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한 짐작과 적잖은 우려보다는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대체로는 사람들의 예상만큼이나 적적한 소외 속에 있는 것이 시집이다.
어느 순간엔 놀랄 만큼 북적거리다가도, 일순 고요해지고 마는 서점에서 나는 늘 기다린다.
누군가 찾아오기를, 찾아온 그가 한 권 시집을 골라 집어내기를.
그것을 내 앞으로 가지고 와 말을 걸어주기를 바란다.
p26
시의 영역이 나에게 아직 맞닿아 있지 못해서 그런걸까.
가장 어려운 책의 분류 속에 두고 있다.
글과 글 사이의 긴 호흡과
온갖 상념들이 오가는 여유를 두고만 볼 수 없었다.
뭐라도 눈에 담고 읽어내야 하는 강박을 가진 나에게
'시'는 벗어남의 일탈이란 고정관념을 깨고 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말이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시집을 함께 읽는 모임을 통해
여태껏 내가 사랑하는 형태와는 다른 책이 말을 걸어왔다.
기꺼이 문을 열어주지 못하고
여전히 기다리게 만들고 또 기다리게 만들다
이제서야 살짝 그 문을 열어두었다.
긴 기다림 속에서 만난 책이라 그런지
시의 다정함을 찾고자 손을 뻗게 되는 어른이 되어간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기다림 뒤에 건네는 말과 같이 나를 반기는 듯하다.
내가 자주 되뇌곤 하는 단어는 후숙. 천천히 익어가다.
후숙의 마침은 알맞게 익음이며 나는 내 삶 어딘가에 그러한 지점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성숙하지 못하여 자주 누군가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풋내나는 떫은맛을 느끼곤 하지만 이 또한 후숙으로 가는 과정이리라.
나는 반점 하나 없는 바나나를 다시 한 번 들여다 본다.
어째서 바나나로부터 아무런 욕망이 일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
삶이라는 양태를 지켜보는 나만의 방법이 거기에 있었다.
p98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마음.
늘 조급함이 화를 불러 일을 그르칠 때가 많았다.
후숙해서 먹어야 제 맛인 음식들을
급한 마음에 입에 넣고서야 금새 후회하고마는 일이 어디 빈번하다.
사람 또한 익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알맞게 익어가는 삶의 형태를 가질 필요가 분명 있다.
삶의 중반부를 넘어가는 나는
어느 정도 숙성되어가는 사람일까.
천천히 느긋하게 나의 세계를 오밀조밀 만들어가는
이 시간들이 책들과 함께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긴 시간동안의 기다림에 고요한 문장에 시선을 빼앗기다
끝내는 쓰지 않고서는 않될 욕구를
책 속 곳곳에 흔적으로 남기는 기쁨.
좋아하는 것들로 그 시간들을 후숙하며
사유할 수 있는 문장들로 생각을 넓혀가는
근사한 매일 매일이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다.
기다리는 인생이 마냥 힘들지만도 않을
기쁠 일들을 찾아가는 매일이 되길.
책 속에서 또 나는 마음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