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랑노래 - 출간 25주년 기념 특별판
신경림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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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랑노래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2013, 33면/32-33면)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노래》가 〈실천문학의 시집 50〉으로 출간된 것이 1988년 5월, 올해로 25년이 됩니다. 출간 25주년을 맞아 이 시집의 양장본 특별판이 ‘가난한 젊음에게 보내는 신경림 대표시집’이란 띠를 두르고 올해 초 새로운 모습으로 독자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가물거리는 기억이지만 대학입학 수능시험 언어영역에 이 시가 문제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이 시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 있었고 정답은 ‘민중들의 애환을 노래한 시’ 쯤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문학교육의 끔찍한 현장입니다.

이 시는, 사랑하는 마음은, 계급, 성별, 교육, 인종, 직업 등 모든 것을 넘어서며, 모든 사람들에게 있을 수 있다는, 새삼스러운 진실을 감동적으로 일깨우는, 한국 현대시사에서 〈아름다운 사랑노래〉의 상석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는 시일 것입니다.”

 

[더 읽기]

 

가난한 젊은이입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농촌을 등지고 도시로 왔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두려움이 ‘없겠는가’/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사랑을 ‘모르겠는가’

 

이 가운데 ‘외로움’과 ‘두려움’을 내게 안겨주는 것은 도시이고 ‘그리움’과 ‘사랑’의 대상은 농촌에 있습니다.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시골에서는 나눠먹는 메밀묵이 도시에서는 상품이 됐습니다) 소리, 묵직하게 굴러가는 기계소리 같은 〈도시적 음향〉이 퍼지는 도시의 ‘달빛 쏟아지는 눈 쌓인 골목’은 농촌의 골목과는 달리 외로움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보고 싶은 어머니, 사랑한다 속삭이다 등 뒤에서 울음을 터트린 〈너〉를 남겨둔 시골집에는 감나무에 감이 하나 남아있습니다. 다들 배고프지만 까치를 위해 감 하나쯤은 남겨두는 게 농촌의 인심입니다. 그리움과 사랑은 농촌과 연결된 정서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농촌 인구는 10%내외입니다. 그 정도를 유지하는 것도 최근 들어 늘어나는 귀농인구 덕분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1970-80년대는 인구의 완전 도시화가 이뤄지기 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났으나 도시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해 농촌 도시 양쪽에 한발씩을 걸친 엉거주춤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여전히 가난하던 시절입니다. 가난이 대단한 부끄러움도 아니던 시절입니다. 이 시가 쓰인 때는 이런 시절의 끄트머리일 것입니다. 신경림 시인의 시들도 이 시집을 시점時點으로 시의 배경이 상당 부분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 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마지막 3행에 미루어, 가난한 사람으로 대표되는 민중은 외로움, 두려움, 그리움, 사랑이라는 감정을 버려야 한다는 슬픔과 분노를 이 시가 노래하고 있다고 해석하면 이는 시를 평면적으로 읽은 탓입니다. 마지막 3행은 차라리 가난이 아니라 더 고약한 처지에 빠지더라도 이런 감정을 사람에게서 떼어낼 수는 없다는 점을 확인하는 시구일 것입니다.

 

시인이 이 시를 쓰기까지는 그 이면에 하나의 에피소드와 한 편의 시가 있습니다. 김선우 시인이 전하는 에피소드는 이렇습니다.

 

“신경림 시인이 막 50대 초반에 들어섰을 때다. 시인이 자주 가던 식당에 청초하고 어여쁜 처녀가 있었다. 어느 날 이 처녀가 시인에게 면담을 청하였다. 사연을 들어보니, 그녀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데 그 남자가 신경림 시인의 시를 무척 좋아한다며 한번 만나달라는 거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시인에게 어렵게 청을 넣은 이 식당 따님의 마음이 어여뻐 시인은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두 남녀는 머지않아 부부 연을 맺었다. 그때 시인은 두 사람을 축복하며 〈너희 사랑〉이라는 시를 지어 결혼식에서 읽어주었다. 결혼식은 컴컴한 반 지하 방에 열 명 남짓 모여 단출하게 치러졌다. 노동운동을 하던 남자가 수배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가진 건 아무 것도 없지만 너무도 행복해하는 이 어여쁜 청춘 남녀에게 〈너희 사랑〉을 선물한 후 이들을 생각하며 또 한편의 시를 썼으니 그것이 〈가난한 사랑 노래〉다.”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장석남/김선우 해설, 비채, 2008, 76면)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의 맨 앞에 자리 잡고 있는 〈너희 사랑〉입니다. 굳이 해설이 필요 없는 시입니다.

 

너희 사랑

누이를 위하여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자잘한 낙서에서 너희 사랑은 싹텄다

흙바람 맵찬 골목과 불기 없는

자취방을 오가며 너희 사랑은 자랐다

가난이 싫다고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반 병의 소주와 한 마리 노가리를 놓고

망설이고 헤어지기 여러 번이었지만

뉘우치고 다짐하기 또 여러 밤이었지만

망설임과 헤어짐 속에서 너희 사랑은

굳어졌다 새 삶 찾아나서는

다짐 속에서 너희 사랑은 깊어졌다

돌팔매와 최루탄에 찬 마루바닥과

푸른옷에 비틀대기도 했으나

소주집과 생맥주집을 오가며

다시 너희 사랑은 다져졌다

그리하여 이제 너희 사랑은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처럼 눈에 익은 너희 사랑은

단비가 되어 산동네를 적시는구나

훈풍이 되어 산동네를 누비는구나

골목길 오가며 싹튼 너희 사랑은

새삶 찾아나서는 다짐속에서

깊어지고 다져진 너희 사랑은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2013, 11-12면/9-10면)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홯과 리라>에도 올려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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