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희망이다. 가장 인간적인 자질.
사람들은 먹을 것과 물을 주지 앟으면 들고일어날 수 있다.
신앙을 억압하거나, 자녀와 떼어놓거나, 전체주의 정권이 썼던 것처럼 여러 가지 자유를 빼앗는다면,
가들은 횃불과 곤봉을 들고 나설 수 있다.
하지만 희망은 까다로운 것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무엇을 할까?
둘 중 하나다. 아무것도 안 하거나, 모든 것을 하거나.
사령관은 그 양극단의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
모두가 죽을 운명이니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라며 냉소적인 반란을 일으키는 것도,
철저한 절망에 빠져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사령관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그곳은 노동수용소이므로 약간의 노력을 추가한 노동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킬른에서 희망은 무엇인가?
야생에 떨어져도 미친 행운과 투지와 요령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혹시나 하는 오염 위험 때문에
다 떨어진 신발을 신은 채로 총에 맞아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 희망이다.
p272-273
"킬른 생물의 상호 관계는 복잡한 중앙 통제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아요."
"하지만 연결을 이루는 데 아주 능숙하죠.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이곳 생물권은 우리를 이루고 있는 수수께끼, 처음 보는 기묘한 분자 구조를 풀려고 노력해 왔어요.
다양한 킬른의 종이 우리와 이곳 세상 사이의 간극을 메울 방법을 찾아왔죠."
p387
인간은 크고 복잡한 뇌를 가진 진화의 산물이다.
고립되고 외로운 지성.
킬른의 종과는 다른 점이 바로 이런 점이 아닌가 싶다.
서로 연결되어 공생 관계로 살아가는 것.
짓밟고 정복해 내야만 하는 문명의 이기와는 다른
외계 생물들의 생존 진화는 바로 이것에서 해결책이 시작된다는 것에서 놀라웠다.
이 책에서 놀라웠던 점은
하나의 생명 유기체가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생태적 진화의 핵심이
생존의 해답이 된다는 점이었다.
바로 킬른의 유기체들을 보면서
여러 개체가 공생하는 것이 가장 흥미로웠다.
킬른에서의 일련의 과정 속에서
다데브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독재에 대한 폭력성과 오만함을 더 부각시켜 보여준다.
무지한 겨루기가 결국 아무 효력이 없는 상태임을
그럼에도 끝까지 손아귀에 쥐고 있는 방패는
그들이 두려워하는 야생 사이에서 침범할 수 없는 경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인간 본성과 존재론적인 고전의 핵심을 외계 생물체의
공생적 관계 속에서 답을 찾게 될 줄 몰랐다.
결국은 희망과 연대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했지만
지금 우리 세상과 다를 바 없음을 시사하면서
이 세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