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연인들 - 김선우 장편소설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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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시인이 장편소설 《물의 연인들》을 냈습니다.

1980년대말, 학생운동의 일환으로 시창작 활동을 시작한 김시인, 문단 데뷔이후에는 관능과 모성과 자궁의 이미지를 독창적으로 버무린 이미지를 창출함으로써 시단의 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대학시절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살아있어 2010년, 2008년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 정국을 다룬 최초의 장편소설 《캔들 플라워》(예담, 예스 24 나비 웹진에 연재되었다)를 내면서 무용가 최승희를 다룬 첫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실천문학사, 2008)로 가능성을 묻던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명실공히 확인 시킵니다. 지난 8월에는 제주도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 사태의 진실을 알리는 소설 《구럼비를 사랑한 별이의 노래》(공저, 단비)를 낸 바 있습니다.

 
물의 사람들인 한지숙의 삶, 유경과 연우의 사랑, 수린과 해울의 운명적 만남을 자연스럽게 엮어 스토리를 진전시키면서 인간들의 탐욕이 물의 세계에 자행하는 폭력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끔찍한지를 보여줍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의 물방울인 개인들, 특히 유경은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개인의 삶이 가능하지 않으며 한 개인은 원하든 아니든 관계 속의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아갑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으로 가면서 작품은 인간들의 지나친 소유욕(‘너는 내 꺼야’)은 인간이 인간, 사회, 자연과 맺는 어떤 관계에서도 폭력을 초래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독자들에게 일깨웁니다. 한지숙의 남편과 현재의 ‘4대강 사업’ 입안, 시행자들의 폭력이 똑 닮아 있다는 점은 많은 독자들을 섬뜩하게 할 것입니다.

무위암의 할머니, 당골네, 와이읍의 유선생, 폴이 살아 숨 쉬며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한 보탬 하는데, 이는 시인 김선우의 소설가로서의 미덕이 돋보인 좋은 예입니다.

작품에 나오는 파울 클레의 두 그림 <새로운 천사>와 <지저귀는 기계> 만으로도 작가는 이미 이 작품으로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짐작하게 합니다.

태엽으로 노래하는 기계 새는 4대강의 로봇 물고기를 연상케 하며 발터 벤야민이 소장했던 새로운 천사의 날갯짓(천사는 진보의 폭풍에 밀려서,뒷걸음질로이긴 하지만 미래로 가고 있습니다)은 미래를 낙관하지는 않지만 포기할 수도 없다는 작품의 방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품의 마지막, 유경이 폴에게 전화하는 대목에서 문득 떠오른 생각으로 마무리합니다.

 

유경의 미래의 모습이 프랑스에서 아이를 키우며 거침없으면서도 좋은 글을 쓰는 作家-戰士 목수정의 현재 모습을 닮아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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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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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감출 수는 있어도 역사를 바꿀 수는 없어”

 

프란츠 리스트의 〈르 말 뒤 뻬Le mal du pays, 향수병〉를 들으며 하루키가 상상력을 동원해 소설을 만들었구나, 이 소설을 읽고 난 직후의 소감입니다. 느낌은 음악처럼 슬프고 소설처럼 쿨하고 산뜻합니다.

 

 

아무런 색채가 없는, 당연히 개성이 없는, 이성적異性的으로는 물론 이성적理性的으로도 누군가의 관심을 끌 리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 그러나 친구들에게는 “냉정하면서도 언제나 쿨하게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는” 곁에 있건 없건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이 사실을 다자키가 알게 되는 것은 네 명의 친구와 헤어진 지 16년이 지난 삼십대의 한 복판에서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배타적인 절친 이너 써클의 친구들, 아카(빨강), 아오(파랑), 시로(하양), 구로(까망)와는 달리 주인공 다자키의 이름에는 색깔을 가리키는 글자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교묘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하루키는 그의 이름에도 장치를 합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이지만 그가 주인공일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야 했겠지요, 다자키의 이름에는 다른 의미의 글자를 넣었습니다. ‘쓰쿠루’입니다. 〈作만들다〉, 색채가 없는 대신 다자키는 ‘만드는 사람’입니다. 하루키가 줄곧 고딕체로 강조하며 쓰는 낱말의 하나처럼 〈정말로〉다자키는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 또한 16년이 지나서 확인한 일이지만 색채가 없는, 무덤덤한, 스스로 생각해도 있으나마나한 존재 같았던 다자키, 아니 쓰쿠르, 실은 그가 5명의 절친 그룹을 지탱할 수 있게 한 중심이었고 보호막이었습니다.

 

〈4色 + 1作〉.

 

네 가지 색을 가지고 고등학교 시절의 빛나는 모임/추억을 빚어낸 사람이 바로 ‘만드는 사람’ 쓰쿠루였던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 나고야를 떠난 사람은 럭비선수 출신의 씩씩한 아오도, 수재형 똘똘이 아카도, 수의사 지망생이지만 날카로운 메스를 들고 개의 배를 가르고 말의 항문에 손을 집어넣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을, 감성적이고 지나치게 민감한 시로도, 자립심 강하고 터프한 성격에 말이 빠르고 머리회전도 그만큼 빠른 구로도 아니었습니다. 도쿄로 떠난 사람은 바로 쓰쿠루였습니다.

‘만드는 사람’ 쓰쿠루가 빠진 이 절친 모임은, 나고야에 남은 네 가지 색채의 사람 누구도 내놓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균형추가 빠진 기계처럼 삐걱거린다는 것을 느낌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색채는 빛나면 되는 것이지 조절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니 쓰쿠루가 빠진 결과는 뻔한 것이었겠지요. 삐걱거리는 이 모임을 가장 견디기 어려운 사람은 민감한 시로였을 것이고 사달이 나는 것이 거기였을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전후 사정은 끝까지 알려지지 않지만 시로는 실제 누군가에게 강간을 당하고 임신을 하고 유산을 합니다, 그리고 서른 살에 교살 당합니다. 시로는 자기를 강간한 사람으로 쓰쿠루를 지목합니다. 절친 그룹의 아카, 아오, 구로 누구 하나 이것을 믿지 않지만 시로가 원한다는 핑계로 쓰쿠루를 그룹에서 제명합니다. 이제 쓰쿠루는 사라지고 남은 것은 다자키입니다. 세 명 가운데 아무도 다자키에게 제명시키는 까닭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이 소설의 전개에서 난처한 하나의 지점이기도 한데 전후 사정을 밝힌다면 소설은 더 이상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것이고 까닭을 말하지 않고 그냥 제명한다고 통보하는 것으로 그치는 일은 그간의 그들 사이의 관계에 미뤄볼 때 지나치게 인위적입니다. 이 난처한 지점에서 하루키는 후자를 택하면서도 인위적 인상을 씻어내는데 이 지점은 우리가 뛰어난 소설가로서의 하루키의 자질을 확인하는 지점이 되기도 합니다.

 

소설은 대학교 2학년 후반기, 고등학교 시절의 절친 그룹으로부터 절교 선언을 받고 약 반년 간을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다자키 쓰쿠루가 그렇게나 강렬하게 죽음에 이끌렸던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명백하다. 어느 날 그는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던 네 명의 친구들에게서 ‘우리는 앞으로 널 만나고 싶지 않아, 말도 하기 싫어.’라는 절교 선언을 받았다. 단호하게 가차 없는 통고를 받아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 그 또한 묻지 않았다.”

 

초반의 이 대목들로 이 소설은 미스테리 소설의 특징을 약간 도입한 셈입니다. 〈뭔가 있다〉하는 궁금증을 독자에게 주입시킵니다. 이 미스테리 소설의 기법, 하루키가 난처한 지점을 자연스럽게 벗어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조금 앞으로 돌아가면 ‘만드는 사람’ 쓰쿠루가 빠진 이 모임이 불편했던 것은 시로 뿐이 아니었습니다. 사단이 시로에게서 났다 뿐이지 모두가 이 모임을 깨고 싶었습니다. 나고야를 떠났지만 아직도 자기 자리를 모임 안에 굳게 차지하고 있는 쓰쿠루, 부재중이면서도 여전히 함께 하는 쓰쿠루, 그렇다고 명실 공히 함께하는 것도 아닌 이 엉거주춤한 모습, 모두가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인위적이어서 소설의 품격을 치명적으로 떨어트릴 수도 있는 이 막무가내 절교 선언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데 이 맥락도 한 몫 합니다.

 

막무가내 절교 선언의 내막에 독자들이 조급해 하도록 하루키는 하이다, 하이다의 아버지 그리고 신비로움으로 포장한 녹색 인간 미도리카와를 등장시킵니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독자들의 그 조급증이 절정에 다다를 때쯤 사라가 등장하면서 그 절교선언의 내막은 그 뚜껑이 열립니다. 아오와 아카를 만나면서 내막의 배경은 설정되고 핀란드에 가 있는 구로를 만나 내막의 핵심은 어느 정도 드러납니다. 16년간이나 꼭꼭 숨어있던 내막이라기에는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게, 강간이나 교살이 갖는 음습한 구석은 전혀 없이 깔끔하게, 하루키가 좋아하듯 쿨하게 드러납니다.

 

다자키는 자기에게는 ‘나’라는 게 없기 때문에 항상 자신이 없었고 언제나 ‘텅 빈 그릇’같이 느껴왔다고 말하는데 색채가 아닌 이름 에리로 돌아간 구로는 말합니다.

 

“쓰쿠루, 넌 좀 더 자신감과 용기를 가져야 해. 생각해 봐. 내가 널 좋아했어. 한때는 나를 너한테 줘도 좋다고 생각했어. 네가 원한다면 뭐든 주려고 했어. 펄펄 끓는 피를 가진 여자애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했던 거야......혹시 네가 텅 빈 그릇이라 해도 그거면 충분하잖아. 만약에 그렇다 해도 넌 정말 멋진,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그릇이야.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 그런 건 사실 아무도 모르는 거야......네 말대로라면, 정말 아름다운 그릇이 되면 되잖아.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그 안에 뭔가를 넣고 싶어지는, 확실히 호감이 가는 그릇으로.”

 

스무 살 무렵 막무가내 절교선언으로 죽음을 생각했던 7개월을 지나면서 다자키가 성년이 되었다면 감춰진 내막, ‘잃어버린 세계‘를 찾으면서 다자키는 성인이 됩니다. 아마 사라와의 관계 설정(소설에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한 밤중 전화가 온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이 어떻게 되던 이제 성년의 순간에서 성장을 멈췄던 다자키는 자립한 한 성인이 될 것입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19〉장은 아직도 할 말을 다 못한 하루키가 설명조로 이야기를 쏟아내는 자리이고 아끼고 아끼던 마무리 말로 대미를 장식하는 자리입니다.

 

가야할 장소.

향해야 할 장소.

우연히 주어진 장소.

돌아가야 할 장소.

 

하루키는 이 ‘장소들’을 가지고 이 소설을 또 다시 ‘깔끔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장소들’에 대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독자들의 읽는 재미를 지나치게 떨어트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의 마무리는 원래 “쓰쿠루가 핀란드의 호숫가에서 [구로 아니] 에리와 헤어질 때 했어야 할 말, 그러나 그때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고 화자/하루키는 말하고 있으나 사실은 하루키가 이 소설의 마지막으로 아껴두었던 말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소설 속에는 내가 이 북 리뷰의 제목으로 사용한 〈기억을 감출 수는 있어도 역사를 바꿀 수는 없어〉, 이 말은 사라가 소설의 전반부에서 쓰쿠루에게 한 말로 쓰쿠루는 이 말을 아카, 구로에게 말함으로써 소설 안에 세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하루키는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역사적 사실은 하나이고 변함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맞는 말이기 때문에 우리 개인들의 삶은 더 문제적일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하나인데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이나 내용은 사람 따라 다 제 각각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에 영향을 받고 축복을 받고 상처를 입는 게 아니라 자기의 기억에 따라 영향을 받고 축복을 받고 상처를 입습니다. 사람들 각자에게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자기의 기억 내용이 더 진실에 가깝습니다. 성숙의 수준이 기억 내용을 넘어 역사적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경우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어쨌든 기억 내용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더 깊은 천착이 있어야 합니다. 과연 이 소설이 그 부분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흔쾌하지가 않습니다.

 

통찰력, 투시력을 지닌 사람들, 눈이 밝고 맑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너절하고 음습하고 참혹한, 쓰레기더미 같은 전 세계적 현실을 개탄합니다. 〈공공성〉이 문학의 본질 가운데 하나일 터, 신간이 나올 때마다 전 세계적 주목을 받는 하루키가 어째서 이런 현실에 눈 감고 새로울 것 없는 성장소설, 사소설을 반복하고 있는지 안타깝습니다. 하루키의 글 솜씨라면 어떤 장르의 소설에라도 이 전 세계적 현실의 실체를 자연스럽게 녹여 넣어 독자로 하여금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할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더 안타깝습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나이 들면 감각sensibility은 떨어지고 감상sentimentality만 는다고. 나이 들면서 정말로 경계해야 할 일인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번 소설도 그런 우려는 충분히 불식시키고 있습니다. 실험적이지도 않고 세상의 참혹한 실체를 들여다 볼 기회도 만들어 주지 않은 소설이지만 읽고 나서 별 후회를 하지 않는 것은 60대 중반이면서도 늙지 않은 그의 차기 소설에 대한 여전한 기대감 때문일 것입니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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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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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과 리라 - 북 리뷰

 

좋은 글, 읽을 만한 글에 목마른 분들께 강추합니다

 

황현산 - 밤이 선생이다(난다, 2013)

 

 

 

 

문학평론가 황현산 명예교수(고려대 불어불문학과)가 산문집을 냈습니다. 2009년부터 작년까지 4년간 〈한겨레〉의 〈삶의 창〉에 실었던 글이 태반을 이루고 2000년대 초에 〈국민일보〉에, 지난 세기인 1980년대 중반 〈강원일보〉에 실었던 칼럼이 나머지입니다. 3부로 돼 있는 이 책의 〈제2부〉는 이 책을 위해 쓰인 글일 텐데 사진작가 구본창과 강운구의 사진 다섯 작품을 놓고 작품에 대한 별다른 정보 없이 기억의 세계에서 끌어온 삽화들과 연결시켜 상상의 세계에서 맛있게 버무려 빚은 다섯 편의 산문으로 돼 있습니다.

 

황현산 교수의 이 산문집을 읽으며 남다른 상념에 빠질 수밖에 없기에 오늘은 호칭을 현산 형으로 하겠습니다.

 

내가 형을 처음 만난 게 대학에 들어가는 1969년이니(형은 65학번입니다) 올해로 44년째입니다. 한 독서서클에 입회했는데 현산 형과 65학번 동기들이 만든 서클이라는 것은 들어가서야 알았습니다. 형이 번역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무대에 올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나는 희미하지만, 맨날 술만 마시고 돌아다니는 나를 억지로 붙들어다 형이 군 입대하기 전 잠깐 근무했던 어학교육원에 앉혀놓고 불어를 가르쳐주던 일은 생생합니다. 어찌된 셈인지 프랑스어 쌩 초보 1학년에게 형이 텍스트로 쓴 게 카뮈의 《페스트》였는데 그 때 형이 준 갈리마르판 《페스트》는 평생의 기념물로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밤이 선생이다》에 실린 글들은 미발표작들인 〈제2부〉(이 부분은 따로 한번 다룰 생각입니다)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기왕에 읽은 글인데 다시 읽어도 시간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존경받고 사랑받아야 할 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그리워했다. 이 그리움 속에서 나는 나를 길러준 이 강산을 사랑하였다. 도시와 마을을 사랑하였고 밤하늘과 골목길을 사랑하였으며, 모든 생명이 어우러져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었다. 천 년 전에도, 수수만년 전에도, 사람들이 어두운 밤마다 꾸고 있었을 이 꿈을 아직도 우리가 안타깝게 꾸고 있다.”

 

〈책을 펴내며〉의 이 글에서 말하는 ‘그리움’과 ‘사랑’과 ‘꿈’은 현산 형에게 글을 쓰게 만드는 바탕이며 원동력입니다. 신기하게도 이 바탕과 원동력에는 평생 변화가 없습니다.

 

불문과 출신들이 쓰는 글은 묘한 공통점이 있어, 글 시작을 대부분 자기 또는 주변에서 일어난 일, 사소하지만 구체적인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시작해,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렇겠다 싶었습니다. 이번에 형의 산문집을 통째로 읽으니 그런 글쓰기의 전형이 바로 현산 형이었구나 새삼 깨달았습니다. 형의 글이 거대담론이나 어떤 이데올로기, 정언명령으로 시작하는 일은 없습니다. 형은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사정을 말한다는 것이다”(〈당신의 사소한 사정〉)고 말할 정도입니다. 좋은 글들은 대부분 구체적인 것을 이야기하면서 독자가 추상적 명제를 만들도록 하지 추상을 이야기하면서 독자가 구체적인 사실들을 늘어놓도록 하지 않습니다.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이 있은 후 두 달이 지난 그해 5월말 〈중앙일보〉에는 그 신문사 논설위원이며 정치전문기자가 쓴 〈국민이 3일만 참아주면〉이 실렸고 며칠 후 〈한겨레〉에는 현산 형이 쓴 〈나는 전쟁이 무섭다〉가 실렸습니다. 그때 나는 〈인문학 고전 읽기와 쓰기〉 교양 강의시간에 이 두 글을 학생들에게 읽게 했는데 학생들의 반응은 일방적이었습니다. 이번에 다시 두 글을 함께 읽었는데 당시 학생들의 반응이 틀리지 않았으며 그 까닭이 내용뿐 아니라 글쓰기 방식에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경직된 글과 유연한 글, 추상과 구체의 차이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엔 막강한 민간인 부대가 있다. 강릉 앞바다 잠수함을 신고하고 속초 앞바다 잠수정을 그물로 잡고 천안함 함미를 발견하고 어뢰 파편을 건져 올린 이가 모두 민간인이다. 국민이 단결하면 생화학이나 특수부대에 대처할 수 있다......전쟁을 결심할 수 있어야 전쟁을 피할 수 있다. 국가의 능력을 알면 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김진, 〈국민이 3일만 참아주면〉)

 

“전쟁은 단순한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포탄이며, 구덩이에 파묻히는 시체 더미이며, 파괴되는 보금자리이며, 생사를 모른 채 흩어지는 가족이다. 이 오월에 강변에서 자전거를 타는 소년들은 어느 골목을 헤맬까. 지금 축제를 벌이는 젊은이들의 소식은 어느 골짜기에서 듣게 될까. 공부하고 일하고 춤추는 아이들은 어디로 갈까. 그들이 훈장을 뽐내며 돌아온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젊은 날의 꿈이 사라진 자리에는 마음의 상처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을 볼 것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민족의 절망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능력을 멸시하고, 우리가 이 민족이었던 것을 저주할 것이다.”(황현산, 〈나는 전쟁이 무섭다〉)

 

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지를 이만큼 구체적이며 서정적으로, 슬프고 아프게 그리고 아름답게 표현한 글을 본 적이 있으신지요.

 

이 책에 실린 글들, 형의 글들의 독창성을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며칠 고심했는데 결국에는 형이 한 말로 형의 글을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나의 편향에 관해 말한다면, 나는 순결한 언어들을 좋아했다. 내가 순결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부합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혼신의 힘을 모둔 결단의 말들과 함께 오랫동안 신중하게 주저하는 말들을 좋아했다. 나는 비명과 탄성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이 배어나오는 말들이나 그것들을 힘주어 누르고 있는 말들을 좋아했다. 나는 말이 거칠다고 해서 비난하지 않았다. 한 정신이 비범한 평정상태에 이르러 그 지경을 모방하여 얻어낸 유려한 말들에 나는 종종 귀를 기울였지만 그보다는 그 상태를 증명해주는 다급한 말들의 진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장난치는 말들, 판을 깨는 말들도 좋아했다. 하던 일을 진중하게 계속하는 사람은 늘 찬양을 받아야 하지만 때로는 손에 쥔 것을 털어버리고 일어나 기약 없는 땅에 한 걸음을 내딛는 것도 용기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땀내가 나는 말들을 가장 좋아했다. 그 말들은 어김없이 순결하다.”(《말과 시간의 깊이》의 〈책머리에〉)

 

이 책의 제목 《밤이 선생이다》, 형의 이메일이나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오래 전부터 ‘밤이 선생이다’가 올라있습니다. 워낙 한밤중에 일하는 형인지라 그러려니 했는데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습니다.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낮에 잃은 것을 밤에 되찾는다〉)

 

이성을 불신하고 상상력을 따르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형이 몇 줄 뒤에서 지적했지만 “문제는 이성을 빙자하여 말과 이론과 법을 독점하고 있는 사회와 제도의 횡포에 있”습니다. “낮에 잃은 것을 밤에 찾기란 결국 그 횡포의 희생자들을 복권하는 일이며 ‘어둠의 입’이 해줄 수 있는 말이란 현실에서 통용되는 말의 권력을 넘어선 역사의 말이자 미래의 말”입니다.

 

이 책의 제사는 ‘천 년 전부터 당신에게......’입니다. 속지 뿐 아니라 잘 디자인 된 표지 왼쪽 하단에도 눈 밝은 사람들에게나 띌까, 8포인트 정도의 작은 글자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아마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더 쉽게 말해 형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올곧은 것들을 정확하고 예리하지만 따뜻한 글로 전하고 싶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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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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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리뷰]

아니 에르노, 《남자의 자리》,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2012

아니 에르노, 《한 여자》, 정혜용 옮김, 열린책들, 2012

 

얼마 전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목수정 작가가 아니 에르노(Annie Ernaux1940- )의 자전적 작품들을 묶은 《삶을 쓰다Ecrire la vie》(Gallimard, 2011)를 소개하면서 까칠한 멘트를 날린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끼오스끄(가두판매대)에서 더 많이 팔리는 작가들이 우리나라에서는 버젓이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들로 행세하고 있다고. 베르나르 베르나르와 아멜리 노통(브) 등을 일컫는 말입니다. 목수정 작가는 아니 에르노가 프랑스 현대 작가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작가의 하나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작품들이 번역됐으면서도 의외로 알려지지는 않은 작가라는 지적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와《한 여자》가 한꺼번에 다시 번역돼 나온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닙니다. 이 두 권은 1988년 한 권으로 묶여 나온 적이 있습니다.《아버지의 자리》(《어떤 여인》동시 수록, 홍상희 역, 책세상, 1988)라는 이름으로. 1995년까지 7년 동안 여섯 번 재판을 찍었는데 상대적으로 고급 독자들, 작가들에게 많이 읽혔습니다. 2000년대 들어 절판돼 학생들에게 읽히고 싶어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아니 에르노는 노르망디의 소도시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서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내 자식만은 공부를 시켜 반듯한 직업을 가지고 보란 듯 삶을 살게 하겠다는 부모의 바람에 따라 딸은 대학을 갑니다. 고등학교 선생을 하면서 대학 출신의 남편을 얻습니다. 중산층 사회로 편입된 것입니다. 이제 딸은 부모가, 부모가 속해 있는 사회계층이 불편합니다. 그들의 거칠고 상스러운 말투도 역겹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엄마, 아버지 이야기는 개인적인 이야기, 집안 이야기에 머무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못된 아버지인지 알았는데 실은 아니더라,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나름의 아픔과 상처가 있었더라, 어머니 이야기도 마찬가지. 출산/생의 비밀, 기막힌 불화의 원인, 그리고 화해.

 

《남자의 자리》와《한 여자》, 두 작품 모두 부모가 돌아가신 뒤 과거로 돌아가 불화하던 아버지 어머니와의 관계를 다룬 소설입니다. 그러나 이 두 소설은 모두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인 차원으로 승화합니다.

개인들의 온갖 사정들, 천박하든 우아하든, 행복하든 불행하든, 아늑하든 으스스하든 인간들의 문제는 개인적인 까닭에서만 연유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까닭에서도 반쯤은 연유하는 것이라는 점을 에르노의 작품들은 깨닫게 해줍니다.

 

에르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찌든 삶〉속으로 들어갑니다.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인데, 왜 그들이 어색한지, 그들과의 관계가 왜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지 알아보려고. 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삶, 그들이 사용하는 불편한 말투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막상 들어가 보니 그 속에는 어머니 아버지만 있는 게 아니라 나도 있습니다. 지금의 내 중산층 삶의 원천이 바로 그〈찌든 삶〉입니다. 내 세련된 말투의 뿌리가 실은 그 거칠고 상스러운 말투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나는,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그 때의 삶을 배반한 게 아니라 그 당시의 삶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의〈찌든 삶〉을 지금의 삶에 영입시킨 것입니다.

 

《한 여자》의 마지막 대목.

 

“이것은 전기도, 물론 소설도 아니다. 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리라. 어머니의 열망대로 내가 자리를 옮겨 온 이곳, 말과 관념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스스로릐 외로움과 부자연스러움을 덜 느끼자면, 지배당하는 계층에서 태어났고 그 계층에서 탈출하기를 원했던 나의 어머니가 역사가 되어야 했다.

 

앞으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 줬던 것은 바로 어머니, 그녀의 말, 그녀의 손, 그녀의 몸짓, 그녀만의 웃는 방식, 걷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잃어버렸다.”(110면)

 

덧붙이는 글 : 신경숙의《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를 읽은 분들께서는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의 <북 리뷰>에도 올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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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 하루

포루그 파로흐자드 - 입맞춤

 

 

입맞춤

 

그의 두 눈에서 죄악이 미소 짓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달빛이 빛나고 있었다

말 없는 그의 입술 위에서

사랑의 불꽃이 숨김없이 웃고 있었다

 

부끄러움에 욕망을 드러내지 못한 채

취기 어린 두 눈으로

나는 그의 두 눈을 보고 있었다

그가 내게 말한다

“사랑에는 결실이 있어야 하는 법”

 

신비로움으로 가득 찬 밤의 모처某處에서

한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를 껴안았다

한 사람의 숨결이 상대의 뺨으로 스며들었다

두 입술 사이에 뜨거운 입맞춤이 이뤄졌다

 

(포루그 파로흐자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신양섭 옮김, 문학의숲, 2012, 99면. 번역은 수정)

 

“이 시는 열여섯에 결혼해 아이를 낳고 열아홉에 이혼한 이란의 요절한 시인, 포루그 파로흐자드(1935-1967)가 1955년, 스무 살에 발표한 시 입니다. 우선 에로틱한 시로 읽어봅니다.

불륜이 끝까지 가는 어느 날 밤의 현장을 묘사한 이 시의 묘미는 마지막 연에 있습니다. 1연, 여자를 유혹하는 남자의 모습이 느끼하기까지 합니다. 2연, 유혹 앞에서 여자는 수동적입니다. 자기감정에 충실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한 여자를 남자는 계속 감언이설로 꼬입니다. ‘사랑에는 결실이 있어야 하는 법’. 3연에서는 그 관계가 모호해집니다. 1-2연에서는 동사의 주체가 누구인지 분명한데 3연에서는 한 그림자와 다른 그림자 중, 한 사람의 숨결과 상대의 뺨 중, 어느 게 남자 것이고 어느 게 여자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반전이 일어난 게 아닐까, 추측할 뿐입니다.”

 

[더 읽기]

 

 1951년, 열여섯 살의 파로흐자드는 열다섯 살 연상인 먼 친척 풍자만화가셔푸르와 결혼하고 셔푸르의 직장이 있는 소도시 아흐버즈로 갑니다. 1950년대 이, 서구화 정책이 시행되고 있던 시절이지만 이는 대도시에서만 통하는 일, 테헤란을 떠나 그녀가 살림을 차린 소도시 아흐버즈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히잡을 안 쓰고 짧은 치마를 입으며 파마를 하고 짙은 화장을 하는 일은 세간의 주목을 받는 일을 넘어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결혼 1년 후에는 아들 컴여르를 낳았습니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남편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은 것도 아닌데 결혼 3년 후 그들은 이혼합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넓은 세계를 날고 싶은’ 파로흐자드는 동시에 ‘상처투성이 영혼’이 됩니다.

 

32년의 삶 가운데 시인으로서의 삶은 1955년에서 1967년까지 12년이었습니다. 그동안 파로흐자드는 128편의 시를 썼고 이를 다섯 권의 시집으로 엮었습니다(한권은 유고시집).

 

앞에 소개한 시 〈입맞춤〉은 첫 번째 시집 《포로》(1955)에 있는 시입니다. 1950년대 중반의 이란, 결혼을 해 애를 낳고 벌써 이혼을 한, 짙은 화장에 파마머리의 스무 살짜리 여자 시인, 이것만 해도 예사롭지 않은데 불륜현장을 묘사한 시를 쓰다니 심상치 않습니다. 남자의 유혹 - 주저하는 여자 - 뜨거운 성애 장면, 충분히 에로틱한 시이지만 이 시의 진수는 그 너머에 있습니다. 성적 관계는 대체적으로 주종관계를 보입니다. 이 시의 경우에도 1, 2연에서는 주도적인 역할이 남자의 몫입니다. 3연에서는 달라집니다.

 

신비로움으로 가득 찬 밤의 모처某處에서

한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를 껴안았다

한 사람의 숨결이 상대의 뺨으로 스며들었다

두 입술 사이에 뜨거운 입맞춤이 이뤄졌다

 

‘한 그림자’와 ‘다른 그림자’, ‘한 사람의 숨결’과 ‘상대의 뺨’, ‘두 입술’, 어느 게 남자의 것이고 어느 게 여자의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파로흐자드는 아마도 평등한 남녀관계라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이 시의 3연에서는 그 모호성으로 오히려 남녀 주종관계가 역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하게 됩니다.

2연의 마지막 “사랑에는 결실이 있어야 하는 법”, 남자가 〈꼬임의 절정〉으로 한 말이고 그 성적 암시가 충분한 말이지만 한 편으로는 시인이 읽는 이들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자문하는 기회를 주려고 인용한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쾌락 가득한 죄

격렬하고 뜨거운 껴안음 속에서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두 팔에 안겨서

뜨겁고 무쇠이고 복수하는 두 팔에

 

저 어둡고 조용한 모처에서

나는 비밀에 가득한 그의 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필요한 걸 요구하는 그의 눈에 답하기 위해

내 가슴 속 심장은 조급하게 흔들렸습니다

 

저 어둡고 조용한 모처에서

나는 그의 곁에 흐트러지듯 주저앉았습니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격정을 쏟아 부었으며

나는 미친 내 마음의 슬픔에서 벗어났습니다

 

나는 그의 귀에 사랑이야기를 속삭였습니다

나는 그대를 원해 오, 내 생명이여

나는 그대를 원해 오, 생명을 주는 포옹이여

오, 사랑에 홀딱 빠진 내 연인이여, 그대

 

욕정으로 그의 두 눈에 불꽃이 타올랐습니다

붉은 포도주가 술잔 안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부드러운 침대 위 내 몸은

술에 취해 그의 배 위에서 요동쳤습니다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쾌락 가득한 죄

황홀감에 빠져 흔들어주는 몸 곁에서

신이여, 저 어둡고 조용한 모처에서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포루그 파로흐자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신양섭 옮김, 문학의숲, 2012, 104-105면. 번역은 수정)

 

 

〈죄〉는 두 번째 시집 《벽》(1956)에 있는 시입니다.〈죄〉는 〈입맞춤〉처럼 에로틱한 시인데 더 노골적이며 더 구체적입니다. “쾌락 가득한 죄”를 지었다고 말하며 시의 제목도 ‘죄’이지만 화자/시인이 정말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쾌락 가득한 죄

황홀감에 빠져 흔들어주는 몸 곁에서

신이여, 저 어둡고 조용한 모처에서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은밀한 장소에서 내가 무엇을 했는지 누가 알겠냐는 시의 마지막에 이르면 죄를 뉘우치는 일과는 거리가 한참 먼 시입니다. 완고하기 그지없는 가부장제 이란 사회, 종족유지가 아니면 성문제는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사회에서 단지 죄를 짓는 일일 뿐인 성적 쾌락을 시로 읊는 일은 전략적인 일이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말할 때면 으레 정치적 자유를 말하지만 파로흐자드는 간파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성적 자유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공개적인 성담론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도. 성, 성적 쾌락, 껴안음, 사랑에 빠짐, 황홀함, 욕정 같은 표현들이 시어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욕정으로 그의 두 눈에 불꽃이 타올랐습니다

붉은 포도주가 술잔 안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부드러운 침대 위 내 몸은

술에 취해 그의 배 위에서 요동쳤습니다

 

노골적인 성애장면을 묘사한 이런 시들을 폭 넓게 아름다운 시로 받아들일 때 그 사회는 이미 인간의 자유에서 한 단계 상승한 사회일 것입니다.

 

들키지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인간적인 행위들이 들키면 가차 없는 단죄를 받아야 하는 일들로 추락하는 경우가 가장 많은 게 아마 성과 관계된 일들일 것입니다. 스스로는 성적 자유를 구가하는 것인데 방탕한 짓거리를 하고 다닌다고 비난 받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파로흐자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정도에 머물러 있는 사회에서 인간의 자유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성애장면을 시적 언어로 승화시켜, 에로틱하면서도 끈적거리지 않게, 자유로우면서도 당당하게 형상화한 시이며, 성적 자유가 인간의 자유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사회성이 강한 시입니다.

 

〈포로〉는 첫 번째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합니다.

 

포로

 

그대를 열망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결코 그대를 흡족하게 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대는 맑게 갠 빛나는 하늘이지만

나는 새장 구석에 갇힌 한 마리 새라는 것을

 

춥고 어두운 철창 뒤에서

놀라 애처로운 내 시선이 그대를 쫓는다

나 생각 중이다 그대가 한 손을 내밀어 줄지도 모르고

내 날개를 펼쳐 그대에게 다가갈 수도 있으리라고

 

나 생각 중이다 감시가 소홀한 틈에

이 침묵의 감옥으로부터 날아올라

간수 노릇하는 사람 생각하며 웃으며

그대 곁에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고

 

나 이런 생각 중이다 이미 다 알고 있다고

결코 이 감옥에서 나갈 힘이 없다는 것을

설령 간수가 그것을 원한다 해도

나를 날게 할 숨결과 바람이 내게 없다는 것을

 

어김없이 찾아오는 눈부신 아침

철창 뒤의 한 아기가 나를 보며 미소 짓는다

내가 환희의 노래를 흥얼거리면

아기는 입맞춤으로 내 온 존재를 껴안는다

 

하늘이여 어느 날 내가

이 침묵의 감옥으로부터 날아가길 원할 때면

우는 아기의 눈을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를 잊어라, 나는 포로가 된 한 마리 새일 뿐이라 할까?

 

나는 포로인 새의 심장의 불로

이 폐허를 밝히는 촛불

침묵 속의 어둠을 선택하려 마음을 먹는다면

나 이 둥지를 폐허로 변하게 할 수 있으리라

(포루그 파로흐자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신양섭 옮김, 문학의숲, 2012, 13-14면. 번역은 수정)

 

이 시가 쓰일 당시의 파로흐자드의 사정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입니다. 포로인 새는 시인 자신이고 시인을 포로로 잡고 있는 ‘그대’는 시인의 남편입니다. 그러나 남편인 ‘그대’가 나를 포로로 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를 열망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결코 그대를 흡족하게 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대는 맑게 갠 빛나는 하늘이지만

나는 새장 구석에 갇힌 한 마리 새라는 것을

 

포로인 내가 ‘그대’를 안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흡족하지 않을 뿐입니다) 내가 그대를 싫어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는 맑게 갠 빛나는 하늘인데 나는 새장 속에 갇힌 한 마리 새에 불과한 것은, 그렇다면 그들 사이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문제 때문입니다. ‘사회’라는 개념이 나타나는 지점입니다. 내가 맞서고 있는 것은 ‘개인’으로서의 다른 인간이 아닙니다. ‘내’가 맞서는 것은 ‘사회’입니다. 이 시의 주제는 사회와 맞서는 한 개인의 〈무력감〉입니다. 사회와의 관계에서의 〈무력감〉은 한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 무력감은 내가 아이 앞에서 맛보는 ‘환희’로서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존재감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포로인 새의 심장의 불로

이 폐허를 밝히는 촛불

침묵 속의 어둠을 선택하려 마음을 먹는다면

나 이 둥지를 폐허로 변하게 할 수 있으리라

 

 

“새의 심장의 불” 정도로 내 촛불은 별 게 아니지만 그래도 이 둥지를 밝혀주는 게 바로 그 촛불입니다. 이 촛불마저 포기한다면 내 삶의 터전은 이내 폐허로 변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내 삶의 존재이유입니다. 어쩔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힌 포로이지만 ‘나’는 내 둥지를 지켜냅니다. 스무 한살의 시인은 사회의식에 눈 뜹니다.

그의 시들을 읽다보면 사랑이면 사랑, 불륜이면 불륜, 욕망이면 욕망, 사회의식이면 사회의식, 모든 면에서 그 성숙의 속도에는 놀랍기만 합니다. 또한 시 언어를 고르고 그것을 구성해내는 현대적인 감각에도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번에 계속합니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의 <시를 읽는 하루>에도 올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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