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파르티잔
서정춘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봄, 파르티잔

 

꽃 그려 새 울려 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서정춘, 《봄, 파르티잔》, 시와시학사, 2001, 11면)

 

“마음속에 자식으로서의 얼굴만 ‘그려’, 엄마 울려 놓고 ‘떠났다는’ 빨치산,

도심 한복판에 봄꽃 흐드러지게 ‘그려’, 새 울려 놓고 ‘떠났다는’ 봄,

모두가 지리산 골짜기에 가 있다는 소식.

사람과 자연이 함께 있는 곳, 恨과 슬픔까지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곳, 지리산입니다.

짧은 시가 좋은 시 아닐까 하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게 하는 이가 바로 서정춘 시인입니다. 살점은 물론 근육도 없이 오로지 뼈대뿐인데 뿜어내는 뜻, 생각, 색깔, 이미지가 은성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시의 제목은 어느 봄날, 지리산으로 사라진 한 빨치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어느 봄’과 ‘어느 빨치산’, 둘의 이야기라는 뜻을 담았습니다.

꽃과 새와 지리산과 봄은 쉽게 연결됩니다. 파르티잔(빨치산)과 지리산은 알겠습니다만 꽃과 새는 어떻게?

이를 유추해볼 수 있는 시인의 시가 두 편 있습니다.

 

할매

 

무슨 영문인지 문상객 하나 없는 산 밑 상갓집 저문 하늘 위로 줄기러기 거뭇거뭇 날아는 가고 상복도 입지 않은 오무래미 할매 혼자는 조등이 낮게 걸린 사립짝 문 밖으로 턱을 빼고 서서는 씨물거리고는 있고.

(서정춘, 《봄, 파르티잔》, 시와시학사, 2001 24면)

 

和音

 

낡은 집 돌각담에 등을 대고 오돌오돌 앉아서 실성한 듯 투덜거리는 저 홀할머니의 아들 하나는 빨치산이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부분, 서정춘,, 《竹篇》, 동학사, 1996/ 2006, 17면)

 

다행히도 이야기가 들어있는 시들입니다. 짐작컨대 오래 전, 자식사랑만 엄마 마음속에 “그려”, 엄마를 “울려 놓고” 빨치산 자식은 지리산 골짜기로 깊숙이 사라졌습니다(그런데 왜 빨치산이 아니라 굳이 ‘파르티잔’이라고 표기하고 있을까요). 빨치산 아들을 둔 엄마, 남편(빨치산의 아버지)의 상을 치르는 중입니다. 빨갱이 집안, 문상객 하나 없습니다. 이가 다 빠져 늘 오물거리는 할매(오무래미)가 된 엄마는 평생 포기하지 않았듯이 혹시나 하며 아들을 기다립니다. “문 밖으로 턱을 빼고 서서는 씨물거”립니다. 또 세월은 지납니다. 엄마는 이제 늙어 “실성한 듯 투덜거리”면서도 여전히 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빨치산이 나온다고 이 시를 이념적으로 읽는다? 꽃과 새가 그렇듯 자식 사랑과 엄마에게 이념 타령이라니요. 온갖 꽃들이 소란스러운 도시에서, 그들에 반한 새들을 남겨놓고 봄은 지리산으로 살그머니 옮겨 앉습니다. 이 빨치산(사람)과 이 봄(자연)이 함께 하는 지리산 골짜기를 머릿속에, 아니 마음속에 그려봅시다. ‘이야기성’은 빼버리고 문득, 그 그림만 즐깁시다.

 

8단어(꽃/ 그려/ 새/ 울려 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로 된 시, 그 짧음으로 시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시를 놓고 이 무슨 구질구질한 횡성수설인지 모르겠습니다. 서정춘 시인의 시들은 짧지만 우리를 붙잡고 있는 시간은 무척 깁니다.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장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려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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