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아픔 - 투신자살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의 시집
프리모 레비 지음, 이산하 엮음 / 노마드북스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프리모 레비 -〈천국과 지옥〉, 교수는 지옥행이겠지요!

 

천국과 지옥

 

누가 지옥으로 가야되는지 말해주겠다.

미국 언론인들과 정치인들, 회계사들과 재정관들

종교인들, 기업 경영인들과 대부분의 의사들

수학선생들과 고양이들

그리고 쓸데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

 

천국으로 가야할 사람들도 말해주겠다.

아이들을 비롯한 구두닦이 소년들과 연인들

어부들과 철도노동자들, 와인감별사들과 병사들

러시아인들과 발명가들, 말들과 닭들

그리고 새벽 출근전차에서 하품하며 조는 사람들.

(프리모 레비, 《살아남은 자의 아픔》, 이산하 편역, 노마드북스, 2011, 29면)

 

“그럼 대학교수는? 정원 초과로 학생을 못 채운 죄, 멀쩡한 젊은이 데려다 취업 못 시킨 죄, 인센티브에 목을 매는 죄, ‘삼성’에 취직해야만 행복한 거 아니라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못한 죄, 학교 부실의 원인이 총장직선제에 있다는 것을 도통 납득하지 못한 죄 등등, 교수는 당연히 지옥행입니다.

다시 한번.

‘가난한 이들의 외침이 항상 정의롭지는 않지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정의가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하워드 진이 《미국민중사》 앞쪽에서 인용한 대목입니다. 이 말을 잊지 않고 살려고 애쓰렵니다.”

 

 

 

 

 

 

 

 

 

 

 

 

 

다음은 이 시집 편역자 이산하 시인의 해설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자신이 존경하는 작가이던 단테의 《신곡》을 여러 글에서 인용했다. 은근히 사회풍자적인 이 시에서 단테가 지옥과 천국에 갈 인물들을 분류한 것과 그로부터 600여년 이후에 프리모 레비가 분류한 것을 서로 비교해보면 상당히 흥미롭다.

참고로 단테가 ‘지옥’으로 보낸 죄수들은 ‘신을 모른다는 이유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지식인들과 탐욕적이고 부패한 정치가와 폭력배들, 바람둥이와 인신매매범들, 사기꾼과 배신자들, 고리대금업의 금융업자와 매관매직의 교황 및 고위성직자들이다.

그리고 천국으로 보낸 인물들로서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성 프란체스코, 신의 농부 도미니쿠스, 율법주석가 엔리코 디 수사, 수도원장 우고, 여러 스콜라 학사들, 그리고 로마법대전을 만든 비잔틴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명판결을 내렸다는 솔로몬왕 같은 법률가들이다.

서울대 법대 안경환 교수가 말했다.

“단테처럼 법률가들을 천당으로 보내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극히 드문 일이며, 단테의 신곡은 ‘神曲’이 아니라 오히려 ‘法曲’이다.”

‘바티칸의 금서’ 1호인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가 말했다.

“나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천국보다 지옥에 더 가고 싶다. 왜냐하면 천국이 주변환경이야 훨씬 좋겠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재미있는 구라들(정치가들)은 지옥에 다 모여서 신나게 떠들고 있을 테니까!”

(프리모 레비, 《살아남은 자의 아픔》, 이산하 편역, 노마드북스, 2011, 30면)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 이탈리아의 작가이자 화학자인 레비는 1943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끌려갑니다. 1945년 10월, 평균생존기간이 3개월인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집으로 돌아온 그는, 그러나 1987년 4월 11일 돌연, 투신자살합니다.

 

[더 읽기]

 

생각하지 않은 죄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바람이 평원을 가로질러 자유로이 불어오고

거센 파도가 끊임없이 해변으로 몰아친다.

인간은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땅은 그에게 꽃과 열매를 선사한다.

인간은 고된 노동과 기쁨 속에 살아가고

희망과 공포 속에서 더 고귀한 자손들을 남긴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의 저승사자인 그대가 나타났고

짐승처럼 우리들은 죽음의 쇠사슬에 묶여버렸다.

우리가 만난다면 그대는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여전히 신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겠는가?

그럼 어느 신에게 말인가?

또 기꺼이 무덤에라도 뛰어들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미완성의 작품을 아쉬워하는 예술가들처럼

아직 살아있는 1300만의 생명에 대해 통탄이라도 할 텐가?

-죽음의 화신이여

 

우리는 그대에게 결코 한 순간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며

그 어느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장수하기를 바란다.

단지 500만 년 동안만 불면으로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가스실에서 숨져간 모든 이들의 신음과 비명소리가

매일 밤 그대를 방문해 강한 위롤르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프리모 레비, 《살아남은 자의 아픔》, 이산하 편역, 노마드북스, 2011, 31-32면)

 

이산하 시인의 해설입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 총책임자였다. 종전 후 1급 국제전범으로 수배되자 아르헨티나로 도피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15년간의 끈질긴 추적으로 1960년에 체포된 그는 예루살렘 나치전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62년에 처형되었다.

법정 최후진술에서 아이히만이 말했다.

“나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며, 저 신 앞에서는 유죄지만 이 법 앞에서는 무죄다.”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며 말했다.

“의심하지 않은 죄, 생각하지 않은 죄, 그리고 행동하지 않은 죄......그것이 피고의 진짜 죄다.”

미국 ‘뉴요크’ 특파원으로 참관한 방청석의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했다.

“자기 생각 없이 남의 생각대로 산 것과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가장 큰 죄다.”

이날, 프리모 레비는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관하려다 끝내 가지 않고, 혼자 조용히 이 시를 썼다.

(프리모 레비, 《살아남은 자의 아픔》, 이산하 편역, 노마드북스, 2011, 33면)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이히만, 나치전범 재판과정을 통해 드러난 그의 모습은 몸과 마음 속속들이 살인마, 악마, 피에 굶주린 흡혈귀가 아닌 “근면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391면)의 인간이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통해〈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악이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음”을 아렌트는 우리에게 말하려고 했습니다. 잘못된 일을 저지른 고위직 공무원들이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 오직 지시에 따른다’라며 자신들을 옹호하는 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맥락의 일들입니다.

〈악의 평범성〉, 아이히만의 경우를 제대로 알고 싶은 분들은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달린 한나 아렌트의《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일반인을 위해 신문에 분재한 아이히만 재판 참관기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다음은 이 책의 본문 마지막, 아이히만이 교수형을 당하는 장면을 옮긴 글입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아주 근엄한 태도로 교수대로 걸어갔다. 그는 붉은 포도주 한 병을 요구했고 그 절반을 마셨다. 그는 그에게 성서를 읽어주겠다고 제안한 개신교 목사 윌리엄 헐 목사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는 두 시간밖에 더 살 수 없기 때문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감방에서 형장에 이르는 50야드를 조용히 그리고 꼿꼿이 걸어갔다. 간수들이 그의 발목과 무릎을 묶자 그는 간수들에게 헐렁하게 묶어서 자신이 똑바로 설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검은색 두건을 머리에 쓰겠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나는 필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는 완전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말로 남긴 기괴한 어리석음보다도 이 점을 더 분명히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을 믿는 자라고 분명히 진술하면서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며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일반적인 나치스 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는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348-349면)

 

아우슈비츠의 소녀

 

타인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 속에 함께 산다.

어린 폼페이의 소녀여!

하늘이 잿빛으로 변하며 세상이 무너질 때

다시 자궁 속으로 회귀라도 하듯

넌 뼈만 남을 때까지 어머니의 몸을 끌어안고 있구나.

검은 화산재는 노래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던

너의 집 창문으로 일제히 침투했다.

그 재는 2천년의 세월이 흘러

가냘픈 소녀들의 육체를 영원히 덮어버렸다.

이처럼 넌 지금도 우리와 함께

회색 담장 속에 갇혀 끝없이 고통 받고 있구나.

 

내일이면 굴뚝의 검은 연기로 피어오를지도 모를

도축장 같은 수용소에 갇혀 날마다 몰래 일기를 쓴

13살 어린 아우슈비츠의 소녀여!

가녀린 그대 가슴 속에는 검은 재만 흩날릴 뿐

이미 안네의 짧은 생애는 일기장에서 끝나버렸구나.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리틀 보이’의 검은 불바다에

살점 하나 없이 완벽하게 사라져버린

어린 히로시마의 소녀여!

네 영혼이 아직도 검은 구름처럼 떠돌며 울부짖는구나.

더러운 자본의 권력, 끊임없는 탐욕의 침략자들

지금도 살육의 광풍을 은밀히 준비하는 전쟁광들이여

그대들은 그동안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고통들만으로는 정녕 부족하단 말인가.

한 개의 손가락으로 폭탄단추를 누르기 전에

잠깐만, 아주 잠깐만 멈추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타인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다.

(프리모 레비, 《살아남은 자의 아픔》, 이산하 편역, 노마드북스, 2011, 35-36면)

 

우리 인간들에게 큰 고통을 안긴 세 가지 재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폼페이 화산 폭발, 아우슈비츠 대학살, 히로시마 원폭 투하. 하나는 자연이 내린 재앙이고 둘은 인간들이 저지른 재앙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들, 하나는 우리 편이고 하나는 적의 편입니다. 자연/인간, 너/나 구분 없이 이 세상의 모두가, 모든 것이 인간에게 재앙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고통〉.

살면서 저절로 깨우치게 된 이치가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 온갖 만물 가운데 나와 상관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이치입니다. 인간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살고 있는데, 언젠가부터 알게 됐습니다. 지구상에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내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지구 자체가, 자유롭지 못하면 내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고통 받는 사람이 있으면 내 행복은 참된 행복이 아닙니다.

타인의 행복이 내 행복입니다.

“타인의 고통은 내 고통”입니다.

타인의 자유가 내 자유입니다.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렸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