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 개정판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57
허수경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폐병장이 내 사내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 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 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허수경,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실천문학사, 1988/2010, 34면)

 

“1964년생 허수경 시인이 1988년에 낸 첫 시집에 실린 시이니 많아야 스물네 살 채 안 된 ‘앳된 단발머리’가 지은 시입니다. 워낙 호가 나 웬만한 허랑방탕으론 꿈쩍도 않을 송기원 시인이 ‘속은 듯한 느낌’이었다니 더 할 말이 뭐가 있겠습니까.

풋사과가 빚어낸 익을 대로 익어, 문드러지기 직전의 그 농염한 맛이라니.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쇳덩이도 녹여낼 정염情炎의 그 서늘함이라니!”

 

 

[더 읽기]

 

“몰골만 겨우 사람 꼴” 갖춘 폐병장이, 어디 쓸까 싶겠지만 그의 “미친 듯 타오르는” 눈매는 대단한 흡인력으로 뭇 여자들의 여성성을 흠뻑 빨아들입니다.

스물 갓 넘은 처녀, 그를 살리기 위해 뭔 짓은 못하겠습니까.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미친 듯 타오르는 눈매”를 시발로 시작하는 이 서사의 곳곳에서는 관능과 애욕의 냄새가 납니다. 뱀 잡고 개 잡는 여자가 스물 갓 넘었다는 처녀라는 사실이 그 밀도를 더 짙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마지막 두 행으로 시인은 완전 반전에 성공합니다.

 

해방되자 징용 갔다 돌아온 할아버지, 한국전쟁에 나섰다 돌아온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할미 어미가 허벅지를 베어 선지피를 먹인 것에 비하면 뱀 잡고 개 잡는 게 뭐 대수겠습니까. 내 남자만 특별대우를 받은 게 아닙니다.

 

이 시가 만든 서사의 끝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관능〉이 아니라 아마 〈모성〉입니다.

 

“세상의 모든 남정네들에게 버림받고, 그렇게 버림받아 자유로운 몸이 되어 드디어 세상의 모든 남정네들을 제 살붙이로 여기는 진주 남강이나 혹은 낙동강 하류으 어느 가난한 선술집의 주모”(송기원)가 써냈을 법한 시들을 마구 써댄 20대 초반 허수경 시인의 시에는 이런 시도 있습니다.

 

사식을 먹으며

 

그리 모질게 매질을 당하고도 솟증이 돋아 입탐을 하네 돼지비계 두둥실 떠 있는 순대국이나 한 사발 가슴 녹여 내며 들이켜고 싶으이 방아냄새 상긋한 개장국에 밥을 말며 장정들 틈에 끼여 앉아 주는 대로 탁주도 뿌리치지 않고 싶으이 제아무리 매질 오질토록 닥쳐봐라 내 입맛 하나 온전히 다칠 수 있으랴 두레마을의 아낙으로 살점 일구어내고 연애도 달덩이 같은 아들도 낳아

이보시게 아들도 이녁들에게 매질당하게 키우것네

(허수경,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실천문학사, 1988/2010, 38면)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려 놓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