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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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과 리라 - 북 리뷰

 

좋은 글, 읽을 만한 글에 목마른 분들께 강추합니다

 

황현산 - 밤이 선생이다(난다, 2013)

 

 

 

 

문학평론가 황현산 명예교수(고려대 불어불문학과)가 산문집을 냈습니다. 2009년부터 작년까지 4년간 〈한겨레〉의 〈삶의 창〉에 실었던 글이 태반을 이루고 2000년대 초에 〈국민일보〉에, 지난 세기인 1980년대 중반 〈강원일보〉에 실었던 칼럼이 나머지입니다. 3부로 돼 있는 이 책의 〈제2부〉는 이 책을 위해 쓰인 글일 텐데 사진작가 구본창과 강운구의 사진 다섯 작품을 놓고 작품에 대한 별다른 정보 없이 기억의 세계에서 끌어온 삽화들과 연결시켜 상상의 세계에서 맛있게 버무려 빚은 다섯 편의 산문으로 돼 있습니다.

 

황현산 교수의 이 산문집을 읽으며 남다른 상념에 빠질 수밖에 없기에 오늘은 호칭을 현산 형으로 하겠습니다.

 

내가 형을 처음 만난 게 대학에 들어가는 1969년이니(형은 65학번입니다) 올해로 44년째입니다. 한 독서서클에 입회했는데 현산 형과 65학번 동기들이 만든 서클이라는 것은 들어가서야 알았습니다. 형이 번역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무대에 올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나는 희미하지만, 맨날 술만 마시고 돌아다니는 나를 억지로 붙들어다 형이 군 입대하기 전 잠깐 근무했던 어학교육원에 앉혀놓고 불어를 가르쳐주던 일은 생생합니다. 어찌된 셈인지 프랑스어 쌩 초보 1학년에게 형이 텍스트로 쓴 게 카뮈의 《페스트》였는데 그 때 형이 준 갈리마르판 《페스트》는 평생의 기념물로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밤이 선생이다》에 실린 글들은 미발표작들인 〈제2부〉(이 부분은 따로 한번 다룰 생각입니다)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기왕에 읽은 글인데 다시 읽어도 시간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존경받고 사랑받아야 할 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그리워했다. 이 그리움 속에서 나는 나를 길러준 이 강산을 사랑하였다. 도시와 마을을 사랑하였고 밤하늘과 골목길을 사랑하였으며, 모든 생명이 어우러져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었다. 천 년 전에도, 수수만년 전에도, 사람들이 어두운 밤마다 꾸고 있었을 이 꿈을 아직도 우리가 안타깝게 꾸고 있다.”

 

〈책을 펴내며〉의 이 글에서 말하는 ‘그리움’과 ‘사랑’과 ‘꿈’은 현산 형에게 글을 쓰게 만드는 바탕이며 원동력입니다. 신기하게도 이 바탕과 원동력에는 평생 변화가 없습니다.

 

불문과 출신들이 쓰는 글은 묘한 공통점이 있어, 글 시작을 대부분 자기 또는 주변에서 일어난 일, 사소하지만 구체적인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시작해,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렇겠다 싶었습니다. 이번에 형의 산문집을 통째로 읽으니 그런 글쓰기의 전형이 바로 현산 형이었구나 새삼 깨달았습니다. 형의 글이 거대담론이나 어떤 이데올로기, 정언명령으로 시작하는 일은 없습니다. 형은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사정을 말한다는 것이다”(〈당신의 사소한 사정〉)고 말할 정도입니다. 좋은 글들은 대부분 구체적인 것을 이야기하면서 독자가 추상적 명제를 만들도록 하지 추상을 이야기하면서 독자가 구체적인 사실들을 늘어놓도록 하지 않습니다.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이 있은 후 두 달이 지난 그해 5월말 〈중앙일보〉에는 그 신문사 논설위원이며 정치전문기자가 쓴 〈국민이 3일만 참아주면〉이 실렸고 며칠 후 〈한겨레〉에는 현산 형이 쓴 〈나는 전쟁이 무섭다〉가 실렸습니다. 그때 나는 〈인문학 고전 읽기와 쓰기〉 교양 강의시간에 이 두 글을 학생들에게 읽게 했는데 학생들의 반응은 일방적이었습니다. 이번에 다시 두 글을 함께 읽었는데 당시 학생들의 반응이 틀리지 않았으며 그 까닭이 내용뿐 아니라 글쓰기 방식에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경직된 글과 유연한 글, 추상과 구체의 차이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엔 막강한 민간인 부대가 있다. 강릉 앞바다 잠수함을 신고하고 속초 앞바다 잠수정을 그물로 잡고 천안함 함미를 발견하고 어뢰 파편을 건져 올린 이가 모두 민간인이다. 국민이 단결하면 생화학이나 특수부대에 대처할 수 있다......전쟁을 결심할 수 있어야 전쟁을 피할 수 있다. 국가의 능력을 알면 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김진, 〈국민이 3일만 참아주면〉)

 

“전쟁은 단순한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포탄이며, 구덩이에 파묻히는 시체 더미이며, 파괴되는 보금자리이며, 생사를 모른 채 흩어지는 가족이다. 이 오월에 강변에서 자전거를 타는 소년들은 어느 골목을 헤맬까. 지금 축제를 벌이는 젊은이들의 소식은 어느 골짜기에서 듣게 될까. 공부하고 일하고 춤추는 아이들은 어디로 갈까. 그들이 훈장을 뽐내며 돌아온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젊은 날의 꿈이 사라진 자리에는 마음의 상처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을 볼 것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민족의 절망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능력을 멸시하고, 우리가 이 민족이었던 것을 저주할 것이다.”(황현산, 〈나는 전쟁이 무섭다〉)

 

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지를 이만큼 구체적이며 서정적으로, 슬프고 아프게 그리고 아름답게 표현한 글을 본 적이 있으신지요.

 

이 책에 실린 글들, 형의 글들의 독창성을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며칠 고심했는데 결국에는 형이 한 말로 형의 글을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나의 편향에 관해 말한다면, 나는 순결한 언어들을 좋아했다. 내가 순결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부합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혼신의 힘을 모둔 결단의 말들과 함께 오랫동안 신중하게 주저하는 말들을 좋아했다. 나는 비명과 탄성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이 배어나오는 말들이나 그것들을 힘주어 누르고 있는 말들을 좋아했다. 나는 말이 거칠다고 해서 비난하지 않았다. 한 정신이 비범한 평정상태에 이르러 그 지경을 모방하여 얻어낸 유려한 말들에 나는 종종 귀를 기울였지만 그보다는 그 상태를 증명해주는 다급한 말들의 진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장난치는 말들, 판을 깨는 말들도 좋아했다. 하던 일을 진중하게 계속하는 사람은 늘 찬양을 받아야 하지만 때로는 손에 쥔 것을 털어버리고 일어나 기약 없는 땅에 한 걸음을 내딛는 것도 용기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땀내가 나는 말들을 가장 좋아했다. 그 말들은 어김없이 순결하다.”(《말과 시간의 깊이》의 〈책머리에〉)

 

이 책의 제목 《밤이 선생이다》, 형의 이메일이나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오래 전부터 ‘밤이 선생이다’가 올라있습니다. 워낙 한밤중에 일하는 형인지라 그러려니 했는데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습니다.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낮에 잃은 것을 밤에 되찾는다〉)

 

이성을 불신하고 상상력을 따르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형이 몇 줄 뒤에서 지적했지만 “문제는 이성을 빙자하여 말과 이론과 법을 독점하고 있는 사회와 제도의 횡포에 있”습니다. “낮에 잃은 것을 밤에 찾기란 결국 그 횡포의 희생자들을 복권하는 일이며 ‘어둠의 입’이 해줄 수 있는 말이란 현실에서 통용되는 말의 권력을 넘어선 역사의 말이자 미래의 말”입니다.

 

이 책의 제사는 ‘천 년 전부터 당신에게......’입니다. 속지 뿐 아니라 잘 디자인 된 표지 왼쪽 하단에도 눈 밝은 사람들에게나 띌까, 8포인트 정도의 작은 글자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아마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더 쉽게 말해 형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올곧은 것들을 정확하고 예리하지만 따뜻한 글로 전하고 싶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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