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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ㅣ 창비시선 211
이면우 지음 / 창비 / 2001년 10월
평점 :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깊은 밤 남자 우는 소리를 들었다 현관, 복도, 계단에 서서 에이 울음소리 아니잖아 그렇게 가다 서다 놀이터까지 갔다 거기, 한 사내 모래바닥에 머리 처박고 엄니, 엄니, 가로등 없는 데서 제 속에 성냥불 켜대듯 깜박깜박 운다 한참 묵묵히 섰다 돌아와 뒤척대다 잠들었다.
아침 상머리 아이도 엄마도 웬 울음소리냐는 거다 말 꺼낸 나마저 문득 그게 그럼 꿈이었나 했다 그러나 손 내밀까 말까 망설이며 끝내 깍지 못 푼 팔뚝에 오소소 돋던 소름 안 지워져 아침길에 슬쩍 보니 바로 거기, 한 사내 머리로 땅을 뚫고 나가려던 흔적, 동그마니 패었다.
(이면우,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비, 2001, 61면)
“깊은 밤 우는 것이 사내들뿐일까요 마는 신경림 시인의 시 속 한 사내가 떠오릅니다. 빨간 감이 열리는 감나무, 사랑한다고 속삭이는〈너〉와 이내 그리워질 어머니를 뒤로 하고 고향집을 떠나온 사내, 건너편 신흥 빌라촌에서 보면 호화여객선에서 뿜어내는 불빛의 휘황찬란함으로 한껏 치장한, 달동네 한 귀퉁이의 저층 아파트 단지로 어기적어기적 스며듭니다.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 밤입니다(신경림의〈가난한 사랑노래〉에서).
어린이 놀이터 그네는 처연한 사내들의 쉼터입니다. 우두커니 있던 사내, 성냥불 켜대듯 온갖 서글픔이 마음속에 깜빡깜빡 드나들자, 어깨가 들썩들썩합니다. 두 손으론 바닥을 쥐어박고 머리로는 땅을 들이받으며 꺼억꺼억 웁니다. ‘엄니 엄니.’ 패인 둥근 자국은 엄니의 자궁으로 가려는 몸부림입니다..
이 모습을 보며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한 화자, 아내도 아이도 있지만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엄니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은 다를 바 없습니다. 사실 울고 있던 사내는 화자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랭보의 말대로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을까요!’ 깊은 밤, 울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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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아무 일 없었다
물탱크 점검차 올라간 옥상 난간 아래 꽁초 소복하다
간밤 누군가 여기 서서 한갑 다 피워낸 거다
나는 그이가 무슨 마음을 짓고 허물며
연기를 들이켜고 뱉었는진 몰라도 바로 여기 서서
십오층 난간 저쪽 거대한 도시
불빛을 아주 오래 지켜보았던 것은 안다 그리고
끝내 주먹 불끈 쥐고, 입 꽉 다물고, 엘리베이터 타고
땅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 잠그는 일
그날 저녁부터 새로 늘어났다.
(이면우,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비, 2001, 64면)
15층 건물 옥상에 홀로 서는 이들은 참담하거나 적어도 영혼이 아픈 사람입니다. 더구나 한 밤중 이곳에 올라 한 갑 남짓의 담배 연기를 가슴 깊이 빨아들이는 사람들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소복하게 쌓이는 담배꽁초와 함께 추락에의 유혹도 차곡차곡 쌓입니다. 뒤엉킨 심사는 “저쪽 거대한 도시 불빛”으로 가라앉는 게 아니라 더 뒤엉킵니다. 글썽이는 눈물. 곤두박질 쳐서 쏜살같이 땅으로 내려가자 “마음을 짓고 허물며”를 수없이 되풀이하다 세게 도리질 합니다. “주먹 불끈 쥐고, 입 꽉 다물고, 엘리베이터 타고 땅으로 내려”갑니다. 그래, 그래, 그래도 살아보자!
〈어제 밤에는 아무 일 없었습니다.〉
이 건물 보일러공인 화자는 일 하나가 늘었습니다. 옥상의 문, 저승으로 가는 문, 잠그는 일.
성이여 계절이여
꼭대기를 겨냥하며 오르기는 길이나 사람도 마찬가지, 변두리 산동네쯤에서는 서너평 게딱지 양철지붕마저 허위대며 등성이를 기어올라 바람 불면 그대로 날아오를 듯 날개 숙여 가벼이 쉬고 있다 그렇게 밤 되면 호화여객선 선창 같은 수천개 꽃등 한꺼번에 켜들고 깊고 아득한 밤바다로 한없이 떠나보내는 것이다 전에 나는 그걸 보며 소리 죽여 울었다
오, 성이여.
고대 인도 어디쯤, 수십길 석회암벽을 쪼아 만든 수백개 방마다 스님들이 수행에 골몰하였다 공양은 밀죽 한 종재기가 고작, 이른 새벽이나 황혼, 뱃속이 북통처럼 텅 빈 이들이 한꺼번에 염불을 외면 그 울림이 얼마나 장엄했을 건가 하늘과 땅 새엔 감응, 노을빛보다 붉게 번져나갔으리라 전에 나는 그걸 생각하며 소리 죽여 울었다
오, 계절이여.
(이면우,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북갤럽, 2002, 32면)
또 하나의〈눈물詩篇〉.
첫 연은 영락없는 ‘묵호진동’의 모습입니다. 동해를 마주하고 자리 잡은 묵호진동은 산비탈 전체가 판자촌입니다. 한밤중, 외항선으로 묵호항에 입항하면서 바라보면 산비탈의 이 판자촌은 불이란 불은 몽땅 켜놓은 고층빌딩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勞役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이 휘황찬란한 불빛 속으로 기어들어 쉬고 있으면 왠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떠나보내는” 기분입니다. 참 많이 울었습니다.
두 번째 연은〈가득 참〉못지않은〈텅 빔〉의 참노릇을 말합니다. ‘허기’로 텅 빈 뱃속은 제대로 만든 “북통”과 다름없습니다. 하나하나가 이런 북통인 면벽 수행 중인 스님들의 염불소리는 장중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천지간을 “감응” 시키고 석양보다 “붉게 번져나갔”을 이 ‘텅 빔’, 참 많이 울었습니다.
아마도 화자는 두 연의 끝에서 울고 있는 것은 같지만 우는 까닭은 다를지 모릅니다.
하나 덧붙이면, 랭보에게서 가져왔을 “오, 성이여”, “오, 계절이여”가 두 연의 마지막 결구로 잘 녹아들고 있는지요......여전히 생각중입니다.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려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