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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문장 - 흔들리는 마흔에 참 나를 되찾게 해 준
길화경 지음 / 유노라이프 / 2021년 1월
평점 :
마흔이 흔들리는 나이라는 생각에 저는 동감합니다. 마흔이라는 나이 언저리가 다 되어가는 순간이 바로 엄마라는 쉴틈없이 역할에서 조금 숨통이 트이는 시점입니다. 바로 내가 살아온 길을 뒤 돌아볼 수 있는 시기입니다. 그 순간 몰려오는 수많은 감정들로부터 나를 지키면서 나를 찾아나서야 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도 많이 방황했고, 나를 찾기위해 조금은 독해지기위해서 노력했지만 결국은 엄마라는 옷이 참 벗기 힘들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조금은 주저앉았지만 다시 힘을내서 또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입니다.


'엄마의 문장'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부분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저자분의 성격이 저랑 많이 닮아서인지는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린시절 내성적인 성격때문에 많은 꾸지람을 듣고 자라야했고, 내가 아닌 내가 되기위해서 가면을 쓰고 살아야하고 그 가면을 쓸수록 내 안의 모든것이 점점 고갈되는 느낌을 받아야 했던 그 과정를 저도 작가분도 같이 겪었기에 마음을 통한거 아닐까 싶습니다.
엄마로의 역할에서 조금 벗어나 나를 돌이켜보면서 왜 나는 한번도 이 정해진 루트에 대해서 의심해보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때가 되면 결혼하고 아이놓고 시댁에서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도 그게 당연한거라고 생각하고 아이의 아픔도 모자람도 전부 내탓이 되는 그런 상황을 왜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뭔가 벗어날려고 노력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공허하고 슬프고 괴로운 날들이 지속되는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들...
주변상황을 탓하고 모든것을 밖에서 찾으려고 하니 생기는 현상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지금은 조금 생각을 바꿔서 '나'를 중점에 두고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저자의 말처럼 바닥을 딛고 일어선다라는 표현이 맞기를 한편으로 내가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P38 집에서 노는 존재로, 남편의 노동에 무임승차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내 생활을 존중 받지 못할 때였다. 집안의 행사에서, 옆집 엄마들에게서 내 시간을 지킬 수 있는 방패가 없었다. 집에서 노는 존재로 전략한 나는 무례하게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댈 핑계가 없었다. 그렇다고 잔 다르크가 되어 부당한 요구에 맞설 깜냥도 없었다.
P47 나를 채우기 위해 했던 수많은 활동이 실은 도망이었다는 것을, 무거운 질문을 애써 회피하려는 시도였음을 느꼈다. 노력하며 산다는 명목으로 나의 몸과 마음은 돌보지 못했다.
이 글귀들은 나의 마음을 정통으로 찌른다. 깜냥도 없었고 그래서 할 수 있는게 도망이었고 하지만 적장 돌봐야 하는 내 몸과 마음은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나를 정통으로 까발렸다.
불안은 성장하고 싶다는 마음의 시그널이자 잘 살고 있다는 증거
불안을 느낄때가 참 많다. 그런 나를 나는 싫어했다. 불안감은 안정감의 반대이닌까. 내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이유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 글귀를 보니 어짜피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지 않은가. 그리고 더 앞을 보고 나아가고 싶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지 않은가. 모든게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증거로 생각해보기로 그리고 노력해보기로 했다.
아이를 낳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만큼 자유롭고 주체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을. 아이를 기르는 일은 죽을 만큼 힘든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나를 아무 때나 가져다 쓰려고 하는 이들 사이에서, 그래도 되는 존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일, 가장 내 맘대로 안 되는 일이 뭐냐고 한다면 주저없이 아이키우는 일이라고 답한다. 실제로 이렇게 이야기한지 좀 되었다. 그런데 이런일에 대해서 모두가 이야기한다. '집에서 논다.'라고. 주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내뱉는 말이 상처가되어서 운적도 많다. 그러면서 정말 저자의 말대로 나는 노는 사람이 되어서 아무렇게 가져다 쓸려는 사람도 많다. '놀면서 뭐가 바쁘냐!'라는 그런 말이 가슴속에 콕콕 박힐 때마다 아프다. 작년 한 해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을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프고 슬프다.
누구나 한 번쯤은 횡재를 하고 싶지 않겠어요? 인생은 누구에게나 힘들잖아요.
저자분은 이 말을 듣고 본인도 누군가에게 횡재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웬지 뒷문장에 꽂힌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힘들잖아요.'
사람이 지치고 힘들고 이상하게 나만 힘든거 같은 생각이 든다. 나 역시도 가끔은 나만 힘든삶을 사는거 같아서 서러움이 복받친다. 하지만 인생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가끔은 이 말을 아이들과 나누기도 했다. 예민함을 똑닮은 둘째아이에게 나름대로 위안이 되고 불안감에 갇힌 아이를 꺼내는 말이 되기도 했다.
P132 사람이든 상황이든 변하게 마련이니 어떤 순간에도 정성을 들일 일이다.
난 사실 저작년에 '나'에 집중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 맘대로 안되는 아이들과 그 외의 다양한 관계에서 벗어나서 도망을 쳤다. 그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도망친 나는 작년에 코로나라는 특수환경에 더 크게 무너졌고 더 크게 대가를 치렀다. 정말 내가 도망쳐버린 모든것이 엉망이 되어버렸던 것이었다.
작년 한 해 방황도 많이했지만 느낀것도 있다. 난 그동안 도망칠려고만 했지 제대로 정성을 들일 생각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도망칠 궁리만하면서 하는 시늉만 할뿐이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퀘렌시아는 회복의 장소이다.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 힘들고 지쳐있을 때 기운을 얻는 곳, 본연의 자기 자신에 가장 가까워지는 곳이다.
-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중에서 -
작년한해 가만 생각하니 퀘렌시아 장소가 나에게 생긴것이었다. 우연치 않게 아이들이 각자방을 가지고 싶어하면서 생겼지만, 지금 아이들도 나도 신랑도 각자 자기방을 가지고 각자의 공간에서 회복중이다. 그 덕분에 자꾸만 새벽까지 밤을 새는경우가 발생해서 다음날 지장을 받게되는 악순환이지만 말이다. 나만의 공간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평일 밤이나 주말뿐이니 조금 아쉽긴하다.
자기 일을 남에게 존중받고 싶고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것만큼 남에게 대접하는게 옳고, 남에게 당하기 싫은면 남한테 그러지 않는다는 가하는 아주 기본적인 개념이잖아요. 평등 개념이라고 할까.
이 기본적인 개념이 정말 어렵다. 주변에서 이 기본적인 개념을 지키는 이는 글쎄 한번도 본적이 없는거 같다. 인간이기에, 감정이 있기에, 본성에 충실하기에 당연하다고 어쩌면 생각한다. 선 안에서 행동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항상 선을 넘는 이들과 마주하게 된다. 정말 웃긴것은 그들은 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적장 선안의 이들은 본인들이 어쩌다 선을 넘는 행동을 하게 될 때, 본인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바로 인지하고 멈춘다는 것이다.
나 역시도 선을 넘더라도 인지하고 멈출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항상 바란다. 선을 넘어도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과 같아질까봐 가끔은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