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검색하다가 카프카를 두고 독일의 '이상'이라고 칭한 댓글을 보았다. 아, 그런가. 그제서야 문득 이 기묘한 느낌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깨닫는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난해한 문장의 연속이다. 문득 내가 초등학생일 때 카프카의 <성>을  읽고 나서 화를 내면서 도서관에 반납하러 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에 와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을 더 어린 시절의 내가 이해할 수 있었겠어, 라며 변명한다. 그리고 칭찬 한마디도 해줘야 겠다. 나 참 용감했구나, 라고.

 

 이 책을 읽는 동안의 나를 누군가 봤다면, 아마 정신 나간 사람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다. 금세 눈물을 그렁거린다 싶으면, 이번에는 화를 내고, 다음에는 비식거리며 웃다가, 끝내는 인상을 쓰고, 음울한 눈으로 책장을 덮는다. 이처럼 단시간내에 다양한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책이었던 것이다.

 

 「변신」의 그레고르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벌레로 변해버린 후 끝내 사체가 되고 말았을 때,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소통의 단절과 그 속에서 오는 고독, 역겨울 정도로 쉰 내 나는 타인의 눈초리와 비난 속에서도 가정을 걱정하고 가족을 변명했던 그의 착각 속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레고르가 죽고 나서야 평화로워진 잠자씨 가정은 끝까지 안온할 수 있을까. 사실 고백하건대, 벌레에 한센병을 자꾸 대입하게 되어서 그들의 가정사가 더 서러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센병뿐 아니라 인간들이 모두 두려워하거나 더럽게 여기거나 업신 여기는 그 모든 것을 대입해 보아도 좋겠다. 그러나 오해마라. 내가 지금 역겹게 생각하는 것은 가족들이 아니다. 물론 그레고르도 아니다. 그렇게 만든 현실이다.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현실.

 

 이처럼 현실의 부조리는 「판결」이나 「시골의사」 「학술원에의 보고」 「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늙은 아버지가 익사형이라 판결을 내리자 그 명령에 따라 자살해 버리는 아들, 야간 비상종 덕분에 한시도 쉴 새 없이 모든 것을 억압당한 채 혹한 속에 맨몸으로 내쳐진 시골의사, 옭아맨 현실 속에서 좋을대로 정의내린 자유에 속박당하는 원숭이, 평생을 굴 파는 것에 소모하며 출구를 찾는 짐승 한마리. 그들이 걸어온 길은 하나같이 억압되어 있다.

 

 엄격한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는 카프카. 그 탓인지 그가 쓴 글들은 대체로 억압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이상한 것은 그의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과 행동이다. 규칙과 법 등도 포함한 그 억압을 당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것을 받아 들이고 순종한다. 두렵기 때문이다. 규칙을 어기고 억압에 반항했을 때 쏟아질 비난과 고독이 두려워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다. 실존에 대한 문제 의식은 그런 식으로 곳곳에서 드러난다. 개인의 존재에 대한 인정, 타인과 맞설 수 밖에 없는 개별 존재에 대한 사유는 늘 고독하다. 그 개인의 결정은 언제나 스스로 정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맞서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부조리에 대응하지 못하고 순응하고 마는 현실이야말로 카프카가 우려하던 세계가 아닌가. 이런 의구심을 못내 지우기가 어렵다.

 

 그가 토로하는 비애는 언제나 무겁고 격렬하지만 내부의 것으로 침잠되기만 하기에 씁쓸하기 짝이 없다. 어째서 개인은 다수에 따라가야 하는가. 억압에 반항하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로 치부되어야 하는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진리는 어째서 거짓이 될 수밖에 없는가. 공동의 관심사와 공동의 선, 공동의 사상 등에 동조해야 하는가.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무섭다. 진실로, 소수를 외면하는 다수는 언제나 옳은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허나 누구도 정답을 말할 수 없는 문제다. 그것이 못내 서글프다. 나는 누구를 위한 존재인가.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검색하다가 카프카를 두고 독일의 '이상'이라고 칭한 댓글을 보았다. 아, 그런가. 그제서야 문득 이 기묘한 느낌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깨닫는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난해한 문장의 연속이다. 문득 내가 초등학생일 때 카프카의 <성>을  읽고 나서 화를 내면서 도서관에 반납하러 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에 와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을 더 어린 시절의 내가 이해할 수 있었겠어, 라며 변명한다. 그리고 칭찬 한마디도 해줘야 겠다. 나 참 용감했구나, 라고.

 

 이 책을 읽는 동안의 나를 누군가 봤다면, 아마 정신 나간 사람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다. 금세 눈물을 그렁거린다 싶으면, 이번에는 화를 내고, 다음에는 비식거리며 웃다가, 끝내는 인상을 쓰고, 음울한 눈으로 책장을 덮는다. 이처럼 단시간내에 다양한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책이었던 것이다.

 

 「변신」의 그레고르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벌레로 변해버린 후 끝내 사체가 되고 말았을 때,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소통의 단절과 그 속에서 오는 고독, 역겨울 정도로 쉰 내 나는 타인의 눈초리와 비난 속에서도 가정을 걱정하고 가족을 변명했던 그의 착각 속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레고르가 죽고 나서야 평화로워진 잠자씨 가정은 끝까지 안온할 수 있을까. 사실 고백하건대, 벌레에 한센병을 자꾸 대입하게 되어서 그들의 가정사가 더 서러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센병뿐 아니라 인간들이 모두 두려워하거나 더럽게 여기거나 업신 여기는 그 모든 것을 대입해 보아도 좋겠다. 그러나 오해마라. 내가 지금 역겹게 생각하는 것은 가족들이 아니다. 물론 그레고르도 아니다. 그렇게 만든 현실이다.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현실.

 

 이처럼 현실의 부조리는 「판결」이나 「시골의사」 「학술원에의 보고」 「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늙은 아버지가 익사형이라 판결을 내리자 그 명령에 따라 자살해 버리는 아들, 야간 비상종 덕분에 한시도 쉴 새 없이 모든 것을 억압당한 채 혹한 속에 맨몸으로 내쳐진 시골의사, 옭아맨 현실 속에서 좋을대로 정의내린 자유에 속박당하는 원숭이, 평생을 굴 파는 것에 소모하며 출구를 찾는 짐승 한마리. 그들이 걸어온 길은 하나같이 억압되어 있다.

 

 엄격한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는 카프카. 그 탓인지 그가 쓴 글들은 대체로 억압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이상한 것은 그의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과 행동이다. 규칙과 법 등도 포함한 그 억압을 당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것을 받아 들이고 순종한다. 두렵기 때문이다. 규칙을 어기고 억압에 반항했을 때 쏟아질 비난과 고독이 두려워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다. 실존에 대한 문제 의식은 그런 식으로 곳곳에서 드러난다. 개인의 존재에 대한 인정, 타인과 맞설 수 밖에 없는 개별 존재에 대한 사유는 늘 고독하다. 그 개인의 결정은 언제나 스스로 정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맞서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부조리에 대응하지 못하고 순응하고 마는 현실이야말로 카프카가 우려하던 세계가 아닌가. 이런 의구심을 못내 지우기가 어렵다.

 

 그가 토로하는 비애는 언제나 무겁고 격렬하지만 내부의 것으로 침잠되기만 하기에 씁쓸하기 짝이 없다. 어째서 개인은 다수에 따라가야 하는가. 억압에 반항하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로 치부되어야 하는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진리는 어째서 거짓이 될 수밖에 없는가. 공동의 관심사와 공동의 선, 공동의 사상 등에 동조해야 하는가.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무섭다. 진실로, 소수를 외면하는 다수는 언제나 옳은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허나 누구도 정답을 말할 수 없는 문제다. 그것이 못내 서글프다. 나는 누구를 위한 존재인가.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뱀에게 피어싱
가네하라 히토미 지음, 정유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다. 적나라한 표현들이 하나같이 소름이 돋는 걸 넘어서서 징그러워 눈을 감고 싶을 지경이다. 피어싱에 관한 용어들을 처음 보면서 호기심이 드는 것도 잠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넘기고 주춤한다. 아니, 그 전에 책날개에 흑백으로 처리된 가네하라 히토미의 얼굴을 보며 '갸르'잖아? 라고 외쳤던 것을 먼저 말하는 것이 순서일까.

 

 아무튼 이 책을 보면서 놀라게 된 것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이게 문화적 차이라는 것일까. 아니야, 일본 사람 모두가 이런 건 아니잖아. 분명 극소수의 이야기일 것이다. 아프리카 토인종도 아니고 어찌 이리 기괴한 일들을 일상으로 처리한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문화차별적인 발언을 내뱉었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4학년생이었을 때부터 등교 거부를 하고, 성인이 되기 전부터 집을 뛰쳐 나가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다는 그의 인터뷰를 보면 더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가 쓴 인물들의 소유욕, 욕정들도 이해하기 어렵긴 마찬가지다. 그들의 존재를 인정은 하되 가까이 하고 싶지는 않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온 몸에 피어싱을 꽂고 뱀혓바닥처럼 갈라진 그것을 낼름대는 아마와 동거를 시작한 루이는 점점 그를 흉내내기 시작한다. 아마를 따라 찾아간 시바에게 혀를 뚫어 달라고 하고, 문신을 새겨 달라 한다. 그리고 그 댓가로 지불한 것은 다름아닌 섹스다. 물론 아마에게는 비밀로 한다. 날름대는 혀에 반했다는 루이는 아마의 아르바이트비를 축내며 기생한다. 아마는 루이를 못 견디게 사랑한다고 하지만, 루이는 아마의 사랑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가 돈을 벌어와 편하게 생활하면 할수록 일상에 염증을 낸다. 곡기에는 입도 대지 않고 술만 마신다. 점점 알콜릭이 되어가는 루이는 마침내 아마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에게 열정을 다한다.

 

 아마가 사라진 뒤, 루이가 성의를 다해 그를 찾는 것은 의아하기까지 하다. 아마와의 생활이 거듭될수록 삶의 의미를 상실해가던 루이가 되살아난 것 같이 느껴진다. 아마에 대한 소유욕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내 안에 녹아 들 것이지 왜 말도 없이 사라지느냐는 화를 내며 절망한다. 이것을 단지 루이의 성장으로 여기기에는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루이에게는 아마의 실종이 단지 가지고 놀던 곰 인형을 잃어버린 상실로 밖에 치부되지 않는 것일까. 아마의 집에서 계속 그를 기다리던 루이는 그의 죽음을 알자마자 다시 기생할 곳을 찾는다. 바로, 문신을 하러 갈 때마다 섹스를 하곤 했던 시바와 동거를 시작한 것이다.

 

 루이가 정신을 차리고 차츰 밥을 먹으려 노력하는 모습이 기이하게 느껴진다. 곧장 죽음으로 달려가던 그가 샛길로 빠져 나와 삶을 되찾는다. 아마처럼 시바까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아마처럼 뱀혀를 만드는 것고 피어싱을 하는 것도 섹스를 하는 것도 모두 다 무의미하다고 토로하던 루이는 자신에게 되묻는다. 이 모든 것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그리고 그 무의미한 것에 이끌리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으냐고. 삶 자체에서 무의미를 느낀다고 했던 그 대신 아마가 죽은 것은 그를 살리기 위해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누가 아마를 죽였는가. 

 

 야산에서 아마를 사체로 발견했다는 경찰의 말을 들은 루이는 격분한다. 그리고 그 격분이 무색하게도 곧바로 시바에게 안긴다. 그 순간, 나는 의심한다. 그를 죽인 것은 시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루이조차 그것을 의심할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루이는 또다시 기생할 곳을 잃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물론 돌연 삶을 다시 살려는 루이에게 그럴 듯한 계기를 부여할 수는 있다. 아마의 죽음이 그를 성장하게 했다던가 하는 그런 이야기 혹은 그가 남기고 간 애정의 증표를 보며 갑자기 그가 절실해졌다거나 하는 이야기로 말이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다. 풍요를 지리해 하고, 행복을 귀찮아 하고, 또 삶을 내팽겨 치는 것들의 연속에서 무엇을 찾아야 할까. 무의미한 삶에 의미를 부여한 그 자체를 축복한다면, 오히려 낫겠다.

 

 루이는 문신을 새길 때 눈동자를 그려 넣지 말아 달라고 시바에게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것들이 생명을 가지고 날아 갈지도 모른다면서 말이다. 그것들을 영원히 자신의 소유로 남기기 위해서다. 아마가 자신에게 녹아 들길 바랐던 것과 같은 이유다. 결말에서 루이는 다시 부탁한다. 용과 기린에게 눈동자를 그려 넣어 달라고. 이제 그것들을 소유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뜻일까. 다시 삶에 생기를 부여하고 싶다는 뜻일까.

 

 후텁지근한 열기 속에서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불쾌함이 온몸을 감싼다. 한 낮의 열기와 고통에 초조하기 짝이 없어졌다. 하지만 이 불쾌함이 마냥 싫지는 않다. 그 불쾌함 또한 온전히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불쾌할 정도로 모나게 튀어 나와 날카롭게 찢어진 살결을 쓰다 듬고 싶다. 썩은 어금니가 흔들거려 뽑히자, 뱉지 않고 삼키던 루이의 말이 생각난다. 내 피와 살이 되어 달라던, 절실함이 너울친다.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들레 공책 도코노 이야기 2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온다 리쿠를 처음 읽었다. 그의 소설을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분들께는 송구하나, 나는 그 정도로 온다 리쿠에게 몰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20세기 초엽이라는 배경과 환상적인 분위기의 묘한 배합은 그럴 듯 했으나 그 정도로는 무언가 2% 부족한 느낌이 강렬히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코노 이야기의 첫번째인 <빛의 제국>을 읽지 못하고 읽은 점이 아쉽긴 하나, 그 때문에 이 소설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아니라 다행이다. 어쨌든 최근 읽었던 일본 소설들을 비교해 보자면, <민들레 공책>이 특별히 나쁘지는 않았다. 일본 특유의 가벼움이 덜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만, 책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민들레 공책>은 '민들레'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서정적인 느낌이 무척 강했던 책이었다. 책을 덮자, 미네코가 조근조근 말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 같아 살풋 웃음을 터트리게 된다. 시대적 배경에서 오는 불안감과 소녀적 감성의 뭉클함 등은 세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잘 와닿아 완성도 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민들레 공책>에서 등자하는 도코노 일족은  누군가를 자신에게 '넣어' 기록하는 하루타 일가이지만, 초점은 그들이라기 보다 미네코다. 또한 미네코라기보다 사토코다. 미네코의 아버지는 지역 유지인 마키무라 일가의 주치의이다. 그 탓에 마키무라가의 막내딸 사토코의 친구가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키무라가의 사람들은 마을을 위해서는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는데, 태풍이 지나는 와중 미네코와 사토코가 마을 아이들을 구해낸다. 사토코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고 하지만, 갑작스런 그의 죽음은 미네코에게 큰 아픔이 될 수밖에. 그 이후, 전쟁으로 인해 마키무라가와의 인연이 끊어지게 되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 또한 안타까움으로 남게 된다.

 

 미네코는 그 좋았던 옛 시절을 잊지 못하고 끝없이 회상한다. 일기장인 민들레 공책은 모두 사라지고 단 한 권만이 남았지만, 미네코의 기억은 그것들처럼 잃어버릴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잃을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추억의 상자를 고스란히 담은 <민들레 공책>은 그런 점에서 더 많은 안타까움을 풍긴다. 미래를 약속했던 인연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흩어져 버리고, 더 먼 미래조차 윤기없이 퇴색해 버린다는 것이 씁쓸한 입맛을 느끼게 한다.

 

 사토코의 스스로를 지칭할 때, '나'라고 하지 않고 '사토코'라고 했던 것처럼 거리감이 느껴진다. 동시에 앞서 말한 것처럼 안타깝다. 사토코가 집안에 갇혀 자신만을 위안하며 지냈던 시간들이 그런 습관을 버리지 못하게 만든 것 말이다. 그것은 마치 미네코가 옛 시절에 집착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스스로를 3인칭으로 지칭하는 것은 유아기에 당연히 겪는 일이지만, 점점 자라나 자아확립과 동시에 정체성을 체득하게 되면 그 습관은 잊혀지게 된다. 그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주관이 없고 심지가 약하기 마련이다. 사토코가 아름다운 외모와 높은 지적 능력을 갖고 있었으며 또래에 비해 성숙했다 하더라도 정체성을 획득해야 하는 시기를 원활히 넘기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미네코가 전쟁통에 아름다웠던 소녀 시절을 잊지 못하고 끝없이 회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둘은 그런 의미에서 비슷한 시대적 희생자다.

 

 미네코가 한국을 작은 반도라 칭하며 그곳을 두고 싸우는 일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을 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일본인이 일본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한국인이 어떻게 일본을 이해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탓일게다. 하지만 거꾸로 뒤집어 보면, 우리나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이처럼, 시대가 격동할 때의 희생자들을 떠올리며 숙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문득, 도코노 일족이 시대와 사람을 '넣는' 것처럼 우리도 그 시대와 사람들을 곡해하지 않고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삶은 짧지만, 기록은 영원하다. 이 시대의 기록은 어떻게 남겨질까. 수없이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후대인들은 무엇을 믿을까. 부디 이 시대의 제대로 된 기억들도 도코노 일족들의 능력이 발휘되어 간직되어지길.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산 정조대왕 - 조선의 이노베이터
이상각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이산 정조대왕>을 다 읽고 난 후, 이 책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어울리는 말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사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지만, 정조 시대의 끝은 너무나 안타깝기 그지없고, 또 허탈하다. 사도세자를 아버지로 둔 그가 오랜 세월을 인고하며 개혁의 발을 내딛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한순간에 스러졌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으랴.

 

 정조는 당파의 싸움을 피해 능력있는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 했던 탕평책, 금난전권을 금지하고 난전을 허용한 신해통공 등을 시행했다. 그 뿐이랴. 서얼허통과 노비제도의 혁파, 암행어사 제도의 확대, 국립도서관인 규장각 설치, 친위부대인 장용영 창설 등을 통해 막강한 개혁정치를 시행했다. 이 같은 제도의 시행 등으로 미약했던 왕권을 강화한 것은 그의 사리사욕을 채운 것이 아니라 바른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기에 더욱 의의가 깊다.

 

 이처럼 문무를 겸비하고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세종만큼이나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세종보다는 평가절하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요즘들어 이렇게 정조를 재조명하는 것은 참 고맙기 짝이 없다. 나처럼 국사에 무지한 이들도 친근하게 그들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책의 아쉬운 점은 실로 엽기적이라 할만한 문체를 통해 풀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식이 두서없이 횡행하여 난잡한 느낌마저 준다. 게다가 이같은 글쓰기 방법의 문제뿐 아니라 더 깊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모든 사건을 측면이 아닌 정면 돌파를 하고 있어 저자인 이상각의 사관만이 옳다고 여길만하게 짜여져 있다. 받아 들이는 것은 독자의 몫이지만, 이처럼 당황스러운 전개는 독자를 수렁으로 몰고 간다. 또 무엇보다 당황스러웠던 것은 참고한 도서 목록이다. 이 목록들을 보면 이상각의 주관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이런저런 역사서들을 마구잡이로 섞어 놓은 것으로 보일 밖에 없다. 참고 도서 목록을 잘 살펴보면 원저가 아니라 풀이서인 것이다. 그것도 대개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쓰여진 책들이었다.

 

 조선의 개혁가, 이산 정조대왕. 그를 살펴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지만, 이런저런 아쉬운 점들이 눈에 띄어 내 기대에 부합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정조와의 만남만은 즐거웠다. 霖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