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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
링 마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 열병이 전 세계를 덮친다. 확진자는 그의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루틴을 끝없이 반복하며 죽음에 이르게 된다. 중국 이민자인 캔디스 첸의 눈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급격하게 쇠락해가는 뉴욕, 그리고 세계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동일한 패턴의 소식을 통해 멸망해가는 세계를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현재와 과거, 그리고 더 과거로 시점이 이동하는 형식으로 스토리가 펼쳐진다. 왜 캔디스가 콜로니에 합류했는지, 어쩌다 미국에 거주하게 됐는지 플래시백을 통해 꼼꼼하게 설명해 준다. 그렇다고 그 설명이 과하다기 보다 내용 전개를 풍성하게 해준다는 느낌이 더 들었다. 작가의 독자를 향한 치밀한 배려심을 느낄 수 있었다.
단절이라는 간단 명료한 제목을 통해 작가가 무엇을 드러내려 했을까?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사람, 공동체, 국가 간을 단절시킨다.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작가는 단절 그 이상의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늘 회사 입구에서 날 반겨주던 살가운 관리담당자가 어느 날 없다면? 내 옆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며 자판을 치던 동료가 없다면? 회사 대표가 새로운 계약서를 내밀며 소수 정예로 TF 팀을 꾸린다고 한다면? 화사엔 작동하는지도 모를 CCTV와 나만 남았다면? 이 모든 것이 세상이 비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인데도 캔디스는 관성에 이끌려 계속 출근한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추락의 위험성을 느꼈는데도, 911도 출동하지 못한다는 상황이 발생했지만 30층을 넘는 계단을 매일 같이 걸어 올라가 출근한다.
나라면 어땠을까? 극한의 상황이 소설 속에 펼쳐지고 있지만 큰 이질감은 느끼지 못했다. 나도 그렇게 계속 출근하지 않았을까? 집 밖은 위험하지만 회사만큼은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지 않을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루틴이라는 게 정말 무섭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없던 루틴까지 만들어 기적을 낳아보겠다는 움직임이 많다, 운동, 독서 등 좋은 것이 습관화가 되면 더 이상 그것을 반복하는 데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유지할 수 있다는 이론도 있다.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SNS에 무수한 간증자들이 넘쳐난다. 이 소설에서는 선 열병에 걸린 사람들이 자신의 루틴을 계속 반복한다. 하지만 삶을 영위하는데 필수인 식사, 수면, 목욕 등의 행위는 일절 하지 않고 소위 '일'이라고 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작가는 바로 여기서 현대인을 습격하고 있는 결핍에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루틴 반복은 뭔가 하고 있다는 성취감으로 우릴 채워주는 것 같지만 그것이 예기치 않게 중단됐을 때 찾아오는 불안감으로 이전에 채웠던 뿌듯함을 상쇄시킬 수 있다. 그리고 루틴을 꾸준히 지켰지만 SNS의 간증자들과 같은 성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는 박탈감까지 떠안을 수도 있다. 이 얼마나 소모적인 비극인가.
캔디스는 몇 명 남지 않은 회사에서 이와 같은 불안감을 느낀다.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에 찾아온 상황이라고 캔디스를 통해 말하고 있다. 어렵게 정착한 뉴욕이라는 세계의 중심에서 일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일을 향한 강력한 강박과 집착을 불러일으킨다. 그것도 모자라 일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킨다. 선 열병으로 인해 멸망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캔디스는 점차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 '달까지 가자' 등의 직장 소설은 솔직하고 디테일하게 일과 나의 관계를 정의하고 있다. 표현과 배경의 결은 확연하게 대비되지만, 링 마의 소설에서도 '일'이라는 내 전부와도 같은 루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든다. 일이 나인지, 내가 일인지, 내가 나인지. 가장 위험한 단절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바로 나와 나의 단절이다.
캔디스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당연히 원치 않았던 임신이었겠지만 무조건 낳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 새로운 생명이 무사히 빛을 보았는지 결말에 표현되지는 않았다. 그 아기가 처음으로 볼 빛은 희망의 빛이 되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작가는 아마도 이 생명을 희망이라는 메타포로 활용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읽으면서 한없이 슬프고 무력해지다가 마지막에 잃었던 힘을 보충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독서의 매력이 아닐까?
전염병에 의해 멸망하는 세상을 그렸기 때문에 코로나19로 급변하는 우리의 현재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더 허구적으로 느껴졌다. 소설이니까 당연히 픽션임에도 불구하고 허구적이라고 느껴진다는 느낌은 이 소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은 메타포의 향연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작가는 몇 가지의 평행 구조를 만들어놓고 끝없이 직유 및 은유하며 멈춤 없는 전개를 펼치고 있다.
그 몇 가지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국가의 단절
세계를 이끌어가는 연방 국가 미국은 마치 유럽 식민지 시절 이전 시절보다 후퇴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캔디스가 머무는 뉴욕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으니 다른 주, 도시들은 보여줄 필요도 없게 된다. 인디언이라 불리는 미국 원주민들은 땅의 경계 없이 근본적인 평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선 열병으로 인해 망가진 뉴욕(호은 미국)은 과거의 상태에서 평화라는 요소만 빠진 모습을 하고 있다. 나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위협적인 공간이다.
밥을 리더로 상점이나 주택을 습격하여 목숨을 부지하는 콜로니가 쇠락한 뉴욕의 축소판을 보여준다. 다만 그들은 아직 열병에 감염되지 않은 상태로 의지와 이동 능력을 가진 능동적인 조직이다. 그들은 습격을 할 때마다 신에게 기도하는 등 일종의 의식을 가진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의 마음을 공격하는 죄책감이라는 징후로부터 자유로워지기라도 하듯. 규칙이 있고 명백한 리더가 있지만 뭔가 석연찮다. 스스로 통제 능력을 잃은 뉴욕이나 뒤틀린 세계의 표상인 밥 일행이나 매한가지의 단절, 절망이라는 은유를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2. 가족의 단절
캔디스는 자의로 미국에 자리 잡지 않았다. 많은 이민자 2세가 그랬듯이 부모의 뜻과 의지의 연속선상에서 그렇게 됐다. 하지만 가족을 이끌어가던 캔디스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도 단절 현상이 일어난다. 미국만이 살 길이라는 아버지와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답이라는 어머니 사이에서 캔디스는 그저 시간과 상황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흘러 흘러서 결국 누구보다 뉴욕에 강하게 매몰된 화석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다.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불리는 실러캔스가 아프리카 앞바다에서 발견됐을 때의 충격과 반가움의 교차는 NY고스트 블로그를 통해 캔디스가 망가진 뉴욕을 전 세계에 알리는 소설 말미에도 동일하게 표출된다.
캔디스의 부모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강하게 충돌한다. 가족이라는 가장 기본적 형태의 공동체에서 어린아이를 둔 두 어른의 갈등은 자연스럽게 각종 단절로 연결된다. 캔디스의 가족도 그런 보편적인 과정을 따라 삶의 파도에 몸을 맡긴다. 중국 이민자 가족으로서 미국이라는 복잡 미묘한 사회 속에서 살아남는 과정을 꽤 적지 않은 분량으로 서술하고 있다. 사회에서의 유리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여러 커뮤니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며 그렇게 처절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캔디스도 결국 혼자되었을 때 부모들과 같은 선택을 반복한다. 열병이 창궐한 상황에서도 말이다.
3. 기업, 개인의 단절
스펙트라는 캔디스가 일하는 출판 중개 업체이다. 타임스스퀘어에 위치한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회사다. 기업이란 조직은 크면 클수록 변화를 두려워한다.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위치와 힘을 유지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에선 그 어떤 강한 조직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정한다. 결국 스펙트라는 구조조정을 꾀하고 있으며 소수의 희생제물만 남기고 움직인다. 하지만 건물은 그대로 둔다. 그 안에 끝까지 남은 것은 캔디스다. 기업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새로운 근로계약서로 제시하며 그 약속도 끝까지 이행함으로써 캔디스의 희생을 이끌어낸다. 움직이지만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기업은 진화의 루틴을 반복하며 멸망한다.
조너선은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캔디스에게도 몇 번이나 같이 떠나자고 한다. 이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현실성이 결여됐으면서도 결과적으로 가장 좋은 선택을 한 것 같다. 어차피 다 죽을 운명인데 움직이지 않고 후회하기보단 나은 것이니까. 그리고 루틴에서 자유로운 것은 역시 조너선밖에 안 보인다. 위태한 외줄을 타고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방에 차곡차곡 개어진 옷가지들처럼 안정적이다.
서두에도 말했지만 작가가 단절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사전적 의미와는 다른 본질의 단절을 말하고 있다. 대조적으로 짝 지어지는 몇 가지 구조는 결국 인간 개인 내적으로 응집해야 한다는 주제의식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생명력을 상실한, 무기 물질과도 같은 루틴의 반복으로 멸망의 길을 갈 것이다. 뉴욕처럼, 스펙트라처럼, 콜로니처럼 말이다. 나를 잃지 않는 길이 단절을 막는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