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고 사적인 종이 연대기
어린시절 항상 연습장으로 쓰라고
아빠가 모으시던 폐지의 냄새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수학 문제를 풀기도 했던
종이의 유익함과 즐거운 추억의 회상이 겹쳐져
재활용되어 잘 버려진 종이는 그렇게 아깝지 않다란 생각에 마음이 뿌듯해진다.
어른이 되어 쉽게 사고 쓰지 않는 빈노트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가득 차지 않고 텅 빈 느낌을 얻기도 한다.
그럼에도 종이라는 물성이 좋아 이것 저것의 형태로
집 안 곳곳 많이도 가지고 있는 종이들을 보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보면 난 꽤 종이를 좋아하는 편인가보다.
그런 종이와의 연대와 추억거리가 가득한 이 책이 그저 좋았다.
괴로움을 종이 위에 토해낼수록 마음은 진정됐다.
불편했던 감정을 가슴속에 담고 되뇌었던 것이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는 걸 깨달았다.
불편한 감정은 쉽사리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일상에서도 불현듯 머릿속을 헤집었다.
물론 종이에 그것을 썼다는 이유로 마음이 확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쓰기 전보다 더 평온해졌다.
p127
종이에 기록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감정 정리에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어릴때부터 폐지 위에 맘껏 그리고 끄적였던
별 것 아닌 행동이 어지러운 마음을 그곳에 풀 수 있었던
소심하고 작은 해소 방법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래서 종이를 좋아했고 더 집착하게 되었나는 모르겠지만
나에겐 소소하고 소중한 물건이 되었던 건 사실이다.
가만히 손으로 기록하는 것이 좋아졌던 것이
아마 그때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그것들을 한데 모아 가끔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뿌듯해질 때가 많다.
별 수 없이 별 생각 없이 쓰다보니
제법 많은 이야기들을 토해왔던 종이 위의 글들이
나에겐 마음의 해우소 역할을 톡톡히 한다.
나는 필사를 비생산적인 행위로 판단했다.
누군가의 글을 따라 쓰는 일보다 그 시간에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게 효율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필사를 하며 생각이 바뀌었다.
필사는 누군가의 삶과 그가 겪어온 시간을 완벽히 이해하는 특별한 작업이다.
p159
사실 나 역시 필사를 맘 먹어 보진 않았었다.
최근에 평소 마음에 들어했던 필기구를 구입하면서
좋아하는 노트에 일기를 쓸까 고민하다가
너무 소중해서 읽을 때마다가 아깝게 여겼던 책을 꺼내
고심 끝에 필사를 맘먹게 되었다.
혼자서 경건해지는 마음과 바른 자세로
한 권의 노트에 완성되어질 책의 문장들을
하나 하나 옮겨적으며 얼마나 마음이 기울여지던지..
마치 내가 이 멋진 문장 속의 작가가 된 듯한
애정 듬뿍 창작의 욕구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이 맛에 필사를 하는 건가 싶어
끝나는 시점에서 느낄 그 쾌감을
매순간 묘하게 느껴지는 이 기분을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오늘도 뭔가를 사각거리는 종이의 질감을 맘껏 느끼며
몸과 부대끼며 사는 이 삶이 즐겁다.
이와 같은 유희적인 활동을 소중한 종이로
이어져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감격스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