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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평점 :
[신간 리뷰]
아니 에르노, 《남자의 자리》,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2012
아니 에르노, 《한 여자》, 정혜용 옮김, 열린책들, 2012
얼마 전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목수정 작가가 아니 에르노(Annie Ernaux1940- )의 자전적 작품들을 묶은 《삶을 쓰다Ecrire la vie》(Gallimard, 2011)를 소개하면서 까칠한 멘트를 날린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끼오스끄(가두판매대)에서 더 많이 팔리는 작가들이 우리나라에서는 버젓이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들로 행세하고 있다고. 베르나르 베르나르와 아멜리 노통(브) 등을 일컫는 말입니다. 목수정 작가는 아니 에르노가 프랑스 현대 작가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작가의 하나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작품들이 번역됐으면서도 의외로 알려지지는 않은 작가라는 지적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와《한 여자》가 한꺼번에 다시 번역돼 나온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닙니다. 이 두 권은 1988년 한 권으로 묶여 나온 적이 있습니다.《아버지의 자리》(《어떤 여인》동시 수록, 홍상희 역, 책세상, 1988)라는 이름으로. 1995년까지 7년 동안 여섯 번 재판을 찍었는데 상대적으로 고급 독자들, 작가들에게 많이 읽혔습니다. 2000년대 들어 절판돼 학생들에게 읽히고 싶어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아니 에르노는 노르망디의 소도시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서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내 자식만은 공부를 시켜 반듯한 직업을 가지고 보란 듯 삶을 살게 하겠다는 부모의 바람에 따라 딸은 대학을 갑니다. 고등학교 선생을 하면서 대학 출신의 남편을 얻습니다. 중산층 사회로 편입된 것입니다. 이제 딸은 부모가, 부모가 속해 있는 사회계층이 불편합니다. 그들의 거칠고 상스러운 말투도 역겹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엄마, 아버지 이야기는 개인적인 이야기, 집안 이야기에 머무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못된 아버지인지 알았는데 실은 아니더라,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나름의 아픔과 상처가 있었더라, 어머니 이야기도 마찬가지. 출산/생의 비밀, 기막힌 불화의 원인, 그리고 화해.
《남자의 자리》와《한 여자》, 두 작품 모두 부모가 돌아가신 뒤 과거로 돌아가 불화하던 아버지 어머니와의 관계를 다룬 소설입니다. 그러나 이 두 소설은 모두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인 차원으로 승화합니다.
개인들의 온갖 사정들, 천박하든 우아하든, 행복하든 불행하든, 아늑하든 으스스하든 인간들의 문제는 개인적인 까닭에서만 연유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까닭에서도 반쯤은 연유하는 것이라는 점을 에르노의 작품들은 깨닫게 해줍니다.
에르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찌든 삶〉속으로 들어갑니다.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인데, 왜 그들이 어색한지, 그들과의 관계가 왜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지 알아보려고. 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삶, 그들이 사용하는 불편한 말투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막상 들어가 보니 그 속에는 어머니 아버지만 있는 게 아니라 나도 있습니다. 지금의 내 중산층 삶의 원천이 바로 그〈찌든 삶〉입니다. 내 세련된 말투의 뿌리가 실은 그 거칠고 상스러운 말투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나는,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그 때의 삶을 배반한 게 아니라 그 당시의 삶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의〈찌든 삶〉을 지금의 삶에 영입시킨 것입니다.
《한 여자》의 마지막 대목.
“이것은 전기도, 물론 소설도 아니다. 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리라. 어머니의 열망대로 내가 자리를 옮겨 온 이곳, 말과 관념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스스로릐 외로움과 부자연스러움을 덜 느끼자면, 지배당하는 계층에서 태어났고 그 계층에서 탈출하기를 원했던 나의 어머니가 역사가 되어야 했다.
앞으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 줬던 것은 바로 어머니, 그녀의 말, 그녀의 손, 그녀의 몸짓, 그녀만의 웃는 방식, 걷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잃어버렸다.”(110면)
덧붙이는 글 : 신경숙의《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를 읽은 분들께서는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의 <북 리뷰>에도 올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