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가 의미했던 쾌락과 즐김이란 무엇인가.
그는 가능한 한 더 많은 물건들을 손에 넣으며 이를 즐기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고 했다.
쾌락이란, 헛된 필요성과 욕심을 제쳐두고 삶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라 했다.
또한 사치와 호화로운 삶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을 때 얻을 수 있는
내면의 안정을 쾌락이라고도 했다.
가진 것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삶을 영위하고, 가끔 풍요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 기쁨은 더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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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물질적 부를 소유했다고 해서
삶의 만족감이 높을까?
전설 속 미다스 왕 또한 황금에 눈이 멀어
손에 대는 모든 것들이 황금으로 변해버리는 능력을 얻었지만
처음의 기쁨에 만족을 얻지 못하고
결국 딸마저 황금으로 변해 좌절하고 마는 걸 보면
소유의 만족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의구심이 든다.
삶의 만족감과 부가 얼마나 중요한 상관관계가 있어 보이는가.
사실 크게 상관없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기가 싫었다.
아마도 내면안에 끊임없는 욕심을 어떻게든 놓지 않으려하면서
현실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이상을 꿈꾸며
꽤나 만족하는 삶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뭔가 벌거벗겨진 느낌이 들어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극대화 부류는 항상 최고만을 고집하는 이들로서,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전에는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반면 만족화 부류는 최고가 아니더라도 대충 좋아 보이면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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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그 결과가 좋지 않을 때 내.외면이 추락하는 정도 역시 크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러 개의 자잘한 것들에 분산 투자를 하게 되면,
어느 하나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나머지 다른 것들에 심혈을 기울여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공통적 삶의 만족에 대한 열쇠가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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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점을 향해 끊임없이 연구하다는 근성을 가진 극대화 부류는
만족이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을까.
대충 설렁설렁 일하는 듯 보이는 재능있는 만족화 부류는
완성도 있게 보이진 않아도 어느 정도껏 이룬 결과를
내놓기라도 하니 스스로의 만족으로 끝날지언정
대단한 결실을 얻고 못 얻고는 후의 문제일 뿐이다.
항상 분주하게 움직이고
끊임없이 하나에 몰입해 도달할 목표점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리는
그들에게도 낮은 허들의 지향점을 가지고
삶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작은 취미를 소유하는 것이
훨씬 건강해보이는 건 왜 일까.
대단히 오래 살 것도 아니고,
언젠가 끝이 있는 인생에서 우리가 매달리고 살아가는 것들에 대해
한번쯤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얼 위해 살아가는지,
사는 날 동안 나는 천국을 누리며 살아가는지,
그 천국이라는 곳에 도달하면 과연 그제서야 행복해지는 게 맞는지.
멀리서만 바라보는 이상향이 아니라
지금 즉시 내가 행복해질 필요와
높은 장벽의 기준점을 끌어내려
내가 닿을 수 있는 반경 내의 행복을 찾아
삶의 넉넉히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배워보는 시간이었다.
좀 더 자주, 좀 더 쉽게 행복을 맛보고 살아가면 좋겠다.
삶의 만족은 너무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걸
스스로 분명 알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