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잡은 이들이 부패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할 만한 이들이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자의 대답은 ‘둘 다 맞다’이다. 절대권력이든 그냥권력이든 똑같다. 히틀러든 엄석대든 똑같다. 스탈린이든 양진호든 노가다판 청소반장이든 똑같다. (마사 스튜어트가 The Sociopath Next Door에서 말했듯, 소시오패스들도 각자 처한 위치와 지위에 맞게 패륜의 규모와 심도를 가늠한다) 희망?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비세습적 방식으로 평화롭게 이양한 경우는 없다. 있었다. 극히 희귀하게. 저자가 말하는 희망이 하나 있긴 있다.저자가 강력히 제안하는 바, 권력을 가진 자들만을 집중적으로 감시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는 권력을 가진 자들 스스로가 그런 자기감시 시스템을 적극 도입하는 것이다.(내가 아는 유일한 사례는 성남 시장 시절 자신의 집무실에 CCTV를 설치했던 어떤 분 이야기뿐이다)여하간, 결론은 이렇다.힘을 가졌다는 것은 심각하게 이기적이고, 동정심 없고, 위선적이고, 비열하고 잔인하게 힘을 남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을 가능성은 애시당초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이다.한 사람의 인격을 시험해보고 싶다면 그에게 권력을 주어 보라. 링컨의 말이다. 링컨 할아버지가 말했다해도 그럴 필요 없다. 뻔하다. 검사까지 갈 것도 없다. 시골 이장만 봐도 알 수 있다.읽으면서 계속 나는 감사하며 해방신학의 대표 명제를 읇조렸다. '엑스트라 파우페레스 눌라 살루스(Extra pauperes nulla salus)'
다 읽은 다음에 감상을 쓰는 편인데, 이 책 5장 그러니까 <가난과 부끄러움의 윤리>는 읽으면서도 그리고 읽고나서도 솟구치는 과잉 열기를 진정시키지 못해 써버린다.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면서 수없이 숙고했을 부끄러움과 부끄러움의 부끄러움. 가난한 나, 편재하는 타인의 시선, 감출 수 없는 속물적 인정욕의 갈망 등으로 점철된 서글픈 인생을 거쳐 봤다면, 그렇지만 전염되지 않으려고 타락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쳐 본 이라면 이에 대한 숙고를 피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이 탁월한 에세이에 나는 한가지 더 첨가하여 숙고해본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꽤나 숙고해봤기 때문이다. 복수욕망이 그것인데, 이 자본주의의 근본정념 같은 것이 윤리적 부끄러움을 무기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원한감정은 속물적 부끄러움에 머물게 한다. 초월적 윤리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맵시 곱고 정갈스런 누님'(243쪽)에 대한 증오가 왜 없었겠는가. 속물적 윤리, 즉 가난해서 부끄럽다는 그 마음은, 억울하면 출세하라(240쪽)라는 복수욕과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