 내가 미래 세계와 SF소설에 가진 막연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SF소설을 거의 접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소설에서 그려지는 미래는 모든 게 가능한 성공의 세계라고 생각한 것 같다. 소설 속 미래라면 우리는 당연히 빛의 속도로 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 책 제목도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이지! 라고 기억해버린 거다. 아무튼 그런 나의 기대와 다르게 이 책에는 모든 게 가능할 것 같은 세계에서 그럼에도 실패하고, 좌절하고, 배제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래서 굉장히 먼 미래처럼 느껴지면서도 인물들이 친근하게 다가왔고, 논리적인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구축한 세계 속에서도 지성보다는 휴머니즘이 강하게 느껴졌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흔히 소설에 기대하곤하는 멋스럽고 감탄스러운 문장을 만나지 못해 아쉽기도 했는데, 대신 이 소설에는 그걸 뛰어넘는 대단한 상상력이 있다. SF 소설이 거의 처음인 나로서는 그런 설정과 세계관이 너무 좋았고 신선했으며, 과학적 논리로 증명하다시피 설명하는 문장들은 상상의 세계를 리얼하게 만들어주기에 작은 쾌감도 느꼈다.


책을 읽으면서 영화들을 많이 떠올렸는데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를 읽으면서는 <블레이드 러너>의 도시가 떠올랐고, <스펙트럼>은 <매드맥스>의 사막과 <코코>의 사후세상과 비슷한 이미지(그보다 음침한!)가 떠올랐으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그래비티>가 떠올랐다. 이렇게 소설을 읽으며 여러 영화를 떠올렸지만 언제나 내가 영화에서 본 고정된 이미지보다 글을 읽으며 상상한 이미지가 더 좋았다. 그러니 SF는 영화보다는 소설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더군다나 이 책에 실린 단편 대부분이 어떤 비밀을 알아내거나 누군가의 과거를 듣는 이야기라 전체적으로 아련한 감정이 느껴졌는데, 이런 아련함은 영화 이미지의 선명함보다 머리로 상상하는 흐릿함과 더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을 읽고 SF에 호감이 생겼다. SF 소설을 더 읽어보고 싶고, 나아가서 과학책까지 읽게 되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상영의 첫 단편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 실린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와 <부산국제영화제>를 재밌게 읽어서 <대도시의 사랑법>도 읽어봤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작품마다 격차가 컸는데 <대도시의 사랑법>은 연작소설이어서인지 비슷하게 재밌었다. 무엇보다 가독성이 좋은 책인데 그럼에도 읽는 속도가 더 더뎌진 나자신을 보며 어째 나는 책을 읽을수록 읽기 능력은 더 퇴화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책에 실린 4편의 단편 속 주인공이 이어지는 책이어서인지 조금 지루하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소설의 묘사 방식과 서술 방식 또한 모두 비슷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전개의 리듬이 너무 일정한 느낌이랄까. 강약이 잘 안느껴졌다. 그래도 성소수자 이야기임에도 깊은 고민에 빠지거나 우울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시종일관 유쾌하고 쾌활해서 신선하게 읽혔던 것 같다. 심지어 엄마의 암 진단과, 자신이 카일리라고 이름 지어준 에이즈와(책 속에서는 에이즈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담고 있음에도... 주인공은 어떻게든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래서 인물에게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고난이 크든 작든 주인공은 대체로 웃어 넘기거나 가볍게 생각해버리는데... 사소한 일조차 때론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곤 하는 나는 주인공의 일관된 이런 모습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물론 그에게도 당연히 진지한 고민과 고뇌가 있는데 소설은 그걸 아주 가볍게 그린다. 고민과 고뇌는 대체로 자신이 사랑하고 애정하고 때론 증오했던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재희, 엄마, 우주를 논하던 띠동갑 형 그리고 규호... 주인공 영은 이 네 사람과 나눴던 깊은 관계를 들려주지만 그 이야기가 내밀하거나 섬세하진 않다.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고 그 속에는 희노애락이 있지만 어쩐지 내가 영을 통해서 보는 재희, 엄마, 띠동갑 형 그리고 규호는 자꾸 대상화 된 인물처럼 느껴진다. 마치 단편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의 왕샤가 그렇게 느껴졌던 것처럼.. 그건 인간이란 원래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어찌할 수 없는 진실이 소설 전반에 깔려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주인공 영의 성격처럼 모든 걸 얼렁뚱땅 대충 넘겨버리겠다는 소설의 태도의 문제일까. 작가의 진심을 생각한다면 후자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느낌이 드는 건 이 책의 한계라고 해야하나, 아니면 박상영이 일궈내고 싶었던 스타일로 받아들여야하나.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와 <부산국제영화제>가 좋았던 이유는 한 인물의 시점을 통해서만 그려진 인물이 반대로 자신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재희, 엄마, 띠동갑 형, 규호도 자신의 입장을 보여줄 수 있는 지면이 더 넓었으면 좋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네 편 중엔 <재희>가 제일 재밌었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은 기대가 컸는지 기대보다 싱거운 소설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문장은 강하게 기억남는다(p.181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생각을 멈추고, 고작 지고 뜨는 태양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며 미소 짓는 그녀를 그저 바라보는 일.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일뿐이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문체가 읽기 힘들었는데 자꾸 명사로 끝나는 뚝뚝 끊어지는 문장이 적응 되지 않았다. <늦은 우기의 바캉스>는 무난하게 재밌었다. 함께 실린 강지희 평론가의 해설에서는 박상영의 소설들이 네온사인 같다는 말에 공감되었다. 명멸하는 네온처럼 한없이 가벼운 글쓰기(p.223)! 딱 그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리크 로메르 - 아마추어리즘의 가능성 마음산책 영화감독 인터뷰집
에리크 로메르 지음, 피오나 핸디사이드 엮음, 이수원 옮김 / 마음산책 / 2017년 3월
평점 :
품절


작년 이맘때쯤 영화를 그만두고 취업을 하겠다고 결심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영화에 대한 열정이 남아 있었는데 그때 내가 떠올린 감독이 요나스 메카스와 에릭 로메르였다. 요나스 메카스는 그의 필름 다이어리 프로젝트처럼 나도 내 일상을 영화로 만들고 싶게 한 감독이었고(인스타그램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에릭 로메르는 극영화 감독으로서 내가 가장 찍고 싶은 류의 영화를 만든 감독이었다. 특히 에릭 로메르는 나의 최애 감독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영화는 단조로우면서도 단단하고 동시에 아름답다. 한번은 내가 애인에게 로메르처럼 되고 싶다고 말했더니 그럴려면 공부도 엄청 많이해야 하고 책도 많이 읽어야한다고 했다. 너무 맞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번은 영화 현장에서 친해진 분이 에릭 로메르를 좋아한다하고 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분의 지인이 프랑스로 유학 가서 로메르의 수업을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로메르가 수업 때 다룬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그 지인 분이 수업을 못 따라갔다는데.... 대체 로메르는 어떤 사람인지... 그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그래서 읽게 된 <에리크 로메르>는 피오나 핸디사이드가 엮은 에릭 로메르의 인터뷰집이다. 부제목이 '아마추어리즘의 가능성'인데 로메르의 박학다식과는 거리가 느껴진다. 물론 그가 아마추어라는 것은 전혀 아니고, 그의 영화 찍는 방식이 아마추어스럽다는 것이다. 로메르는 5,6명의 적은 인원의 스탭들과 일하며 적은 제작비로 대중이 아닌 자신의 영화를 좋아하는 일부 관객들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 심지어 제작지원을 받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그는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한(사실 날씨의 노예이지만) 자신만의 영화 제작 시스템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와같이 그는 자신만의 미학을 완성시킨 거장이기도 하지만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면에서는 한명의 아마추어 감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로메르의 영화의 룩뿐만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방식까지 본받고 싶어졌다. 쉬운 일은 아니다. 날씨의 우연을 받아들이고, 배우의 무의식적인 몸짓을 포착하는 일은 흉내낸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사람을 지배하는 일과 영화의 과장과 부풀리기, 캐릭터의 영웅주의, 그리고 스튜디오의 인공적인 면을 싫어한다고 해서 더욱 좋았는데, 그런 면에서 자신이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망은 자연현상을 찍고 싶은 욕망이었다는 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p.159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내 욕망은 원래 자연현상을 찍고자 하는 욕망이었어요. p.253 내가 영화를 사랑하도록 인도한 것은 자연이며, 그런 이유로 나는 다른 모든 예술보다 영화를 더 좋아합니다). 


나는 이제 한국 상업 영화를 보고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의 대다수의 영화 학교나 영화제는 단편 영화조차 상업적인 때깔을 띤 영화를 원하는 것 같다. 그런 제도 안에 들어가서 원하지도 않는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러니 앞으로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에릭 로메르를 품을 것이다. 낭비가 없는 절약의 덕목. 그의 영화처럼 단단하고 깊이 있는 영화를 찍기란 어렵겠지만 그래도 그의 영화에 대한 태도만은 닮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흔들릴 때마다 이 책이 나를 붙잡아 줄 것이다. 아마추어주의에 입각한 영화 제작 시스템뿐만 아니라 캐릭터와 시나리오, 캐스팅과 연기, 의상과 색깔, 대사와 음악, 촬영과 조명, 16밀리와 1.33포맷 등 영화의 전반적인 요소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책이다. 아마추어리즘! 취미로써의 영화 만들기! 부디 내가 잘 해낼 수 있으면 좋겠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우선 직장부터 생겨야하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