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랑노래 - 출간 25주년 기념 특별판
신경림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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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랑노래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2013, 33면/32-33면)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노래》가 〈실천문학의 시집 50〉으로 출간된 것이 1988년 5월, 올해로 25년이 됩니다. 출간 25주년을 맞아 이 시집의 양장본 특별판이 ‘가난한 젊음에게 보내는 신경림 대표시집’이란 띠를 두르고 올해 초 새로운 모습으로 독자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가물거리는 기억이지만 대학입학 수능시험 언어영역에 이 시가 문제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이 시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있었고 정답은 ‘민중들의 애환을 노래한 시’ 쯤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문학교육의 끔찍한 현장입니다.

이 시는, 사랑하는 마음은, 계급, 성별, 교육, 인종, 직업 등 모든 것을 넘어서며, 모든 사람들에게 있을 수 있다는, 새삼스러운 진실을 감동적으로 일깨우는, 한국 현대시사에서 〈아름다운 사랑노래〉의 상석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는 시일 것입니다.”

 

[더 읽기]

 

가난한 젊은이입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농촌을 등지고 도시로 왔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두려움이 ‘없겠는가’/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사랑을 ‘모르겠는가’

 

이 가운데 ‘외로움’과 ‘두려움’을 내게 안겨주는 것은 도시이고 ‘그리움’과 ‘사랑’의 대상은 농촌에 있습니다.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시골에서는 나눠먹는 메밀묵이 도시에서는 상품이 됐습니다) 소리, 묵직하게 굴러가는 기계소리 같은 〈도시적 음향〉이 퍼지는 도시의 ‘달빛 쏟아지는 눈 쌓인 골목’은 농촌의 골목과는 달리 외로움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보고 싶은 어머니, 사랑한다 속삭이다 등 뒤에서 울음을 터트린 〈너〉를 남겨둔 시골집에는 감나무에 감이 하나 남아있습니다. 다들 배고프지만 까치를 위해 감 하나쯤은 남겨두는 게 농촌의 인심입니다. 그리움과 사랑은 농촌과 연결된 정서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농촌 인구는 10%내외입니다. 그 정도를 유지하는 것도 최근 들어 늘어나는 귀농인구 덕분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1970-80년대는 인구의 완전 도시화가 이뤄지기 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났으나 도시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해 농촌 도시 양쪽에 한발씩을 걸친 엉거주춤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여전히 가난하던 시절입니다. 가난이 대단한 부끄러움도 아니던 시절입니다. 이 시가 쓰인 때는 이런 시절의 끄트머리일 것입니다. 신경림 시인의 시들도 이 시집을 시점時點으로 시의 배경이 상당 부분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 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마지막 3행에 미루어, 가난한 사람으로 대표되는 민중은 외로움, 두려움, 그리움, 사랑이라는 감정을 버려야 한다는 슬픔과 분노를 이 시가 노래하고 있다고 해석하면 이는 시를 평면적으로 읽은 탓입니다. 마지막 3행은 차라리 가난이 아니라 더 고약한 처지에 빠지더라도 이런 감정을 사람에게서 떼어낼 수는 없다는 점을 확인하는 시구일 것입니다.

 

시인이 이 시를 쓰기까지는 그 이면에 하나의 에피소드와 한 편의 시가 있습니다. 김선우 시인이 전하는 에피소드는 이렇습니다.

 

“신경림 시인이 막 50대 초반에 들어섰을 때다. 시인이 자주 가던 식당에 청초하고 어여쁜 처녀가 있었다. 어느 날 이 처녀가 시인에게 면담을 청하였다. 사연을 들어보니, 그녀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데 그 남자가 신경림 시인의 시를 무척 좋아한다며 한번 만나달라는 거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시인에게 어렵게 청을 넣은 이 식당 따님의 마음이 어여뻐 시인은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두 남녀는 머지않아 부부 연을 맺었다. 그때 시인은 두 사람을 축복하며 〈너희 사랑〉이라는 시를 지어 결혼식에서 읽어주었다. 결혼식은 컴컴한 반 지하 방에 열 명 남짓 모여 단출하게 치러졌다. 노동운동을 하던 남자가 수배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가진 건 아무 것도 없지만 너무도 행복해하는 이 어여쁜 청춘 남녀에게 〈너희 사랑〉을 선물한 후 이들을 생각하며 또 한편의 시를 썼으니 그것이 〈가난한 사랑 노래〉다.”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장석남/김선우 해설, 비채, 2008, 76면)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의 맨 앞에 자리 잡고 있는 〈너희 사랑〉입니다. 굳이 해설이 필요 없는 시입니다.

 

너희 사랑

누이를 위하여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자잘한 낙서에서 너희 사랑은 싹텄다

흙바람 맵찬 골목과 불기 없는

자취방을 오가며 너희 사랑은 자랐다

가난이 싫다고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반 병의 소주와 한 마리 노가리를 놓고

망설이고 헤어지기 여러 번이었지만

뉘우치고 다짐하기 또 여러 밤이었지만

망설임과 헤어짐 속에서 너희 사랑은

굳어졌다 새 삶 찾아나서는

다짐 속에서 너희 사랑은 깊어졌다

돌팔매와 최루탄에 찬 마루바닥과

푸른옷에 비틀대기도 했으나

소주집과 생맥주집을 오가며

다시 너희 사랑은 다져졌다

그리하여 이제 너희 사랑은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처럼 눈에 익은 너희 사랑은

단비가 되어 산동네를 적시는구나

훈풍이 되어 산동네를 누비는구나

골목길 오가며 싹튼 너희 사랑은

새삶 찾아나서는 다짐속에서

깊어지고 다져진 너희 사랑은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2013, 11-12면/9-10면)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홯과 리라>에도 올려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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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파르티잔
서정춘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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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파르티잔

 

꽃 그려 새 울려 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서정춘, 《봄, 파르티잔》, 시와시학사, 2001, 11면)

 

“마음속에 자식으로서의 얼굴만 ‘그려’, 엄마 울려 놓고 ‘떠났다는’ 빨치산,

도심 한복판에 봄꽃 흐드러지게 ‘그려’, 새 울려 놓고 ‘떠났다는’ 봄,

모두가 지리산 골짜기에 가 있다는 소식.

사람과 자연이 함께 있는 곳, 恨과 슬픔까지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곳, 지리산입니다.

짧은 시가 좋은 시 아닐까 하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게 하는 이가 바로 서정춘 시인입니다. 살점은 물론 근육도 없이 오로지 뼈대뿐인데 뿜어내는 뜻, 생각, 색깔, 이미지가 은성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시의 제목은 어느 봄날, 지리산으로 사라진 한 빨치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어느 봄’과 ‘어느 빨치산’, 둘의 이야기라는 뜻을 담았습니다.

꽃과 새와 지리산과 봄은 쉽게 연결됩니다. 파르티잔(빨치산)과 지리산은 알겠습니다만 꽃과 새는 어떻게?

이를 유추해볼 수 있는 시인의 시가 두 편 있습니다.

 

할매

 

무슨 영문인지 문상객 하나 없는 산 밑 상갓집 저문 하늘 위로 줄기러기 거뭇거뭇 날아는 가고 상복도 입지 않은 오무래미 할매 혼자는 조등이 낮게 걸린 사립짝 문 밖으로 턱을 빼고 서서는 씨물거리고는 있고.

(서정춘, 《봄, 파르티잔》, 시와시학사, 2001 24면)

 

和音

 

낡은 집 돌각담에 등을 대고 오돌오돌 앉아서 실성한 듯 투덜거리는 저 홀할머니의 아들 하나는 빨치산이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부분, 서정춘,, 《竹篇》, 동학사, 1996/ 2006, 17면)

 

다행히도 이야기가 들어있는 시들입니다. 짐작컨대 오래 전, 자식사랑만 엄마 마음속에 “그려”, 엄마를 “울려 놓고” 빨치산 자식은 지리산 골짜기로 깊숙이 사라졌습니다(그런데 왜 빨치산이 아니라 굳이 ‘파르티잔’이라고 표기하고 있을까요). 빨치산 아들을 둔 엄마, 남편(빨치산의 아버지)의 상을 치르는 중입니다. 빨갱이 집안, 문상객 하나 없습니다. 이가 다 빠져 늘 오물거리는 할매(오무래미)가 된 엄마는 평생 포기하지 않았듯이 혹시나 하며 아들을 기다립니다. “문 밖으로 턱을 빼고 서서는 씨물거”립니다. 또 세월은 지납니다. 엄마는 이제 늙어 “실성한 듯 투덜거리”면서도 여전히 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빨치산이 나온다고 이 시를 이념적으로 읽는다? 꽃과 새가 그렇듯 자식 사랑과 엄마에게 이념 타령이라니요. 온갖 꽃들이 소란스러운 도시에서, 그들에 반한 새들을 남겨놓고 봄은 지리산으로 살그머니 옮겨 앉습니다. 이 빨치산(사람)과 이 봄(자연)이 함께 하는 지리산 골짜기를 머릿속에, 아니 마음속에 그려봅시다. ‘이야기성’은 빼버리고 문득, 그 그림만 즐깁시다.

 

8단어(꽃/ 그려/ 새/ 울려 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로 된 시, 그 짧음으로 시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시를 놓고 이 무슨 구질구질한 횡성수설인지 모르겠습니다. 서정춘 시인의 시들은 짧지만 우리를 붙잡고 있는 시간은 무척 깁니다.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장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려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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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 개정판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57
허수경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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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병장이 내 사내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 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 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허수경,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실천문학사, 1988/2010, 34면)

 

“1964년생 허수경 시인이 1988년에 낸 첫 시집에 실린 시이니 많아야 스물네 살 채 안 된 ‘앳된 단발머리’가 지은 시입니다. 워낙 호가 나 웬만한 허랑방탕으론 꿈쩍도 않을 송기원 시인이 ‘속은 듯한 느낌’이었다니 더 할 말이 뭐가 있겠습니까.

풋사과가 빚어낸 익을 대로 익어, 문드러지기 직전의 그 농염한 맛이라니.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쇳덩이도 녹여낼 정염情炎의 그 서늘함이라니!”

 

 

[더 읽기]

 

“몰골만 겨우 사람 꼴” 갖춘 폐병장이, 어디 쓸까 싶겠지만 그의 “미친 듯 타오르는” 눈매는 대단한 흡인력으로 뭇 여자들의 여성성을 흠뻑 빨아들입니다.

스물 갓 넘은 처녀, 그를 살리기 위해 뭔 짓은 못하겠습니까.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미친 듯 타오르는 눈매”를 시발로 시작하는 이 서사의 곳곳에서는 관능과 애욕의 냄새가 납니다. 뱀 잡고 개 잡는 여자가 스물 갓 넘었다는 처녀라는 사실이 그 밀도를 더 짙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마지막 두 행으로 시인은 완전 반전에 성공합니다.

 

해방되자 징용 갔다 돌아온 할아버지, 한국전쟁에 나섰다 돌아온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할미 어미가 허벅지를 베어 선지피를 먹인 것에 비하면 뱀 잡고 개 잡는 게 뭐 대수겠습니까. 내 남자만 특별대우를 받은 게 아닙니다.

 

이 시가 만든 서사의 끝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관능〉이 아니라 아마 〈모성〉입니다.

 

“세상의 모든 남정네들에게 버림받고, 그렇게 버림받아 자유로운 몸이 되어 드디어 세상의 모든 남정네들을 제 살붙이로 여기는 진주 남강이나 혹은 낙동강 하류으 어느 가난한 선술집의 주모”(송기원)가 써냈을 법한 시들을 마구 써댄 20대 초반 허수경 시인의 시에는 이런 시도 있습니다.

 

사식을 먹으며

 

그리 모질게 매질을 당하고도 솟증이 돋아 입탐을 하네 돼지비계 두둥실 떠 있는 순대국이나 한 사발 가슴 녹여 내며 들이켜고 싶으이 방아냄새 상긋한 개장국에 밥을 말며 장정들 틈에 끼여 앉아 주는 대로 탁주도 뿌리치지 않고 싶으이 제아무리 매질 오질토록 닥쳐봐라 내 입맛 하나 온전히 다칠 수 있으랴 두레마을의 아낙으로 살점 일구어내고 연애도 달덩이 같은 아들도 낳아

이보시게 아들도 이녁들에게 매질당하게 키우것네

(허수경,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실천문학사, 1988/2010, 38면)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려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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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학교 - 이정록 시집
이정록 지음 / 열림원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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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어머니와 한 몸이 돼, 아들은 오른손만 빌려드렸을 뿐 오롯이 엄마가 써내려간 시집《어머니학교》를 낸 이정록 시인이 이번에는 시집 《아버지학교》를 냈습니다. 아버지의 경우에도 엄마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아(우연한 기회에 운 좋게 얻어들은 극비사항에 따르면), 시인은 쉰 살이 된 올해 쉰여섯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아 단 수무엿새 만에” 이 시집의 시를 몽땅 써냈습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교수가 지난번 시집 발문에서 “《어머니학교》가 하나의 성장서사가 된다”고 정곡을 찌른 바 있는데 이번에는 시인 스스로가 “두 시집을 나란히 읽어보니 〈성숙시집〉같다. 생의 여로가 그렇게 이어진 듯싶다”고 합니다.

 

 

이정록 시인의 여러 지인들이 진반농반으로 하듯, 시인의 체질을 엄마에게서 물려받았다면 올곧은 천생 진국인 성품은 아버지의 다음과 같은 평생의 가르침 덕분인 듯합니다.

 

“모든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유머러스하면서도 슬기로운 삶으로 치면 《어머니학교》가 한층 윗길이지만 곧 죽어도 사내의 삶으로 치면 단연 《아버지학교》입니다.

72편의 시를 실었던 엄마시집에 비해 아버지시집은 56편밖에 싣지 않았지만 있어야 할 덕목은 다 갖췄습니다. 56편의 시를 다섯 부분으로 나눴는데 소제목만 봐도 어떤 시집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끌립니다.

 

1. 가슴은 식어야 넓어지는 겨

2. 똥구덩이에 빠져도 기죽지 마라

3. 큰 걸음으로 건너가라

4. 아버지의 마음 한쪽을 상속받았습니다

5. 얼음지붕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얼음으로 살아야 한다.

 

산문 3편이 묶인 한 부분이 있는데 이곳의 소제목은 딱 엄마 취향을 닮았습니다.

 

6. 사랑을 하면 가슴팍에 짐승이 돌아다니고 귀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학교》,《아버지학교》두 시집은 무더운 여름에도 잘 읽힐 시집입니다. 강추합니다.

 

털신

아버지학교 52

 

군청 앞 백화식당에서 글 쓰는 벗들과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고 있는데, 흘깃흘깃

나를 훔쳐보던 도우미 아주머니가 제 옆에 앉았습니다.

미남을 알아본다고 친구들이 농을 쳤습니다. 저를 아세요?

여쭙는 순간, 십여 년 전의 안개천지라는 식당이 떠오르고

사십여년 전의 뾰족구두가 떠올랐습니다.

이 자字, 경 자, 연 자 쓰는 분을 아세요?

네, 아버님이십니다. 정말 닮았다 했어요. 근데, 요즈음 뵐 수가 없어서요.

작년 봄에 돌아가셨어요. 순간, 낯빛을 파르르 떨며 무릎을 꿇고는

제게 술잔을 건네는 거예요. 한 손으로 편하게 받아요.

이 잔은 아버님께 올리는 겁니다. 저도 무릎 꿇고 잔을 건넸지요.

한 손으로 따르란 걸 두 손으로 올렸지요. 아들로서 올리는 거예요

찡긋 웃어 보였지요. 돌아가신 날짜랑 선산도 알려드렸어요.

당연히 어머니에겐 비밀로 부쳐야죠. 하늘나라로 부치는

어머니의 편지가 끊기면 많이도 심심하고 궁금할 테니까요.

그분을 뵌 지도 십수 년이 흘렀네요.

요번 기일에 내려오면 군청 앞 백화식당에 들러보세요.

찾아갈 때에는 저처럼 뿔테안경에 파마머리로 가세요.

제 나이 쉰이고, 아버지는 쉰여섯에 떠나셨으니 속을 거에요.

그분 연세도 일흔이 넘었으니 주름졌다고 실망하진 마세요.

만나면, 아직도 경 자, 연 자, 쓰는 분이 그리워요?

개구쟁이처럼 몇 번이고 물어보세요. 저는 주로 청바지를 입어요.

저도 들러볼게요. 그럼 하루에 두 번이나 왔냐고

기뻐하시겠지요. 그 옛날처럼 돌아서서 눈물 찍으시겠죠.

참, 그분은 이제 뾰족구두 대신에 털신을 신어요.

어머니처럼 눈자위가 젖어 있고요.

(이정록, 《아버지학교》, 열림원, 2013, 92-93면)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애이불비哀而不悲,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고 했습니다. 속으로는 슬퍼도 겉으로는 슬프지 않은 척, 아프지 않은 척해야한다는 말이지요.

 

아버지가 오십대에 다니시던 술집의 아주머니를 아들이 오십대가 돼 만나는 자리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애인(실은 아들도 아는 아주머니, 〈삐딱구두〉참조)을 아들이 만나 술잔을 주고받는다는 줄거리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시는 그러나 제대로 된 산문으로 늘어놓으면 웃음과 눈물을 함께 보장할 수 있는 한 편의 스토리가 됩니다. 이 도우미 아주머니, 어린 시절, 아버지가 집에 데리고 들어왔던 〈삐딱구두〉입니다. 대를 이은 길고 긴 인연입니다. 그 자세한 내용은 《어머니학교》에 실린 다음 시를 읽어보세요. 더 절절한 스토리가 가능합니다.

 

삐딱구두

어머니학교 66

 

뭔 일 저질렀나?

늦기는 해도 외박은 없던 양반인데 말이여.

일이 손에 안 잡혀. 물동이를 이어도 똬리가 쪽머리에 걸치고

고추 순을 집어도 가지째 꺾어대야. 아니나 다를까 저물녘에

개똥참외처럼 노란 택시 한 대가 독 오른 복어처럼 들이치더구나.

반가운 마음하고 속상한 마음을 썩썩 비벼서 한마디 쏴붙이려는데

삐딱구두에 명태알 같은 스타킹이 택시 뒷문에서 나오는 거여.

먼저 내린 아버지가 양산을 펼쳐주며 눈꼬리에 은방울꽃을 매달더구나.

들고 있던 연장을 휘둘러도 시원치 않을 판에 내가 뭔 죄를 졌다고

땀 닦고 치마에 검불을 떼어내며 머리를 조아렸는지 몰라.

아버지가 누추한 내 몰골에 혀를 차더니, 작은댁 출출할 테니

조기 굽고 닭 잡아서 뚝딱 밥상 차리라고 으름장을 놓더구나.

머리로는 쥐약에 살충제를 간간하게 섞어서 국 끓이고

된장 독 구더기만 꺼내다가 호박전을 부쳐주고 싶었다만

이 악물고 소찬이나마 정갈하게 한 상 차려 올렸지.

뭔 구경났다고 빡빡머리 새끼들은 어미 입성 한번 보고 그쪽 한번 보고

그 양반은 애들 차례로 불러서 동전닢 뿌리며

구정물에 양조간장 치듯 싱긋싱긋 웃어대는데 환장하겄더라.

숟가락 놓자마자 삐딱구두를 툇마루 옆 토끼장으로 불렀지.

토끼가 먼저 울었는지 붉은 눈으로 쳐다보더구나.

앞길이 창창한 처자가 우리 집에 제 발로 들어와줘서 고마워.

논은 열일곱 마지기고 밭도 몇 뙈기 있으니 밥은 굶지 않을 거여.

종갓집이니 제사와 시제는 당연하고 한식 차례도 잘 부탁하네.

내가 밭이 성해서 삼삼 이녀 골고루 뒀으니 후손은 걱정 말게.

이미 들었겄지만 시어머님이 두 분이니 공경심이 곱으로다 필요할 거여.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있으니 꼭 들어줬으면 하네.

자네는 이제부터 농사짓고 밥하고 빨래하며 살아가야 할테니

그 필요없는 삐딱구두와 양산은 나에게 선물로 줌세.

나도 고것만 있으면 읍내 제일은행원도 사귈 수 있겠구먼.

어뗘? 빛바랜 양산과 구두 한 켤레를 비싼 논밭하고 맞바꾸면

괜찮은 거래 아닌감? 내가 말의 시치미도 거둬들이질 안 했는데

바깥마당으로 나가서 기다리던 택시에 겨들어가더라고.

한 시간 안에 저 여우를 다시 태우고 나가게 될 거라고

택시기사와 내기를 걸었거든. 돈을 걸었지만 어떻게 받겄어.

삼십 년도 더 지난 얘기여. 지금 읍내 제일은행에 손녀가 다니는데

들를 때마다 나 혼자 머쓱하고 불콰해지고 그랴.

그때 삐딱한 인연을 바꿔치기 했으면 어찌 됐을까, 하고.

(이정록, 《어머니학교》, 열림원, 2012, 113-115면)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활과 리라>에도 올려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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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아픔 - 투신자살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의 시집
프리모 레비 지음, 이산하 엮음 / 노마드북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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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 -〈천국과 지옥〉, 교수는 지옥행이겠지요!

 

천국과 지옥

 

누가 지옥으로 가야되는지 말해주겠다.

미국 언론인들과 정치인들, 회계사들과 재정관들

종교인들, 기업 경영인들과 대부분의 의사들

수학선생들과 고양이들

그리고 쓸데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

 

천국으로 가야할 사람들도 말해주겠다.

아이들을 비롯한 구두닦이 소년들과 연인들

어부들과 철도노동자들, 와인감별사들과 병사들

러시아인들과 발명가들, 말들과 닭들

그리고 새벽 출근전차에서 하품하며 조는 사람들.

(프리모 레비, 《살아남은 자의 아픔》, 이산하 편역, 노마드북스, 2011, 29면)

 

“그럼 대학교수는? 정원 초과로 학생을 못 채운 죄, 멀쩡한 젊은이 데려다 취업 못 시킨 죄, 인센티브에 목을 매는 죄, ‘삼성’에 취직해야만 행복한 거 아니라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못한 죄, 학교 부실의 원인이 총장직선제에 있다는 것을 도통 납득하지 못한 죄 등등, 교수는 당연히 지옥행입니다.

다시 한번.

‘가난한 이들의 외침이 항상 정의롭지는 않지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정의가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하워드 진이 《미국민중사》 앞쪽에서 인용한 대목입니다. 이 말을 잊지 않고 살려고 애쓰렵니다.”

 

 

 

 

 

 

 

 

 

 

 

 

 

다음은 이 시집 편역자 이산하 시인의 해설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자신이 존경하는 작가이던 단테의 《신곡》을 여러 글에서 인용했다. 은근히 사회풍자적인 이 시에서 단테가 지옥과 천국에 갈 인물들을 분류한 것과 그로부터 600여년 이후에 프리모 레비가 분류한 것을 서로 비교해보면 상당히 흥미롭다.

참고로 단테가 ‘지옥’으로 보낸 죄수들은 ‘신을 모른다는 이유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지식인들과 탐욕적이고 부패한 정치가와 폭력배들, 바람둥이와 인신매매범들, 사기꾼과 배신자들, 고리대금업의 금융업자와 매관매직의 교황 및 고위성직자들이다.

그리고 천국으로 보낸 인물들로서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성 프란체스코, 신의 농부 도미니쿠스, 율법주석가 엔리코 디 수사, 수도원장 우고, 여러 스콜라 학사들, 그리고 로마법대전을 만든 비잔틴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명판결을 내렸다는 솔로몬왕 같은 법률가들이다.

서울대 법대 안경환 교수가 말했다.

“단테처럼 법률가들을 천당으로 보내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극히 드문 일이며, 단테의 신곡은 ‘神曲’이 아니라 오히려 ‘法曲’이다.”

‘바티칸의 금서’ 1호인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가 말했다.

“나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천국보다 지옥에 더 가고 싶다. 왜냐하면 천국이 주변환경이야 훨씬 좋겠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재미있는 구라들(정치가들)은 지옥에 다 모여서 신나게 떠들고 있을 테니까!”

(프리모 레비, 《살아남은 자의 아픔》, 이산하 편역, 노마드북스, 2011, 30면)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 이탈리아의 작가이자 화학자인 레비는 1943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끌려갑니다. 1945년 10월, 평균생존기간이 3개월인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집으로 돌아온 그는, 그러나 1987년 4월 11일 돌연, 투신자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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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은 죄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바람이 평원을 가로질러 자유로이 불어오고

거센 파도가 끊임없이 해변으로 몰아친다.

인간은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땅은 그에게 꽃과 열매를 선사한다.

인간은 고된 노동과 기쁨 속에 살아가고

희망과 공포 속에서 더 고귀한 자손들을 남긴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의 저승사자인 그대가 나타났고

짐승처럼 우리들은 죽음의 쇠사슬에 묶여버렸다.

우리가 만난다면 그대는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여전히 신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겠는가?

그럼 어느 신에게 말인가?

또 기꺼이 무덤에라도 뛰어들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미완성의 작품을 아쉬워하는 예술가들처럼

아직 살아있는 1300만의 생명에 대해 통탄이라도 할 텐가?

-죽음의 화신이여

 

우리는 그대에게 결코 한 순간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며

그 어느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장수하기를 바란다.

단지 500만 년 동안만 불면으로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가스실에서 숨져간 모든 이들의 신음과 비명소리가

매일 밤 그대를 방문해 강한 위롤르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프리모 레비, 《살아남은 자의 아픔》, 이산하 편역, 노마드북스, 2011, 31-32면)

 

이산하 시인의 해설입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 총책임자였다. 종전 후 1급 국제전범으로 수배되자 아르헨티나로 도피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15년간의 끈질긴 추적으로 1960년에 체포된 그는 예루살렘 나치전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62년에 처형되었다.

법정 최후진술에서 아이히만이 말했다.

“나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며, 저 신 앞에서는 유죄지만 이 법 앞에서는 무죄다.”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며 말했다.

“의심하지 않은 죄, 생각하지 않은 죄, 그리고 행동하지 않은 죄......그것이 피고의 진짜 죄다.”

미국 ‘뉴요크’ 특파원으로 참관한 방청석의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했다.

“자기 생각 없이 남의 생각대로 산 것과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가장 큰 죄다.”

이날, 프리모 레비는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관하려다 끝내 가지 않고, 혼자 조용히 이 시를 썼다.

(프리모 레비, 《살아남은 자의 아픔》, 이산하 편역, 노마드북스, 2011, 33면)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이히만, 나치전범 재판과정을 통해 드러난 그의 모습은 몸과 마음 속속들이 살인마, 악마, 피에 굶주린 흡혈귀가 아닌 “근면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391면)의 인간이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통해〈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악이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음”을 아렌트는 우리에게 말하려고 했습니다. 잘못된 일을 저지른 고위직 공무원들이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 오직 지시에 따른다’라며 자신들을 옹호하는 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맥락의 일들입니다.

〈악의 평범성〉, 아이히만의 경우를 제대로 알고 싶은 분들은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달린 한나 아렌트의《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일반인을 위해 신문에 분재한 아이히만 재판 참관기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다음은 이 책의 본문 마지막, 아이히만이 교수형을 당하는 장면을 옮긴 글입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아주 근엄한 태도로 교수대로 걸어갔다. 그는 붉은 포도주 한 병을 요구했고 그 절반을 마셨다. 그는 그에게 성서를 읽어주겠다고 제안한 개신교 목사 윌리엄 헐 목사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는 두 시간밖에 더 살 수 없기 때문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감방에서 형장에 이르는 50야드를 조용히 그리고 꼿꼿이 걸어갔다. 간수들이 그의 발목과 무릎을 묶자 그는 간수들에게 헐렁하게 묶어서 자신이 똑바로 설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검은색 두건을 머리에 쓰겠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나는 필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는 완전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말로 남긴 기괴한 어리석음보다도 이 점을 더 분명히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을 믿는 자라고 분명히 진술하면서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며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일반적인 나치스 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는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348-349면)

 

아우슈비츠의 소녀

 

타인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 속에 함께 산다.

어린 폼페이의 소녀여!

하늘이 잿빛으로 변하며 세상이 무너질 때

다시 자궁 속으로 회귀라도 하듯

넌 뼈만 남을 때까지 어머니의 몸을 끌어안고 있구나.

검은 화산재는 노래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던

너의 집 창문으로 일제히 침투했다.

그 재는 2천년의 세월이 흘러

가냘픈 소녀들의 육체를 영원히 덮어버렸다.

이처럼 넌 지금도 우리와 함께

회색 담장 속에 갇혀 끝없이 고통 받고 있구나.

 

내일이면 굴뚝의 검은 연기로 피어오를지도 모를

도축장 같은 수용소에 갇혀 날마다 몰래 일기를 쓴

13살 어린 아우슈비츠의 소녀여!

가녀린 그대 가슴 속에는 검은 재만 흩날릴 뿐

이미 안네의 짧은 생애는 일기장에서 끝나버렸구나.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리틀 보이’의 검은 불바다에

살점 하나 없이 완벽하게 사라져버린

어린 히로시마의 소녀여!

네 영혼이 아직도 검은 구름처럼 떠돌며 울부짖는구나.

더러운 자본의 권력, 끊임없는 탐욕의 침략자들

지금도 살육의 광풍을 은밀히 준비하는 전쟁광들이여

그대들은 그동안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고통들만으로는 정녕 부족하단 말인가.

한 개의 손가락으로 폭탄단추를 누르기 전에

잠깐만, 아주 잠깐만 멈추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타인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다.

(프리모 레비, 《살아남은 자의 아픔》, 이산하 편역, 노마드북스, 2011, 35-36면)

 

우리 인간들에게 큰 고통을 안긴 세 가지 재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폼페이 화산 폭발, 아우슈비츠 대학살, 히로시마 원폭 투하. 하나는 자연이 내린 재앙이고 둘은 인간들이 저지른 재앙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들, 하나는 우리 편이고 하나는 적의 편입니다. 자연/인간, 너/나 구분 없이 이 세상의 모두가, 모든 것이 인간에게 재앙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고통〉.

살면서 저절로 깨우치게 된 이치가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 온갖 만물 가운데 나와 상관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이치입니다. 인간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살고 있는데, 언젠가부터 알게 됐습니다. 지구상에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내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지구 자체가, 자유롭지 못하면 내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고통 받는 사람이 있으면 내 행복은 참된 행복이 아닙니다.

타인의 행복이 내 행복입니다.

“타인의 고통은 내 고통”입니다.

타인의 자유가 내 자유입니다.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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