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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침묵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3
베르코르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이 한 대목]
“[친구는] 미친 사람처럼 화를 내다가 자지러지게 웃어 댔죠. 때로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외쳤습니다. 〈그건 독毒일세! 짐승에게서는 독을 비워 내야만 하네!〉또 때로는 검지로 내 배를 쿡쿡 찌르며 빈정거렸어요. 〈그들은 지금 엄청난 두려움에 빠져 있네. 하하! 주머니를 털릴까 봐. 배를 주릴까 봐 두려워하고 있지. 그들의 산업과 장사 때문에 말이야! 그들은 오로지 그 생각뿐이지! 몇 안 되는 놈들, 우리는 그들을 살살 달래 잠재울 걸세. 하하하!......그건 아주 쉬운 일이 될 거야!〉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웃어댔습니다. 〈우린 그들의 영혼을 콩 한 접시와 맞바꿀 거야!〉”
베르너가 숨을 들이쉬었다.
“저는 말했습니다. 〈자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헤아려 봤나? 진지하게 헤아려 봤어?〉그러자 그가 대답했죠. 〈그런 것으로 우리가 주눅 들 것이라 생각하나? 우리의 냉철함은 차원이 달라!〉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럼 그 영혼의 무덤은? 그 무덤을 봉인할 작정인가, 영원히?〉그는 대답했죠. 〈이건 생사가 걸린 일이야. 사실 정복하기 위해서는 힘으로 충분하네. 하지만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렇지 않지. 지배하는 데에는 군대가 쓸모없다는 걸 우린 잘 알고 있네.〉전 외쳤죠. 〈지배하기 위해 정신을 파괴하겠다고? 그건 절대 안 돼!〉그가 대답했습니다. 〈정신은 결코 죽지 않아. 그보다 더한 일을 겪어도 자신의 유해에서 다시 태어나지. 우리는 천년을 염두에 두고 건설해야만 하네. 그러려면 우선 파괴해야만 해.〉전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그의 맑은 눈 깊은 곳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래요. 그의 말은 진실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끔찍했죠.”
(베르코르, 《바다의 침묵》, 이상해 옮김, 열린책들, 2009, 71-72면)
[북 리뷰]
“다만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이 있을 따름이다. 나쁜 소설이란 독자에게 아첨하여 그의 환심을 사려는 소설이며, 좋은 소설이란 독자에 대한 요청이며 신뢰이다.”(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옮김, 민음사, 1998, 89면)
베르코르Vercors의 《바다의 침묵》Le Silence de la mer은 내 젊은 날의 초입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69년 대학에 들어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바다의 침묵의 프랑스어본(한 면에 2페이지씩 인쇄된 복사물, 제본도 안 돼 있었음)이 내게 들어왔고, 겨울방학이었을 겁니다, 며칠 밤을 새가며 번역한 기억이 있습니다. 분량이 짧아 대들었던 것 같습니다(200자 원고지 160장 안팎). 이 작품의 번역은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춘조사春潮社에서 오증자 선생님 번역으로 1960년에 출간되었고 내가 구한 것은 1966년 판 2쇄였습니다. 그리고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제 43권 《불란서단편선》(1964)에도 박은수 선생님 번역으로 실려 있었습니다. 직접 번역을 하기 전에 번역본을 먼저 읽은 것 같습니다. 외국어 공부에는 번역을 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선배의 말에 번역을 해볼 마음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의 번역과 대조해보니 엉망진창 번역이었지만 그럼에도 박은수 선생님의 번역에 30군데도 넘게 만족스럽지 못한 데가 있음을 확인했고 그렇게 잘 읽히고 진한 감동을 준 오증자 선생님의 번역은 유려한 의역으로 선생님의 필력을 확인한 기회였다는 게 훗날의 기억입니다.
《바다의 침묵》.
1942년, 독일 나치에 점령당한 프랑스의 어느 마을, 독일군 장교 베르너 폰 에브레나크는 한 노인과 질녀가 사는 집 이층에 머물게 됩니다. 군 정복이 아닌 사복으로 갈아입은 베르너는 매일 저녁 추위를 핑계로 아래층에 내려와 난롯가에서 프랑스를 위한 경배를 이어갑니다. 프랑스의 겨울에 대해서, 특히 프랑스의 문학에 대해서.
그리고 18세기 장-자크 루소가 언젠가 코르시카 섬에서 찬란한 태양이 떠올라 유럽 전체를 밝힐 것이라고 예언한 이후 처음일까, 베르너는 독일과 프랑스가 행복하게 결혼하면 유럽 전역을 밝힐 태양이 떠오를 것이란 확신에 행복해 합니다. 독일과 프랑스를 〈미녀와 야수〉에 빗대고 그 해피엔드까지 가져옵니다. 노인과 질녀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파리로 가 나치대원인 친구를 만나고 온 베르너는 나치의 본심이 무엇인지 알고 절망합니다. 나치는 프랑스와 결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를 ‘정복’하려는 것도 아니고 ‘지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정복하기 위해서는 군대만 있으면 되지만 지배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영혼과 정신을 파괴해야 합니다. 나치는 지금 그 일을 실행해가는 중이었습니다.
근무지로 돌아왔으나 노인과 질녀를 피하던 베르너, 사흘만에 그들 앞에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전과 다르게 문을 두드립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린 사람의 느리고 또박또박한 노크, 단호하고 차분한 세 번의 노크”, 대답이 없자 다시 “약하고 빠르게 단 두 번”의 노크.. 노인은 대답합니다. “들어오시오, 선생.”
베르너는 그 집에 처음 왔을 때처럼 군 정복을 입고 그들 앞에 나타납니다.
파리 다녀온 일을 이야기한 후 전출을 자청, 명령이 떨어져 다음날 새 근무지로 떠날 것을 알립니다.
“〈지옥을 향해〉
그는 팔을 들어 동쪽을, 미래의 풀들이 시체를 먹고 자랄 광활한 평원을 향해 뻗었다.
나[노인]은 생각했다. 〈저렇게 굴복하고 마는군. 그들이 할 줄 아는 건 그게 다야. 그들은 모두 굴복하게 해. 저 사람마저도.〉”
베르너가 자원한 동부전선은 러시아와 맹렬한 전투를 벌이던 지역으로 그곳을 자원한다는 것은 죽으러간다는 뜻입니다.
방을 나서며 여느 때처럼 ‘좋은 밤 되시기 바랍니다’란 밤 인사를 한 베르너가 오늘은 그냥 가지를 않고 질녀에게 영원한 작별인사를 합니다. ‘아듀’, 그리고 한참 후 질녀가 답합니다. ‘아듀’.
“폰 에브레나크의 얼굴과 온몸이 뜨거운 목욕을 즐기고 난 것처럼 부드럽게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웃었다. 그리하여 내가 간직하게 될 그의 마지막 이미지는 미소를 머금은 것이 되었다. 그의 발소리가 집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튿날, 내가 아침 우유를 마시러 내려오기 전 그는 떠났다. 조카는 여느 날처럼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조카는 아무 말 없이 시중을 들었다. 아무 말 없이 우리는 우유를 마셨다. 밖에는 안개 사이로 창백한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내게는 날씨가 무척 추운 것 같았다.”
작품 제목 ‘바다의 침묵’에서 ‘바다’의 프랑스어 라 메르la mer는 ‘어머니’의 프랑스어 라 메르la mère와 동음이의어입니다. 바다의 침묵을 어머니의 침묵, 조국의 침묵, 프랑스의 침묵으로 받아들이면 작품이해가 한결 빨라집니다.
사르트르는 작가들이 작품을 쓰면서 염두에 두는 독자는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이겠지만 실은 이 말은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실제로 작가는 궁지에 빠지고 기만당하고 부자유한 사람들을 위해서 말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책은 제각기 특정한 소외로부터 출발해서 구체적 해방을 제시”합니다. 결국 “모든 정신적 작품은 그것이 겨냥하는 독자의 이미지를 그 자체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옮김, 95/99/100면)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를 이런 내용으로 시작하는데 그리고 구체적 작품으로 베르코르의 《바다의 침묵》을 듭니다.
“이 작품은 초기의 한 저항운동가에 의해서 씌었으며, 그 창작목적은 우리의 눈에는 명백한 것이었는데, 뉴욕, 런던 또 때로는 심지어 알제Alger로 망명한 사람들로부터는 반감만 사고 그 저자가 대독對獨 협력자로 단죄되기조차 했으니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다. 한데 그 이유는 베르코르가 그들을 독자로 겨냥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반대로 독일군에게 점령된 지역에서는 작가의 의도나 그 글의 효과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썼기 때문이다.”(《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옮김, 101면)
망명정부에서 보내오는 방송에 따르면 독일인은 예외 없이 악마이거나 괴물입니다. 그러나 막상 점령지에서 생활하는 프랑스인들이 만나는 독일군들은 악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 정확하게는 나치의 침략전쟁을 비판하고 프랑스/프랑스인이 겪는 비극을 진심으로 아파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지요. 밀고자란 이름의 악마는 프랑스인 내부에도 있었지요. 국내와 국외에서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1970년대 초반 유신시대가 막 시작한 시절 나는 프랑스인 콜렛트 누와르 선생님께 이 책을 교재로 프랑스 회화를 배웠습니다. 콜렛트 선생님은 베르너에게 전혀 말대꾸를 하지 않는 노인과 질녀의 행동은 지나치게 비인간적이고 현실감도 없다며 비난받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적은 나치인데 모든 독일인을 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었지요. 유신치하를 힘들어하던 한국의 대학생들이 오히려 노인과 질녀를 옹호했습니다. 베르너가 나치는 아니나 결코 그가 나치즘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고 독일군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은 결국 나치즘에 동조하는 셈일 뿐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이 기막힌 현실, 베르너에게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현실, 바로 이게 전쟁의 비극이라는 것이 우리들이 다다른 결론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사르트르의 말입니다.
“이렇듯 베르코르의 소설은 그 독자를 한정하고 그 한정을 통해서 그 자체의 의미를 한정했다......패전敗戰 후 1년 반이 되었던 당시로서는 그것은 생기 있고 치열하고 효과적인 작품이었다. 그러나 반세기 후가 되면 아무도 거기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사정을 모르는 독자들이 그때까지도 그 소설을 읽는다면, 1939년의 전쟁에 관한 재미있고도 조금 따분한 콩트라고 생각할 것이다. 바나나는 막 땄을 때 맛이 가장 좋다고들 한다. 마찬가지로 정신적 작품도 당장 그 자리에서 소비되어야 하는 것이다.”(《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옮김, 104면).
내가 〈바나나 이론〉이라고 이름 붙인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정신적 작품도 당장 그 자리에서 소비되어야 하는 것’이란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소비되는 작품이 〈좋은 소설〉이 아니라 “독자에게 아첨하여 그의 환심을 사려는 소설”, 〈나쁜 소설〉일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닐까요. 사르트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좋은 작품은 작품이 쓰이는 당대의 현실을 꿰뚫어 보고 숨겨진 진실을 밝히면서 동시에 공간과 시간을 넘어 보편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작품이라는 것이었을 겁니다.
사르트르는 이 작품을 고전의 반열에 오를 작품으로는 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작품이 쓰일 당시에 태어난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면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평가와는 달리 이 소설은 프랑스 뿐 아니라 멀리 떨어진 대한민국에서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읽히는 책입니다. 이 소설은 20세기 중반 제2차 세계대전 당시를 대표하는 〈고전〉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는 게 내 판단입니다.
● 베르코르Vercors의 산악지대 풍경. 만화가이자 삽화가였던 장 브륄레Jean Bruller(1902-1991)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동원돼 남프랑스 산악지대인 베르코르로 보내진다. 1941년 지하출판사 〈심야총서〉Edition de Minuit를 설립, 제1권으로 《바다의 침묵》(1942)을 발표한다. 필명 베르코르는 베르코르란 지명에서 가져온 것이다.
〈열린책들 판〉 번역본에 함께 실려 있는 헝가리 소년 토마 뮤리츠의 프랑스 예찬, 아! 퐁데자르Pont des Atrs예술의 다리! 그리고 유대인이라고 그를 배신한 프랑스를 이야기하는 《별을 향한 행진》도 일독을 강추합니다.
(이 글은 네이버의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려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