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폴 오스터의 생애 마지막 작품인
<바움가트너>를 읽으면서 상실과 애도의 시간을 보냈었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삶의 여정 속에서
기억의 파편들이 남아 있다는 것으로 희망을 살피게 되는
폴 오스터만의 깊이 있는 문학적 사유를 느낄 수 있는 작품에 이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으로 그의 작품 세계에 좀 더 빠져보고자
그의 책을 하나씩 찾아 읽는 벽돌깨기를 시작해보고자 <환상의 책>을 펼쳐 들었다.
차라리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으리란 마음과는 별개로,
나는 실제로 그것을 보았고 이제 그 말들과 이미지들이 내 안에 스며든 이상
그걸 담아둘 방법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날 아침에 적어둔 메모들은 내가 놓쳤을 세부적인 내용들을 기억하도록 도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그 영화가 내 머릿속에 살아 있게 해주었다.
p386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는 생각들이 있다.
그런 생각들은 너무나도 강력하고 추악하며 머리에 떠올리는 순간 정신을 타락시킨다.
나는 내가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아는 것의 끔찍함에 휘말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 못했고 이제 말해봐야 아무 소용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p451

비행기 사고로 아내와 두 아이를 잃게 된 버몬트 대학교 교수 데이비드 짐머.
그는 교수직도 내려놓고 암울한 현실의 고통 속에서 시름하며
무의미한 시간을 흘려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티비에서 무성 영화를 보다 웃고 있는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몇 개월만인지 그에게서 스스로가 살아있음을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상실의 아픔을 깊이 앓고 있다가
삶이 다른 국면으로 맞을 수 있는 계기를 심어준
헥터 만은 그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존재일까.
데이비드는 헥터 만에 대해 책
<헥터 만의 무성 세계>를 집필하게 된다.
60년이 지나고 헥터 만의 아내라는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는데
앨머 그런드를 통해 죽기 직전의 그를 만나게 된다.
실종 이후의 삶이 궁금했는데
헥터 만은 은둔 생활을 하며 비루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둘의 짧은 만남 후 곧바로 목숨을 끊고 만 헥터는
유언대로 그의 영화 필름, 작업일지, 시나리오
모든 발자취를 불태워 버리고만다.
그의 영화를 연구하고 삶의 자취를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헥터 만과 데이비드 짐머의 작품 속 인물인 두 인생 이야기가 오가며
중첩되는 느낌이 읽는 내내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게 만든다.
기록으로 소생시킨 삶이지만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은 자의 이야기를 보면서
복잡한 인생사에 대한 씁쓸함과 깊은 고독이 느껴진다.
데이비드가 집념처럼 쫓았던 헥터의 인생 속에서
어떤 삶의 존재 가치를 느낄 수 있었는지
조금은 도발적인 질문들을 스스로 되묻게 만든다.
비극으로 내몰린 삶에서 다시 살아갈 의미를 되찾는 듯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 또 다른 삶 속에서도
휘말리게 되는 알 수 없는 인생의 굴레를 보면
우린 끊임없이 환상을 쫓고 쫓다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폴 오스터만의 개성있는 독창성과
신비주의적인 문학의 매력이 이 작품 속에서도 빛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