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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기억을 감출 수는 있어도 역사를 바꿀 수는 없어”
프란츠 리스트의 〈르 말 뒤 뻬Le mal du pays, 향수병〉를 들으며 하루키가 상상력을 동원해 소설을 만들었구나, 이 소설을 읽고 난 직후의 소감입니다. 느낌은 음악처럼 슬프고 소설처럼 쿨하고 산뜻합니다.

아무런 색채가 없는, 당연히 개성이 없는, 이성적異性的으로는 물론 이성적理性的으로도 누군가의 관심을 끌 리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 그러나 친구들에게는 “냉정하면서도 언제나 쿨하게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는” 곁에 있건 없건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이 사실을 다자키가 알게 되는 것은 네 명의 친구와 헤어진 지 16년이 지난 삼십대의 한 복판에서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배타적인 절친 이너 써클의 친구들, 아카(빨강), 아오(파랑), 시로(하양), 구로(까망)와는 달리 주인공 다자키의 이름에는 색깔을 가리키는 글자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교묘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하루키는 그의 이름에도 장치를 합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이지만 그가 주인공일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야 했겠지요, 다자키의 이름에는 다른 의미의 글자를 넣었습니다. ‘쓰쿠루’입니다. 〈作만들다〉, 색채가 없는 대신 다자키는 ‘만드는 사람’입니다. 하루키가 줄곧 고딕체로 강조하며 쓰는 낱말의 하나처럼 〈정말로〉다자키는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 또한 16년이 지나서 확인한 일이지만 색채가 없는, 무덤덤한, 스스로 생각해도 있으나마나한 존재 같았던 다자키, 아니 쓰쿠르, 실은 그가 5명의 절친 그룹을 지탱할 수 있게 한 중심이었고 보호막이었습니다.
〈4色 + 1作〉.
네 가지 색을 가지고 고등학교 시절의 빛나는 모임/추억을 빚어낸 사람이 바로 ‘만드는 사람’ 쓰쿠루였던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 나고야를 떠난 사람은 럭비선수 출신의 씩씩한 아오도, 수재형 똘똘이 아카도, 수의사 지망생이지만 날카로운 메스를 들고 개의 배를 가르고 말의 항문에 손을 집어넣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을, 감성적이고 지나치게 민감한 시로도, 자립심 강하고 터프한 성격에 말이 빠르고 머리회전도 그만큼 빠른 구로도 아니었습니다. 도쿄로 떠난 사람은 바로 쓰쿠루였습니다.
‘만드는 사람’ 쓰쿠루가 빠진 이 절친 모임은, 나고야에 남은 네 가지 색채의 사람 누구도 내놓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균형추가 빠진 기계처럼 삐걱거린다는 것을 느낌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색채는 빛나면 되는 것이지 조절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니 쓰쿠루가 빠진 결과는 뻔한 것이었겠지요. 삐걱거리는 이 모임을 가장 견디기 어려운 사람은 민감한 시로였을 것이고 사달이 나는 것이 거기였을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전후 사정은 끝까지 알려지지 않지만 시로는 실제 누군가에게 강간을 당하고 임신을 하고 유산을 합니다, 그리고 서른 살에 교살 당합니다. 시로는 자기를 강간한 사람으로 쓰쿠루를 지목합니다. 절친 그룹의 아카, 아오, 구로 누구 하나 이것을 믿지 않지만 시로가 원한다는 핑계로 쓰쿠루를 그룹에서 제명합니다. 이제 쓰쿠루는 사라지고 남은 것은 다자키입니다. 세 명 가운데 아무도 다자키에게 제명시키는 까닭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이 소설의 전개에서 난처한 하나의 지점이기도 한데 전후 사정을 밝힌다면 소설은 더 이상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것이고 까닭을 말하지 않고 그냥 제명한다고 통보하는 것으로 그치는 일은 그간의 그들 사이의 관계에 미뤄볼 때 지나치게 인위적입니다. 이 난처한 지점에서 하루키는 후자를 택하면서도 인위적 인상을 씻어내는데 이 지점은 우리가 뛰어난 소설가로서의 하루키의 자질을 확인하는 지점이 되기도 합니다.
소설은 대학교 2학년 후반기, 고등학교 시절의 절친 그룹으로부터 절교 선언을 받고 약 반년 간을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다자키 쓰쿠루가 그렇게나 강렬하게 죽음에 이끌렸던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명백하다. 어느 날 그는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던 네 명의 친구들에게서 ‘우리는 앞으로 널 만나고 싶지 않아, 말도 하기 싫어.’라는 절교 선언을 받았다. 단호하게 가차 없는 통고를 받아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 그 또한 묻지 않았다.”
초반의 이 대목들로 이 소설은 미스테리 소설의 특징을 약간 도입한 셈입니다. 〈뭔가 있다〉하는 궁금증을 독자에게 주입시킵니다. 이 미스테리 소설의 기법, 하루키가 난처한 지점을 자연스럽게 벗어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조금 앞으로 돌아가면 ‘만드는 사람’ 쓰쿠루가 빠진 이 모임이 불편했던 것은 시로 뿐이 아니었습니다. 사단이 시로에게서 났다 뿐이지 모두가 이 모임을 깨고 싶었습니다. 나고야를 떠났지만 아직도 자기 자리를 모임 안에 굳게 차지하고 있는 쓰쿠루, 부재중이면서도 여전히 함께 하는 쓰쿠루, 그렇다고 명실 공히 함께하는 것도 아닌 이 엉거주춤한 모습, 모두가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인위적이어서 소설의 품격을 치명적으로 떨어트릴 수도 있는 이 막무가내 절교 선언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데 이 맥락도 한 몫 합니다.
막무가내 절교 선언의 내막에 독자들이 조급해 하도록 하루키는 하이다, 하이다의 아버지 그리고 신비로움으로 포장한 녹색 인간 미도리카와를 등장시킵니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독자들의 그 조급증이 절정에 다다를 때쯤 사라가 등장하면서 그 절교선언의 내막은 그 뚜껑이 열립니다. 아오와 아카를 만나면서 내막의 배경은 설정되고 핀란드에 가 있는 구로를 만나 내막의 핵심은 어느 정도 드러납니다. 16년간이나 꼭꼭 숨어있던 내막이라기에는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게, 강간이나 교살이 갖는 음습한 구석은 전혀 없이 깔끔하게, 하루키가 좋아하듯 쿨하게 드러납니다.
다자키는 자기에게는 ‘나’라는 게 없기 때문에 항상 자신이 없었고 언제나 ‘텅 빈 그릇’같이 느껴왔다고 말하는데 색채가 아닌 이름 에리로 돌아간 구로는 말합니다.
“쓰쿠루, 넌 좀 더 자신감과 용기를 가져야 해. 생각해 봐. 내가 널 좋아했어. 한때는 나를 너한테 줘도 좋다고 생각했어. 네가 원한다면 뭐든 주려고 했어. 펄펄 끓는 피를 가진 여자애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했던 거야......혹시 네가 텅 빈 그릇이라 해도 그거면 충분하잖아. 만약에 그렇다 해도 넌 정말 멋진,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그릇이야.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 그런 건 사실 아무도 모르는 거야......네 말대로라면, 정말 아름다운 그릇이 되면 되잖아.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그 안에 뭔가를 넣고 싶어지는, 확실히 호감이 가는 그릇으로.”
스무 살 무렵 막무가내 절교선언으로 죽음을 생각했던 7개월을 지나면서 다자키가 성년이 되었다면 감춰진 내막, ‘잃어버린 세계‘를 찾으면서 다자키는 성인이 됩니다. 아마 사라와의 관계 설정(소설에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한 밤중 전화가 온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이 어떻게 되던 이제 성년의 순간에서 성장을 멈췄던 다자키는 자립한 한 성인이 될 것입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19〉장은 아직도 할 말을 다 못한 하루키가 설명조로 이야기를 쏟아내는 자리이고 아끼고 아끼던 마무리 말로 대미를 장식하는 자리입니다.
가야할 장소.
향해야 할 장소.
우연히 주어진 장소.
돌아가야 할 장소.
하루키는 이 ‘장소들’을 가지고 이 소설을 또 다시 ‘깔끔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장소들’에 대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독자들의 읽는 재미를 지나치게 떨어트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의 마무리는 원래 “쓰쿠루가 핀란드의 호숫가에서 [구로 아니] 에리와 헤어질 때 했어야 할 말, 그러나 그때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고 화자/하루키는 말하고 있으나 사실은 하루키가 이 소설의 마지막으로 아껴두었던 말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소설 속에는 내가 이 북 리뷰의 제목으로 사용한 〈기억을 감출 수는 있어도 역사를 바꿀 수는 없어〉, 이 말은 사라가 소설의 전반부에서 쓰쿠루에게 한 말로 쓰쿠루는 이 말을 아카, 구로에게 말함으로써 소설 안에 세 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하루키는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역사적 사실은 하나이고 변함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맞는 말이기 때문에 우리 개인들의 삶은 더 문제적일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하나인데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이나 내용은 사람 따라 다 제 각각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에 영향을 받고 축복을 받고 상처를 입는 게 아니라 자기의 기억에 따라 영향을 받고 축복을 받고 상처를 입습니다. 사람들 각자에게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자기의 기억 내용이 더 진실에 가깝습니다. 성숙의 수준이 기억 내용을 넘어 역사적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경우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어쨌든 기억 내용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더 깊은 천착이 있어야 합니다. 과연 이 소설이 그 부분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흔쾌하지가 않습니다.
통찰력, 투시력을 지닌 사람들, 눈이 밝고 맑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너절하고 음습하고 참혹한, 쓰레기더미 같은 전 세계적 현실을 개탄합니다. 〈공공성〉이 문학의 본질 가운데 하나일 터, 신간이 나올 때마다 전 세계적 주목을 받는 하루키가 어째서 이런 현실에 눈 감고 새로울 것 없는 성장소설, 사소설을 반복하고 있는지 안타깝습니다. 하루키의 글 솜씨라면 어떤 장르의 소설에라도 이 전 세계적 현실의 실체를 자연스럽게 녹여 넣어 독자로 하여금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할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더 안타깝습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나이 들면 감각sensibility은 떨어지고 감상sentimentality만 는다고. 나이 들면서 정말로 경계해야 할 일인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번 소설도 그런 우려는 충분히 불식시키고 있습니다. 실험적이지도 않고 세상의 참혹한 실체를 들여다 볼 기회도 만들어 주지 않은 소설이지만 읽고 나서 별 후회를 하지 않는 것은 60대 중반이면서도 늙지 않은 그의 차기 소설에 대한 여전한 기대감 때문일 것입니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