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하지 못한 언어의 갈증을 느끼는건
외국어 마스터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과 염원이 큰 이유가 크다.
닿지 않는 닿을 듯한 뭔가 모를 모국어의 우위에 놓인 듯한
이 묘한 외국어를 향한 짐착을 아직도 내려놓질 못한거 보면
이젠 정말 미련인가 싶어진다.
학창 시절부터 줄곧 배워왔음에도 성인이 된 지금도
원어민과의 프리토킹 정도는 가뿐히 하고 싶은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내가 포기하지 못한 외국어 정복의 꿈과
모국어 사이의 애증과 언어 세계의 매력과 판타지를
담백한 고백으로 전해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두 언어 사이를 오가는 일은,
마치 손으로 모래를 옮기는 것과 같았다.
아무리 손을 꼭 쥐고 조심조심 움직여도 알갱이가 술술 빠져나간다.
지금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완벽히 '치환' 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번역 혹은 통역은 언어의 '치환'이 아닌, 두 언어 사이의 대화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p106
번역본과 원서를 비교하면서 읽는 사람들이 있다.
나에게도 그런 인생 책이 있었으나
원서를 읽어내는 어려움이 컸지만
온전히 담겨있는 완전히 다른 언어의 세계에 대한 매력을
아마 그 때쯤 알게 된 것 같다.
직역한 문장을 번역해내는 놀라움과 센스를
감탄할만한 작품을 만나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두 언어의 조화로운 대화가 텍스트 안에 묻어 있고
그 글을 눈으로 읽어내면서 마음으로 새기는 과정.
서로의 독립된 개별의 존재를
중간 지점에서 하나로 이어 붙이기 쉽지 않은 과정을
아주 가끔 멋진 번역서로 만나보게 될 때의 희열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난 여전히 간절함과 기대로 책을 펼쳐 들게 된다.
비단 이 책의 저자처럼 프랑스어와 모국어 사이의
가깝지만 가깝지만은 않은 그 선을 넘나드는 관찰자적
생활자의 모습은 너무 날 것 그대로 생생하게 전해져서 좋다.
비슷하게 공감할 수 있는 독자의 취향을 저격해버린 것 마냥 말이다.
모국어의 세계에 속하지 못한 결핍도 있고, 프랑스어의 세계를 잃어버렸을 때의 결핍도 있다.
모국어로 생각한 것을 프랑스어로 표현할 때에도 결핍은 생기고,
프랑스어로 생각한 것을 모국어로 이야기할 때도 결핍은 느껴진다.
앞의 두 가지가 '그리움'에 해당하는 결핍이라면,
뒤의 두 가지는 언어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지 못하는,
로맹 가리가 말한 카멜레온의 고통에 가까운 결핍일 것이다.
p119
두 언어를 두 개의 방식으로 사고 할 수 있을까.
자라온 환경과 문화도 다른 곳에서
애초에 절반만 희석되어 살아가는 삶은 가능할지 모르겠다.
완전히 스며들기 위해선 어느 것 하나의 결핍은 두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결과일 듯 보인다.
'그립다'라는 정서를 프랑스어로 표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깊고 넓은 범위를 나타내는지
그 감정 하나를 싣는 것만으로도 뭔가 모를 한계가 극명히 보이는 듯하다.
두 세계를 다 담아낼 수 있는 언어를 만나볼 수 있긴 한가.
어떤 언어도 완전히 담을 수 없다는 말에 동감한다.
그런 결핍과 허기, 간극을 줄여나갈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해방되어 없어지진 않을 것이다.
염원을 가득 담은 간절한 마음은 영원할테지만 말이다.
두 언어가 서로 가까이 가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그 마음이 그대로 보이는 책이다.
그래서 더 마음이 쓰이는 건
나또한 닿지 못한 세계에 대한 간절함이 아직도 있기 때문이다.
해방을 꿈꾸지만 완전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가까이 닿기 위해 매일을 배우는 마음으로 외국어를 놓치 못할 것이다.
기분 좋게 밀려가기도 맞닿기도 하면서 말이다.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