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시를 줍다 - 양성우 시화집
양성우 시, 강연균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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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랑에게

 

우연이라도 너를 만나야겠다.

무척 오랜 뒤에도 잊을 수 없는 한 사람.

만나서 두 팔로 너를 힘껏 껴안고 싶다.

그때는 네가 귀 기울여 듣고자 해도

내 입으로는 한마디 말하지 않으리.

내가 어찌 마음의 어둔 길을 걸었는지를.

그래도 내 안에 가득히 설움이 차오르면

눈물 대신 겉으로는 환하게 웃어야지.

너는 내 영혼의 변하지 않는 긴 그림자.

너와 나의 하루가 아무리 고단해도

사랑만 있으면 사는 것이 아니던가.

어느 곳에서라도 몹시 그리운 너를 만나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다.

(양성우, 《길에서 시를 줍다》,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26면)

 

“이런저런 기로에 서면 ‘그’는 어느 길을 선택할까 짐작해봤습니다. 이해관계에 빠져 허우적댈 때는 ‘그’에게 부끄럽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잘 살아온 구석이 조금은 있다면 ‘그’가 잘 이끌어준 덕분입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를 만나 고맙다는 말을 건네지 않고 죽을 수는 없다고 믿었는데, 삶이라는 게 ‘살아갈 나날’이 아니라 ‘남아있는 나날’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조바심이 엄습했습니다. 억울하기도 하고 복받치기도 했지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머리를 무릎 사이에 깊이 묻었다 들어 두리번거리니 굳이 말을 건네거나 나누지 않아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멀리서라도 그윽이, 하염없이 바라볼 수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천 년 전부터 잊은 적이 없는, 천 년 후에도 잊을 리 없는 그의 이름은 〈옛사랑〉입니다.”

[더 읽기]

 

2007년 〈랜덤하우스코리아〉의 시화집 시리즈의 한 권으로 출간된 《길에서 시를 줍다》는 그 시리즈의 다른 시집들과는 달리 품절되지 않고 아직은 살아있는 시집입니다. 김남조, 도종환, 정호승 등 다른 시인들은 ‘시선집’을 냈는데 양성우 시인은 ‘신작시집’을 출간했습니다. 이 시집은 이전에 낸 시집들과는 달리 ‘사랑’을 주제로 한 시들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옛사랑에게〉,

“우연이라도 너를 만나야겠다”로 시작해 “어느 곳에서라도 몹시 그리운 너를 만나/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다”로 끝나는 이 시는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시작과 끝에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 ‘그리움’에 대한 시인의 반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화자는 ‘그리움’을 이 시의 처음과 끝에서 〈만나다〉(‘만나야겠다’, ‘만나’)로 드러냅니다. 처음에는 우연이든 고의든 어쨌든 만나야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하지만, 마지막에서는 만나겠다는 의지는 약해지고 만나고 싶다는 희망사항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만남의 구체적인 방식도 〈바라보다〉로 물러섭니다.

첫 행의 ‘만나야겠다’가 아직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그리움’을 만나는 방식이라면 마지막 행, ‘바라보고 싶다’로 바뀐 〈만남의 풍경〉은 ‘여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그리움’을 만나는 방식입니다.

 

첫 행 이전에 생략된 부분은 둘째 행에서 마지막 두 행 사이를 채우고 있는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일 겁니다. 어떻게든 만나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느냐, 너에 대한 그리움으로 내 삶은 내내 폐허였다, 보상하라 등등. ‘옛사랑’에게 자기가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확인시키는 허망한 일로 밤을 지새우겠지요.

 

‘여생’을 사는 사람의 모습인 첫 행 다음의 풍경은, 시행을 따라 읽으면 이렇습니다. 평생을 잊지 못하지만 단지 한 번 껴안아 봤으면 좋겠다(이뤄지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 살았느냐 묻는다 해도 입을 열지 않겠다, 쏟아져 나올 말들은 온통 ‘그리움’일 테니까, 힘들 게 살았다 복받친다고 왜 그걸 그대에게 이야기하며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겠느냐, 그냥 웃을 뿐. 그리고 바라볼 뿐.

 

첫사랑, 그대를 향한 사랑, ‘그리움’과 ‘서러움’이 다이지만, 그 ‘그리움’과 ‘서러움’ 덕분에 내가 잘 살아왔음을 시인/화자는 깨달은 모양입니다. 60대 중반에.

 

〈겨울공화국〉이나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으로 양성우 시인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오늘 나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옛사랑에게〉는 의외일 수 있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사랑’이 남녀 간의 사랑의 맥락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달관까지 내닫지는 않았어도 벼린 맛은 한결 덜합니다.

 

“여보게

우리들이 만일 게으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과녁으로 나란히 서서

사나운 자의 총 끝에 쓰러지거나

쓰러지며 쓰러지며 부르짖어야 할 걸세

 

......

여보게

우리들의 슬픈 겨울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컫게 하고,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한사코 온 몸을 버둥거려야

하지 않은가

여보게”

(〈겨울공화국〉 마지막 부분)

 

뭉클하게, 뭉툭하게 후비는, 1980년대의 그의 시집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이런 시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시인의 이런 변화, ‘있어야 함’ 쪽에서 ‘있음’ 쪽으로 더 가깝게 자리를 옮긴 게 세상을 보는 그의 눈길이 달라져서는 아닙니다. 그의 시에서 차지하는 ‘그리움’의 크기가 커졌고 시인이 ‘벼린 맛’ 뒤에 숨겨 놓았던 ‘따뜻함’을 편하게 겉으로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겨울공화국〉의 시혼이 세월을 지나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있는지는 다음 차례입니다.

 

다음 두 시는 이 시집에서 일부러 뽑은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시입니다만 이 시 들도 남녀 간의 사랑의 맥락에 갇혀있지는 않습니다. 해설은 군더더기일 뿐이겠습니다.

행복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랑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을지라도

티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랑하다가 죽어서 전설이 되는 사람은

더욱 행복하다.

언제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사람은.

오늘은 두꺼운 얼음 위에 맨살로 누워도

사랑을 찾아서 어디론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양성우, 《길에서 시를 줍다》,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20면)

 

죽도록 너를 사랑하다가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시작과 끝이 없는 것.

네 안에서 고스란히 영혼을 태운 뒤에는

이름 없는 들꽃 한 송이로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어도

뜨거운 내 마음을 아무도 누르지 못하리.

죽도록 너를 사랑하다가

어느 날 아침 내 몸이 안개처럼 흩어져버릴지라도

뜨겁고 붉은 내 마음을 아무도 누르지 못하리.

그래도 너와 나의 운명의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니.

언젠가는 아득히 홀로 가는 먼 길을 어찌하리.

사랑한다는 아픔이여.

(양성우, 《길에서 시를 줍다》,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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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침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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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대목]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게 누구요? 고요한 이 밤에 한숨을 쉬는 자가?”

“궁을 도망쳐서 음악을 찾는 이요.”......

“음악에서 무엇을 찾으시오?”

“회한과 눈물을 찾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일세. 음악은 말이 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거라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전혀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음악이 왕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는가?”

“그건 신을 위해 있던 것임을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자넨 틀렸네. 신은 말하지 않는가.”

“귀를 위한 것?”

“내가 말 할 수 없는 그것이 귀를 위한 것은 아니네.”

“황금을 위한?”

“아니, 황금은 아무 것도 못 듣지.”

“영광?”

“아니네. 그건 사용된 이름들일 뿐이네.”

“침묵?”

“그건 말의 반대말일 뿐이지.”

“경쟁하는 음악가?”

“아니.”

“사랑?”

“아니.”

“사랑에 대한 회한?”

“아니.”

“단념?”

“아니, 아니야.”

“보이지 않는 이에게 바치는 고프레를 위한 겁니까?”

“그것도 아니네. 고프레란 게 뭔가? 그건 보이지 않나. 맛이 나고. 그건 먹는 거 아닌가. 그건 아무 것도 아니네.”

“더는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제 생각엔 죽은 자들에게 한 잔은 남겨 놓아야......”

“자네 자신도 태우게나.”

‘말에 버림 받은 자들을 위한 물 마실 수 있는 작은 곳. 아이들의 그림자를 위하여. 제화공의 망치질을 위하여. 유아기 이전의 상태들을 위하여. 숨 쉬지 않고 있었을 때. 빛 없이 있었을 때.“

얼마 후 음악가의 그 늙고 뻣뻣한 얼굴 위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자신의 바싹 야윈 손으로 마레의 포동포동한 손을 잡았다.

“자넨 방금 내 탄식하는 소리를 들었겠지? 나는 곧 죽네. 내 예술도 함께. 내 닭들과 거위들만 날 아쉬워하겠지. 죽은 자들을 깨울 아리아 하나 아니 두 곡을 자네에게 맡기려네. 자!”

(파스칼 키냐르, 《세상의 모든 아침》, 류재화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3, 112/118-120면. 번역은 부분 수정)

 

[북 리뷰]

 

“1650년 봄, 생트 콜롱브 부인이 죽었다.”로 시작해 “1689년, 23일째 되던 날 밤,......마레 씨가 베르사유로 돌아간 것은 새벽녘이 되어서였다.”로 끝나는 이 소설은 사라진 〈사랑의 원형〉을 결코 놓아주지 않는, 애도를 넘어 되살려내는 한 예술가, 생트 콜롱브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내가 꿈꾸는 완전한 사랑은《롤리타》(나보코프)의 험버트가 맛본 “첫 눈에 반한 사랑이고 치명적인 사랑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이지만 험버트의 경우는 ‘서로 동시에’ 한 사랑이 아니라 일방적인, 짝사랑이었기 때문에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파스칼 키냐르도 “첫 눈에 서로 강렬한 사랑에 빠지는”(송의경과의 인터뷰) 사랑을 꿈꾸고 그려내는 데 성공하지만 막상 작가 자신은 이런 사랑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키냐르는 ‘두 사람이 동시에 첫 눈에 반해 강렬한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 모두 영원히 변하지 않고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을 〈사랑의 원형〉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키냐르는 《세상의 모든 아침》에서 삶과 죽음을 넘어서 사랑하는 생트 콜롱브 부부의 모습으로 이를 재현해내고 있습니다(이보다는 조금 느슨하게 이를 재현하는 게 끝까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로마의 테라스》의 몸므일 것입니다).

 

나는 ‘전형’이 아니라 ‘원형’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아침》에서 키냐르가 보여주는 것은 ‘전형’을 창조해내는 과정이 아니라 ‘원형’을 되살려내는 과정입니다. 마농 레스코, 《춘희》의 마르그리트 그리고 칼멘, 이들을 ‘전형적인 여인상’이라고 하지 ‘원형적인 여인상’이라고는 하지 않는다는 점을 떠올립시다. 생트 콜롱브, 몸므 모두 첫사랑을 잊지 못합니다. 키냐르에게는 그들의 첫사랑이 그들의 사랑의 ‘원형’입니다.

아내가 죽은 뒤 생트 콜롱브는 장딴지에 대지 않고 양 무릎 사이에 놓는 방식으로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합니다. 생트 콜롱브는 이미 왕실 실내악단 수석 악단장이 된 제자 마랭 마레의 물음에 답합니다. 음악은 신이나 왕을 위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황금, 영광, 사랑, 사랑의 회한 아니 그 무엇을 위한 게 아니라고.

생트 콜롱브는 아내가 죽은 뒤 2년간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연습에 몰두합니다. 정원에 뽕나무로 오두막을 지은 다음에는 연습이 집안 일 무엇도 방해할 일이 없어져 밤낮 가리지 않고 더욱 더 음악에 몰두합니다. 궁정으로 오라는 권유도 뿌리친 채 처박혀 연주만 해대는 이 은둔자의 모습이 딸들의 눈에는 정상적으로 보일 리 없습니다.

그는 왕궁에서 한 자리 차지한 마랭 마레에게 말합니다.

 

내 딸을 자네에게 줄지 안 줄지는 모르겠네. 왕은 당신의 쾌락을 감싸주는 자네의 멜로디를 좋아하시겠지. 방이 백 개나 되는 거대한 돌 궁정에서 예술을 하든, 뽕나무 속 흔들리는 오두막에서 예술을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네. 내게는 예술 그 이상의 무엇이 있지. 손가락 그 이상의 뭔가가 말이야. 귀 이상의 뭔가가. 창작 그 이상의 뭔가가 말일세. 나는 열정적인 삶을 보내고 있네.”

“열정적인 삶을 사신다고요?” 마랭 마레가 말했다.

“아버지가 열정적인 삶을 보내신다고요?”

마들렌과 마레는 동시에 말했고, 동시에 늙은 음악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열정적인 삶une vie passionnée〉이라니. 바깥출입도 없이 오두막에 틀어박혀 연주만 해대는 궁상맞은 삶이 ‘열정적인 삶’이라니. 다시 생트 콜롱브입니다.

 

“자네는 눈에 보이는 왕을 즐겁게 하고 있지. 남을 즐겁게 하는 일, 그건 나하고는 어울리지 않네. 나는 소리쳐 부르지. 그래 나는 손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소리쳐 부르네.”

 

'Je hèle avec ma main une chose invisible.'

동사〈héler〉는 ‘멀리서 큰 소리로 부른다, 경우에 따라서는 확성기를 사용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손 연주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큰 소리로 부른다.”

 

손 연주를 통해, “하나의 이름과 기쁨들을 기억하며 지어내는 것은 물, 물풀, 쑥, 살아있는 작은 애벌레들 같은 헌물”입니다. 여전히 스승의 말씀이 수수께끼이기만 한 마레는 묻습니다.

 

“선생님의 물풀, 애벌레 속 어디에 음악이 있는데요?”

“활을 켤 때 내가 찢는 것은 살아있는 내 작은 심장조각이네. 내가 하는 것, 그건 하루도 쉬는 날 없는, 평생 동안의 생활방식일 뿐이네. 내 운명을 완성하는 거지.”

 

생트 콜롱브에게 음악은 누구를 또는 무엇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냥 음악이며 삶입니다. instrument de musique/악기. 음악을 위한 도구라는 말이 키냐르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비올라 다 감바는 음악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비올라 다 감바이며 음악입니다. 생트 콜롱브가 무릎 사이에 비올라 다 감바를 놓고 연주하는 모습에서 나는 클림트의 〈입맞춤〉을 떠올립니다. 그 모습은 서로 강렬하게 사랑하는 두 사람이 포옹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거기에서 내가 보는 것은 두 존재가 아니라 한 존재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사랑의 원형’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불러내 형상화 하고 그 이면으로 녹아내렸습니다.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하는 생트 콜롱브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연주자와 악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은 하나의 음악이 돼 ‘사랑의 원형’을 불러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음악이 바로 ‘사랑의 원형’입니다.

〈회한의 무덤〉을 연주할 때 “악보가 펼쳐진, 밝은 푸른 색 천이 덮인 탁자 위에 그는 짚으로 싼 포도주 단지, 다리가 달린 포도주 잔과 둥글게 말린 고프레 몇 개가 담긴 주석 접시를 놓”았습니다. 포도주와 고프레 과자, 사랑의 원형이 불려와 형상화 되는 장소의 소품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사랑의 원형’.

 

그[생트 콜롱브]는 악보를 참조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손은 악기의 키를 자유자재로 옮겨 다녔고, 그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음이 서서히 올라갈 때, 문 옆에 매우 창백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의 연주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아무 말 없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그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더니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녀는 생트 콜롱브의 악보대를 천천히 돌았다. 그리고 탁자와 작은 포도주 병 바로 옆 구석에 있던 궤짝 위에 앉아 그의 연주를 들었다.

그의 아내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가 한 곡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더 이상 거기 없었다. 그는 비올라 다 감바를 놓았다. 짚으로 싼 포도주 단지 옆에 있는 주석 접시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그는 포도주 잔이 반쯤 비워져 있고, 그 옆에 있던 고프레가 반쯤 갉아 먹혀 있는 것을 보았다.

 

생트 콜롱브는 “손 연주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소리쳐 부른다”며 음악이 곧 ‘사랑의 원형’을 형상화 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 장면이 ‘사랑의 원형’을 불러낸 현장입니다. 죽은 아내가 돌아와 포도주와 고프레 과자를 먹었습니다. 이 짧은 작품 안에서 아내는 수도 없이 찾아옵니다. 언제나 연주할 때이기만 하지만. 왜 더 자주 오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기도 합니다. “저도 모르겠어요. 당신의 연주가 날 감동시키니까. 그래서 온 걸 거예요. 당신이 친절하게도 마실 것과 조금씩 갉아먹을 과자를 주기도 하고요.” 생트 콜롱브는 화가인 친구 보쟁에게 부탁해 포도주 잔과 고프레 과자가 있는 그림을 하나 그리게 해 연주할 때면 탁자 위에 놓습니다. 〈제15장〉은 망자의 세계에서 불려나온 아내와의 긴 대화로 채워지기도 합니다.

나는 ‘사랑의 원형’을 형상화 하느라 만들어 낸 이 장면들, 포도주도 마시고 고프레 과자도 먹고 가는 아내와의 만남, 아내가 죽은 지 12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차갑지 않은 침대 등의 에피소드를 환상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들은 생트 콜롱브가 겪는 일이 아니라 비올라 다 감바와 생트 콜롱브가 하나가 돼 만들어 낸 음악이 보여주는 형상을 키냐르가 언어화 한 것으로 읽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라진 ‘원형’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한

 

“세상의 모든 아침은 〈새롭게〉다시 온다, 그것도 매일.”

 

이라고 고쳐 써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살을 파고드는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첫사랑’을 잊고 살아온 이들에게는 망각의 세계에 팽개친 첫사랑을 기억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키냐르를 시작으로 음악, 더 나아가 문학 그리고 예술과 〈원형의 형상화〉는 더 깊이 파볼만한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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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밤 시로 쓰는 자서전 1
이하석 지음 / 시와반시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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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활주로

 

활주로는 군데군데 금이 가, 풀들

솟아오르고, 나무도 없는 넓은 아스팔트에는

흰 페인트로 횡단로 그어져 있다. 구겨진 표지판 밑

그인 화살표 이지러진 채, 무한한 곳

가리키게 놓아 두고.

 

방독면 부서져 활주로변 풀덤불 속에

누워 있다. 쥐들 그 속 들락거리고

개스처럼 이따금 먼지 덮인다. 완강한 철조망에 싸여

부서진 총기와 방독면은 부패되어 간다.

풀뿌리가 그것들 더듬고 흙 속으로 당기며.

타임지와 팔말 담배갑과 은종이들은 바래어

바람에 날아가기도 하고, 철조망에 걸려

찢어지기도 한다. 구름처럼

우울한 얼굴을 한 채.

 

타이어 조각들의 구멍 속으로

하늘은 노오랗다. 마지막 비행기가 문득

끌고 가 버린 하늘.

(이하석, 《환한 밤》, 시와반시, 2012, 14-15면)

 

“첫 시집 《투명한 속》(1980)에 실린 이 시는 이하석 시인의 초기시 경향을 잘 드러내는 시이며 시인이 많이 아끼는 시인 듯합니다. 1997년에 나온 시선집 《고추잠자리》, 2012년에 나온 ‘시로 쓰는 자서전’ 《환한 밤》모두, 이 시가 처음을 장식합니다. 이하석은, 당시까지만 해도 시의 소재로 낯설었던 ‘버려진 못이나 깡통 · 비닐 · 유리 조각 · 나사 · 총기’를 시 속에 끌어들여〈광물학적 상상력〉을 시의 영역에 접목시킨 시인으로 자리 잡습니다. 폐쇄된 활주로, 흰 페인트 줄이 남아있는 아스팔트는 금이 갔으며 풀이 무성합니다. 구겨진 표지판. 활주로 변 풀덤불, 먼지를 뒤집어쓴, 쥐가 들락날락하는 부서진 방독면, 부서진 총기. 타임지, 팔말 담뱃갑, 바랜 은종이 휘날리다 걸려있는 철조망, 타이어 조각들. 닫힌 이미지만 가득한 이 폐허의 공간을 그러나 시인은 자연 쪽으로 열어놓습니다. 표지판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무한한 곳〉과 마지막 비행기가 끌고 간 〈하늘〉이라는 열린 이미지를 마련함으로써.”

 

[더 읽기]

 

이하석 시인이 첫 시집 《투명한 속》이 나올 당시, 시 만들기의 원칙으로 삼은 것은 “첫째, 풍경 또는 사람의 정면보다 뒤란이나 이면을 그리며, 둘째, 사물과 나는 직접 만나지 않고 카메라의 눈을 통해 만나며, 셋째는 두 번째와 연관이 깊은데, 나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억제하고 오직 보이는 것만을 정밀하게 묘사해낸다는 것”이었습니다(최두석∥나희덕 엮음, 《나의 대표시를 말한다》, 도서출판 b, 2012, 53면).

이 원칙을 지키려면 이 시는 카메라에 담은 ‘전쟁의 폐허’에 나뒹구는 〈잔해들〉하나하나를 언어로 묘사하는데 그쳐야 했습니다. ‘무한한 곳’과 ‘하늘’의 이미지는 끌어들이지 말아야 했지요. 시인이 이를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어쨌든 폐허의 풍경을 폐허 그 자체로 보여주려고 했는데, 그렇게 그려내 보니, 너무 삭막하고 답답했다”고 하면서 ‘무한한 곳’과 ‘하늘’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던 연유를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로 쓰는 자서전’ 《환한 밤》, 〈시인의 말〉참조).

시인은, 시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보이는 것만을 정밀하게 묘사하고 싶다고 했지만 실은 이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시인으로서의 그의 역량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의 세계관이 그 원칙과는 애초부터 맞지 않았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전쟁의 폐허, 그 잔해를 묘사하는〈부서진 활주로〉말고 그의 초기시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산업화의 뒤란, 그 잔해의 정밀한 묘사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들도 정밀한 묘사에 그치지 않고 〈부서진 활주로〉처럼 한 단계 더 나갑니다.

 

뒤쪽 풍경 1

 

폐차장 뒷길, 석양은 내던져진 유리 조각 속에서

부서지고, 풀들은 유리를 통해 살기를 느낀다.

밤이 오고 공기 중에 떠도는 물방울들

차가운 쇠 표면에 엉겨 반짝인다,

어둠 속으로 투명한 속을 열어놓으며

일부는 제 무게에 못 이겨 흘러내리고

흙 속에 스며들어 풀뿌리에 닿는다,

붉은 녹과 함께 흥건한 녹물이 되어

일부는 어둠속으로 증발해 버린다.

땅 속에 깃든 쇠조각들 풀뿌리의 길을 막고

어느덧 풀뿌리에 엉켜 혼곤해진다.

신문지 위 몇 개의 사건들을 덮는 풀, 쇠의 길을 돌아서

아늑하게, 차차 완강하게 쇠를 잠재우며

풀들은 또 다른 이슬의 반짝임 쪽으로 뻗어나간다.

(이하석, 《환한 밤》, 시와반시, 2012, 20면)

 

첫 시집 《투명한 속》에 실린 시입니다.

 

폐차장, 유리 조각, 쇠, 녹물, 신문지들을 이미지화함으로써 산업화의 그림자를 드러내고 있는 시인데 이 시에서도 시인은 자기가 만든 시 만드는 원칙에서 벗어나 시인의 감정을 개입시키고 있습니다.

 

밤이슬이 물방울로 내려 ‘쇠’ 표면에 엉겨 ‘반짝이다’ 흘러서 흙속으로 스며들어 풀뿌리에 ‘닿습니다’. 흙속의 쇠성분과 만난 스며든 물기는 ‘녹물’이 돼 풀뿌리의 뻗어남을 방해하는 듯하나 풀뿌리의 뻗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풀뿌리에 엉켜 혼곤해’집니다. 결국 풀은 〈아늑하게, 차차 완강하게〉쇠의 힘을 잠재웁니다.

 

시인은 ‘산업화의 그림자’(폐차장의 쇳조각)를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여기에 ‘자연의 위대한 복원력’(쇠를 잠재우는 풀)을 대비시킵니다. ‘어두운 지금-여기’의 내일에 ‘밝은 전망’을 자리잡게 합니다.

 

시의 마지막 행입니다.

 

‘풀들은 또 다른 이슬의 반짝임 쪽으로 뻗어나간다.’

 

시인에게 보이는 지금-여기, 산업화의 뒤란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있습니다. 시인은 이 시에서도 폐허의 잔해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데 성공하고 있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아마도 자연의 위대함을 믿는 시인은 애초부터 비관주의자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황폐한 지금-여기를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막힌 출구를 견디지 못하고 밝은 전망 쪽을 향한 틈을 열어놓은 까닭일 겁니다.

 

다음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투명한 속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쇳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다닐 때,

버려진 아무 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 부스러기 흙 속에 깃들여 더욱 투명해지고

더 많은 것들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들어간다. 비로소 쇳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

(이하석, 《환한 밤》, 시와반시, 2012, 16면)

 

첫 연에서는 산업화의 뒤란인 ‘유리 부스러기’가 그 투명한 속성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로 다른 산업화의 잔해들, 먼지, 녹물, 얼룩진 땅, 쇳조각들을 밝은 전망의 기운으로 품어주면서 스스로는 물론 다른 잔해들에게까지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둘째 연도 마찬가지로 껌종이, 신문지, 비닐, 연탄재로 가득한 골짜기로 산업화의 뒤란을 이미지화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시인은 밝은 전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제비꽃이 흠뻑 먹은 봄기운은 유리 속, 하늘 속, 바위 속은 물론 쇳조각까지, 흙 속까지 파고들어 환하게 비쳐줍니다.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려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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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침묵 열린책들 세계문학 13
베르코르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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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대목]

 

“[친구는] 미친 사람처럼 화를 내다가 자지러지게 웃어 댔죠. 때로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외쳤습니다. 〈그건 독毒일세! 짐승에게서는 독을 비워 내야만 하네!〉또 때로는 검지로 내 배를 쿡쿡 찌르며 빈정거렸어요. 〈그들은 지금 엄청난 두려움에 빠져 있네. 하하! 주머니를 털릴까 봐. 배를 주릴까 봐 두려워하고 있지. 그들의 산업과 장사 때문에 말이야! 그들은 오로지 그 생각뿐이지! 몇 안 되는 놈들, 우리는 그들을 살살 달래 잠재울 걸세. 하하하!......그건 아주 쉬운 일이 될 거야!〉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웃어댔습니다. 〈우린 그들의 영혼을 콩 한 접시와 맞바꿀 거야!〉”

베르너가 숨을 들이쉬었다.

“저는 말했습니다. 〈자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헤아려 봤나? 진지하게 헤아려 봤어?〉그러자 그가 대답했죠. 〈그런 것으로 우리가 주눅 들 것이라 생각하나? 우리의 냉철함은 차원이 달라!〉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럼 그 영혼의 무덤은? 그 무덤을 봉인할 작정인가, 영원히?〉그는 대답했죠. 〈이건 생사가 걸린 일이야. 사실 정복하기 위해서는 힘으로 충분하네. 하지만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렇지 않지. 지배하는 데에는 군대가 쓸모없다는 걸 우린 잘 알고 있네.〉전 외쳤죠. 〈지배하기 위해 정신을 파괴하겠다고? 그건 절대 안 돼!〉그가 대답했습니다. 〈정신은 결코 죽지 않아. 그보다 더한 일을 겪어도 자신의 유해에서 다시 태어나지. 우리는 천년을 염두에 두고 건설해야만 하네. 그러려면 우선 파괴해야만 해.〉전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그의 맑은 눈 깊은 곳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래요. 그의 말은 진실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끔찍했죠.”

(베르코르, 《바다의 침묵》, 이상해 옮김, 열린책들, 2009, 71-72면)

 

[북 리뷰]

 

“다만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이 있을 따름이다. 나쁜 소설이란 독자에게 아첨하여 그의 환심을 사려는 소설이며, 좋은 소설이란 독자에 대한 요청이며 신뢰이다.”(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옮김, 민음사, 1998, 89면)

 

베르코르Vercors의 《바다의 침묵》Le Silence de la mer은 내 젊은 날의 초입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69년 대학에 들어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바다의 침묵의 프랑스어본(한 면에 2페이지씩 인쇄된 복사물, 제본도 안 돼 있었음)이 내게 들어왔고, 겨울방학이었을 겁니다, 며칠 밤을 새가며 번역한 기억이 있습니다. 분량이 짧아 대들었던 것 같습니다(200자 원고지 160장 안팎). 이 작품의 번역은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춘조사春潮社에서 오증자 선생님 번역으로 1960년에 출간되었고 내가 구한 것은 1966년 판 2쇄였습니다. 그리고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제 43권 《불란서단편선》(1964)에도 박은수 선생님 번역으로 실려 있었습니다. 직접 번역을 하기 전에 번역본을 먼저 읽은 것 같습니다. 외국어 공부에는 번역을 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선배의 말에 번역을 해볼 마음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의 번역과 대조해보니 엉망진창 번역이었지만 그럼에도 박은수 선생님의 번역에 30군데도 넘게 만족스럽지 못한 데가 있음을 확인했고 그렇게 잘 읽히고 진한 감동을 준 오증자 선생님의 번역은 유려한 의역으로 선생님의 필력을 확인한 기회였다는 게 훗날의 기억입니다.

 

 

 

《바다의 침묵》.

1942년, 독일 나치에 점령당한 프랑스의 어느 마을, 독일군 장교 베르너 폰 에브레나크는 한 노인과 질녀가 사는 집 이층에 머물게 됩니다. 군 정복이 아닌 사복으로 갈아입은 베르너는 매일 저녁 추위를 핑계로 아래층에 내려와 난롯가에서 프랑스를 위한 경배를 이어갑니다. 프랑스의 겨울에 대해서, 특히 프랑스의 문학에 대해서.

그리고 18세기 장-자크 루소가 언젠가 코르시카 섬에서 찬란한 태양이 떠올라 유럽 전체를 밝힐 것이라고 예언한 이후 처음일까, 베르너는 독일과 프랑스가 행복하게 결혼하면 유럽 전역을 밝힐 태양이 떠오를 것이란 확신에 행복해 합니다. 독일과 프랑스를 〈미녀와 야수〉에 빗대고 그 해피엔드까지 가져옵니다. 노인과 질녀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파리로 가 나치대원인 친구를 만나고 온 베르너는 나치의 본심이 무엇인지 알고 절망합니다. 나치는 프랑스와 결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를 ‘정복’하려는 것도 아니고 ‘지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정복하기 위해서는 군대만 있으면 되지만 지배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영혼과 정신을 파괴해야 합니다. 나치는 지금 그 일을 실행해가는 중이었습니다.

  

근무지로 돌아왔으나 노인과 질녀를 피하던 베르너, 사흘만에 그들 앞에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전과 다르게 문을 두드립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린 사람의 느리고 또박또박한 노크, 단호하고 차분한 세 번의 노크”, 대답이 없자 다시 “약하고 빠르게 단 두 번”의 노크.. 노인은 대답합니다. “들어오시오, 선생.”

 

베르너는 그 집에 처음 왔을 때처럼 군 정복을 입고 그들 앞에 나타납니다.

파리 다녀온 일을 이야기한 후 전출을 자청, 명령이 떨어져 다음날 새 근무지로 떠날 것을 알립니다.

 

“〈지옥을 향해〉

그는 팔을 들어 동쪽을, 미래의 풀들이 시체를 먹고 자랄 광활한 평원을 향해 뻗었다.

나[노인]은 생각했다. 〈저렇게 굴복하고 마는군. 그들이 할 줄 아는 건 그게 다야. 그들은 모두 굴복하게 해. 저 사람마저도.〉”

 

베르너가 자원한 동부전선은 러시아와 맹렬한 전투를 벌이던 지역으로 그곳을 자원한다는 것은 죽으러간다는 뜻입니다.

 

방을 나서며 여느 때처럼 ‘좋은 밤 되시기 바랍니다’란 밤 인사를 한 베르너가 오늘은 그냥 가지를 않고 질녀에게 영원한 작별인사를 합니다. ‘아듀’, 그리고 한참 후 질녀가 답합니다. ‘아듀’.

 

“폰 에브레나크의 얼굴과 온몸이 뜨거운 목욕을 즐기고 난 것처럼 부드럽게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웃었다. 그리하여 내가 간직하게 될 그의 마지막 이미지는 미소를 머금은 것이 되었다. 그의 발소리가 집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튿날, 내가 아침 우유를 마시러 내려오기 전 그는 떠났다. 조카는 여느 날처럼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조카는 아무 말 없이 시중을 들었다. 아무 말 없이 우리는 우유를 마셨다. 밖에는 안개 사이로 창백한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내게는 날씨가 무척 추운 것 같았다.”

 

 

작품 제목 ‘바다의 침묵’에서 ‘바다’의 프랑스어 라 메르la mer는 ‘어머니’의 프랑스어 라 메르la mère와 동음이의어입니다. 바다의 침묵을 어머니의 침묵, 조국의 침묵, 프랑스의 침묵으로 받아들이면 작품이해가 한결 빨라집니다.

 

사르트르는 작가들이 작품을 쓰면서 염두에 두는 독자는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이겠지만 실은 이 말은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실제로 작가는 궁지에 빠지고 기만당하고 부자유한 사람들을 위해서 말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책은 제각기 특정한 소외로부터 출발해서 구체적 해방을 제시”합니다. 결국 “모든 정신적 작품은 그것이 겨냥하는 독자의 이미지를 그 자체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옮김, 95/99/100면)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를 이런 내용으로 시작하는데 그리고 구체적 작품으로 베르코르의 《바다의 침묵》을 듭니다.

 

“이 작품은 초기의 한 저항운동가에 의해서 씌었으며, 그 창작목적은 우리의 눈에는 명백한 것이었는데, 뉴욕, 런던 또 때로는 심지어 알제Alger로 망명한 사람들로부터는 반감만 사고 그 저자가 대독對獨 협력자로 단죄되기조차 했으니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다. 한데 그 이유는 베르코르가 그들을 독자로 겨냥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반대로 독일군에게 점령된 지역에서는 작가의 의도나 그 글의 효과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썼기 때문이다.”(《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옮김, 101면)

 

망명정부에서 보내오는 방송에 따르면 독일인은 예외 없이 악마이거나 괴물입니다. 그러나 막상 점령지에서 생활하는 프랑스인들이 만나는 독일군들은 악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 정확하게는 나치의 침략전쟁을 비판하고 프랑스/프랑스인이 겪는 비극을 진심으로 아파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지요. 밀고자란 이름의 악마는 프랑스인 내부에도 있었지요. 국내와 국외에서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1970년대 초반 유신시대가 막 시작한 시절 나는 프랑스인 콜렛트 누와르 선생님께 이 책을 교재로 프랑스 회화를 배웠습니다. 콜렛트 선생님은 베르너에게 전혀 말대꾸를 하지 않는 노인과 질녀의 행동은 지나치게 비인간적이고 현실감도 없다며 비난받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적은 나치인데 모든 독일인을 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었지요. 유신치하를 힘들어하던 한국의 대학생들이 오히려 노인과 질녀를 옹호했습니다. 베르너가 나치는 아니나 결코 그가 나치즘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고 독일군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은 결국 나치즘에 동조하는 셈일 뿐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이 기막힌 현실, 베르너에게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현실, 바로 이게 전쟁의 비극이라는 것이 우리들이 다다른 결론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사르트르의 말입니다.

 

“이렇듯 베르코르의 소설은 그 독자를 한정하고 그 한정을 통해서 그 자체의 의미를 한정했다......패전敗戰 후 1년 반이 되었던 당시로서는 그것은 생기 있고 치열하고 효과적인 작품이었다. 그러나 반세기 후가 되면 아무도 거기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사정을 모르는 독자들이 그때까지도 그 소설을 읽는다면, 1939년의 전쟁에 관한 재미있고도 조금 따분한 콩트라고 생각할 것이다. 바나나는 막 땄을 때 맛이 가장 좋다고들 한다. 마찬가지로 정신적 작품도 당장 그 자리에서 소비되어야 하는 것이다.”(《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옮김, 104면).

 

내가 〈바나나 이론〉이라고 이름 붙인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정신적 작품도 당장 그 자리에서 소비되어야 하는 것’이란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소비되는 작품이 〈좋은 소설〉이 아니라 “독자에게 아첨하여 그의 환심을 사려는 소설”, 〈나쁜 소설〉일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닐까요. 사르트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좋은 작품은 작품이 쓰이는 당대의 현실을 꿰뚫어 보고 숨겨진 진실을 밝히면서 동시에 공간과 시간을 넘어 보편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작품이라는 것이었을 겁니다.

 

사르트르는 이 작품을 고전의 반열에 오를 작품으로는 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작품이 쓰일 당시에 태어난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면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평가와는 달리 이 소설은 프랑스 뿐 아니라 멀리 떨어진 대한민국에서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읽히는 책입니다. 이 소설은 20세기 중반 제2차 세계대전 당시를 대표하는 〈고전〉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는 게 내 판단입니다.

 

 

 

● 베르코르Vercors의 산악지대 풍경. 만화가이자 삽화가였던 장 브륄레Jean Bruller(1902-1991)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동원돼 남프랑스 산악지대인 베르코르로 보내진다. 1941년 지하출판사 〈심야총서〉Edition de Minuit를 설립, 제1권으로 《바다의 침묵》(1942)을 발표한다. 필명 베르코르는 베르코르란 지명에서 가져온 것이다.

 

열린책들 판〉 번역본에 함께 실려 있는 헝가리 소년 토마 뮤리츠의 프랑스 예찬, 아! 퐁데자르Pont des Atrs예술의 다리! 그리고 유대인이라고 그를 배신한 프랑스를 이야기하는 《별을 향한 행진》도 일독을 강추합니다.

 

(이 글은 네이버의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려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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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비시선 211
이면우 지음 / 창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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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깊은 밤 남자 우는 소리를 들었다 현관, 복도, 계단에 서서 에이 울음소리 아니잖아 그렇게 가다 서다 놀이터까지 갔다 거기, 한 사내 모래바닥에 머리 처박고 엄니, 엄니, 가로등 없는 데서 제 속에 성냥불 켜대듯 깜박깜박 운다 한참 묵묵히 섰다 돌아와 뒤척대다 잠들었다.

 

아침 상머리 아이도 엄마도 웬 울음소리냐는 거다 말 꺼낸 나마저 문득 그게 그럼 꿈이었나 했다 그러나 손 내밀까 말까 망설이며 끝내 깍지 못 푼 팔뚝에 오소소 돋던 소름 안 지워져 아침길에 슬쩍 보니 바로 거기, 한 사내 머리로 땅을 뚫고 나가려던 흔적, 동그마니 패었다.

(이면우,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비, 2001, 61면)

 

“깊은 밤 우는 것이 사내들뿐일까요 마는 신경림 시인의 시 속 한 사내가 떠오릅니다. 빨간 감이 열리는 감나무, 사랑한다고 속삭이는〈너〉와 이내 그리워질 어머니를 뒤로 하고 고향집을 떠나온 사내, 건너편 신흥 빌라촌에서 보면 호화여객선에서 뿜어내는 불빛의 휘황찬란함으로 한껏 치장한, 달동네 한 귀퉁이의 저층 아파트 단지로 어기적어기적 스며듭니다.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 밤입니다(신경림의〈가난한 사랑노래〉에서).

어린이 놀이터 그네는 처연한 사내들의 쉼터입니다. 우두커니 있던 사내, 성냥불 켜대듯 온갖 서글픔이 마음속에 깜빡깜빡 드나들자, 어깨가 들썩들썩합니다. 두 손으론 바닥을 쥐어박고 머리로는 땅을 들이받으며 꺼억꺼억 웁니다. ‘엄니 엄니.’ 패인 둥근 자국은 엄니의 자궁으로 가려는 몸부림입니다..

이 모습을 보며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한 화자, 아내도 아이도 있지만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엄니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은 다를 바 없습니다. 사실 울고 있던 사내는 화자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랭보의 말대로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을까요!’ 깊은 밤, 울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더 읽기]

 

어젯밤 아무 일 없었다

 

물탱크 점검차 올라간 옥상 난간 아래 꽁초 소복하다

간밤 누군가 여기 서서 한갑 다 피워낸 거다

나는 그이가 무슨 마음을 짓고 허물며

연기를 들이켜고 뱉었는진 몰라도 바로 여기 서서

십오층 난간 저쪽 거대한 도시

불빛을 아주 오래 지켜보았던 것은 안다 그리고

끝내 주먹 불끈 쥐고, 입 꽉 다물고, 엘리베이터 타고

땅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 잠그는 일

그날 저녁부터 새로 늘어났다.

(이면우,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비, 2001, 64면)

 

15층 건물 옥상에 홀로 서는 이들은 참담하거나 적어도 영혼이 아픈 사람입니다. 더구나 한 밤중 이곳에 올라 한 갑 남짓의 담배 연기를 가슴 깊이 빨아들이는 사람들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소복하게 쌓이는 담배꽁초와 함께 추락에의 유혹도 차곡차곡 쌓입니다. 뒤엉킨 심사는 “저쪽 거대한 도시 불빛”으로 가라앉는 게 아니라 더 뒤엉킵니다. 글썽이는 눈물. 곤두박질 쳐서 쏜살같이 땅으로 내려가자 “마음을 짓고 허물며”를 수없이 되풀이하다 세게 도리질 합니다. “주먹 불끈 쥐고, 입 꽉 다물고, 엘리베이터 타고 땅으로 내려”갑니다. 그래, 그래, 그래도 살아보자!

〈어제 밤에는 아무 일 없었습니다.〉

이 건물 보일러공인 화자는 일 하나가 늘었습니다. 옥상의 문, 저승으로 가는 문, 잠그는 일.

 

성이여 계절이여

 

꼭대기를 겨냥하며 오르기는 길이나 사람도 마찬가지, 변두리 산동네쯤에서는 서너평 게딱지 양철지붕마저 허위대며 등성이를 기어올라 바람 불면 그대로 날아오를 듯 날개 숙여 가벼이 쉬고 있다 그렇게 밤 되면 호화여객선 선창 같은 수천개 꽃등 한꺼번에 켜들고 깊고 아득한 밤바다로 한없이 떠나보내는 것이다 전에 나는 그걸 보며 소리 죽여 울었다

오, 성이여.

 

고대 인도 어디쯤, 수십길 석회암벽을 쪼아 만든 수백개 방마다 스님들이 수행에 골몰하였다 공양은 밀죽 한 종재기가 고작, 이른 새벽이나 황혼, 뱃속이 북통처럼 텅 빈 이들이 한꺼번에 염불을 외면 그 울림이 얼마나 장엄했을 건가 하늘과 땅 새엔 감응, 노을빛보다 붉게 번져나갔으리라 전에 나는 그걸 생각하며 소리 죽여 울었다

오, 계절이여.

(이면우,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북갤럽, 2002, 32면)

 

또 하나의〈눈물詩篇〉.

첫 연은 영락없는 ‘묵호진동’의 모습입니다. 동해를 마주하고 자리 잡은 묵호진동은 산비탈 전체가 판자촌입니다. 한밤중, 외항선으로 묵호항에 입항하면서 바라보면 산비탈의 이 판자촌은 불이란 불은 몽땅 켜놓은 고층빌딩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勞役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이 휘황찬란한 불빛 속으로 기어들어 쉬고 있으면 왠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떠나보내는” 기분입니다. 참 많이 울었습니다.

 

두 번째 연은〈가득 참〉못지않은〈텅 빔〉의 참노릇을 말합니다. ‘허기’로 텅 빈 뱃속은 제대로 만든 “북통”과 다름없습니다. 하나하나가 이런 북통인 면벽 수행 중인 스님들의 염불소리는 장중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천지간을 “감응” 시키고 석양보다 “붉게 번져나갔”을 이 ‘텅 빔’, 참 많이 울었습니다.

 

아마도 화자는 두 연의 끝에서 울고 있는 것은 같지만 우는 까닭은 다를지 모릅니다.

 

하나 덧붙이면, 랭보에게서 가져왔을 “오, 성이여”, “오, 계절이여”가 두 연의 마지막 결구로 잘 녹아들고 있는지요......여전히 생각중입니다.

 

 

저녁길 / 이면우 (들 문서 이미지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려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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