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아침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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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대목]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게 누구요? 고요한 이 밤에 한숨을 쉬는 자가?”

“궁을 도망쳐서 음악을 찾는 이요.”......

“음악에서 무엇을 찾으시오?”

“회한과 눈물을 찾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일세. 음악은 말이 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거라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전혀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음악이 왕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는가?”

“그건 신을 위해 있던 것임을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자넨 틀렸네. 신은 말하지 않는가.”

“귀를 위한 것?”

“내가 말 할 수 없는 그것이 귀를 위한 것은 아니네.”

“황금을 위한?”

“아니, 황금은 아무 것도 못 듣지.”

“영광?”

“아니네. 그건 사용된 이름들일 뿐이네.”

“침묵?”

“그건 말의 반대말일 뿐이지.”

“경쟁하는 음악가?”

“아니.”

“사랑?”

“아니.”

“사랑에 대한 회한?”

“아니.”

“단념?”

“아니, 아니야.”

“보이지 않는 이에게 바치는 고프레를 위한 겁니까?”

“그것도 아니네. 고프레란 게 뭔가? 그건 보이지 않나. 맛이 나고. 그건 먹는 거 아닌가. 그건 아무 것도 아니네.”

“더는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제 생각엔 죽은 자들에게 한 잔은 남겨 놓아야......”

“자네 자신도 태우게나.”

‘말에 버림 받은 자들을 위한 물 마실 수 있는 작은 곳. 아이들의 그림자를 위하여. 제화공의 망치질을 위하여. 유아기 이전의 상태들을 위하여. 숨 쉬지 않고 있었을 때. 빛 없이 있었을 때.“

얼마 후 음악가의 그 늙고 뻣뻣한 얼굴 위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자신의 바싹 야윈 손으로 마레의 포동포동한 손을 잡았다.

“자넨 방금 내 탄식하는 소리를 들었겠지? 나는 곧 죽네. 내 예술도 함께. 내 닭들과 거위들만 날 아쉬워하겠지. 죽은 자들을 깨울 아리아 하나 아니 두 곡을 자네에게 맡기려네. 자!”

(파스칼 키냐르, 《세상의 모든 아침》, 류재화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3, 112/118-120면. 번역은 부분 수정)

 

[북 리뷰]

 

“1650년 봄, 생트 콜롱브 부인이 죽었다.”로 시작해 “1689년, 23일째 되던 날 밤,......마레 씨가 베르사유로 돌아간 것은 새벽녘이 되어서였다.”로 끝나는 이 소설은 사라진 〈사랑의 원형〉을 결코 놓아주지 않는, 애도를 넘어 되살려내는 한 예술가, 생트 콜롱브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내가 꿈꾸는 완전한 사랑은《롤리타》(나보코프)의 험버트가 맛본 “첫 눈에 반한 사랑이고 치명적인 사랑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이지만 험버트의 경우는 ‘서로 동시에’ 한 사랑이 아니라 일방적인, 짝사랑이었기 때문에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파스칼 키냐르도 “첫 눈에 서로 강렬한 사랑에 빠지는”(송의경과의 인터뷰) 사랑을 꿈꾸고 그려내는 데 성공하지만 막상 작가 자신은 이런 사랑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키냐르는 ‘두 사람이 동시에 첫 눈에 반해 강렬한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 모두 영원히 변하지 않고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을 〈사랑의 원형〉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키냐르는 《세상의 모든 아침》에서 삶과 죽음을 넘어서 사랑하는 생트 콜롱브 부부의 모습으로 이를 재현해내고 있습니다(이보다는 조금 느슨하게 이를 재현하는 게 끝까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로마의 테라스》의 몸므일 것입니다).

 

나는 ‘전형’이 아니라 ‘원형’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아침》에서 키냐르가 보여주는 것은 ‘전형’을 창조해내는 과정이 아니라 ‘원형’을 되살려내는 과정입니다. 마농 레스코, 《춘희》의 마르그리트 그리고 칼멘, 이들을 ‘전형적인 여인상’이라고 하지 ‘원형적인 여인상’이라고는 하지 않는다는 점을 떠올립시다. 생트 콜롱브, 몸므 모두 첫사랑을 잊지 못합니다. 키냐르에게는 그들의 첫사랑이 그들의 사랑의 ‘원형’입니다.

아내가 죽은 뒤 생트 콜롱브는 장딴지에 대지 않고 양 무릎 사이에 놓는 방식으로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합니다. 생트 콜롱브는 이미 왕실 실내악단 수석 악단장이 된 제자 마랭 마레의 물음에 답합니다. 음악은 신이나 왕을 위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황금, 영광, 사랑, 사랑의 회한 아니 그 무엇을 위한 게 아니라고.

생트 콜롱브는 아내가 죽은 뒤 2년간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연습에 몰두합니다. 정원에 뽕나무로 오두막을 지은 다음에는 연습이 집안 일 무엇도 방해할 일이 없어져 밤낮 가리지 않고 더욱 더 음악에 몰두합니다. 궁정으로 오라는 권유도 뿌리친 채 처박혀 연주만 해대는 이 은둔자의 모습이 딸들의 눈에는 정상적으로 보일 리 없습니다.

그는 왕궁에서 한 자리 차지한 마랭 마레에게 말합니다.

 

내 딸을 자네에게 줄지 안 줄지는 모르겠네. 왕은 당신의 쾌락을 감싸주는 자네의 멜로디를 좋아하시겠지. 방이 백 개나 되는 거대한 돌 궁정에서 예술을 하든, 뽕나무 속 흔들리는 오두막에서 예술을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네. 내게는 예술 그 이상의 무엇이 있지. 손가락 그 이상의 뭔가가 말이야. 귀 이상의 뭔가가. 창작 그 이상의 뭔가가 말일세. 나는 열정적인 삶을 보내고 있네.”

“열정적인 삶을 사신다고요?” 마랭 마레가 말했다.

“아버지가 열정적인 삶을 보내신다고요?”

마들렌과 마레는 동시에 말했고, 동시에 늙은 음악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열정적인 삶une vie passionnée〉이라니. 바깥출입도 없이 오두막에 틀어박혀 연주만 해대는 궁상맞은 삶이 ‘열정적인 삶’이라니. 다시 생트 콜롱브입니다.

 

“자네는 눈에 보이는 왕을 즐겁게 하고 있지. 남을 즐겁게 하는 일, 그건 나하고는 어울리지 않네. 나는 소리쳐 부르지. 그래 나는 손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소리쳐 부르네.”

 

'Je hèle avec ma main une chose invisible.'

동사〈héler〉는 ‘멀리서 큰 소리로 부른다, 경우에 따라서는 확성기를 사용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손 연주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큰 소리로 부른다.”

 

손 연주를 통해, “하나의 이름과 기쁨들을 기억하며 지어내는 것은 물, 물풀, 쑥, 살아있는 작은 애벌레들 같은 헌물”입니다. 여전히 스승의 말씀이 수수께끼이기만 한 마레는 묻습니다.

 

“선생님의 물풀, 애벌레 속 어디에 음악이 있는데요?”

“활을 켤 때 내가 찢는 것은 살아있는 내 작은 심장조각이네. 내가 하는 것, 그건 하루도 쉬는 날 없는, 평생 동안의 생활방식일 뿐이네. 내 운명을 완성하는 거지.”

 

생트 콜롱브에게 음악은 누구를 또는 무엇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냥 음악이며 삶입니다. instrument de musique/악기. 음악을 위한 도구라는 말이 키냐르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비올라 다 감바는 음악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비올라 다 감바이며 음악입니다. 생트 콜롱브가 무릎 사이에 비올라 다 감바를 놓고 연주하는 모습에서 나는 클림트의 〈입맞춤〉을 떠올립니다. 그 모습은 서로 강렬하게 사랑하는 두 사람이 포옹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거기에서 내가 보는 것은 두 존재가 아니라 한 존재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사랑의 원형’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불러내 형상화 하고 그 이면으로 녹아내렸습니다.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하는 생트 콜롱브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연주자와 악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은 하나의 음악이 돼 ‘사랑의 원형’을 불러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음악이 바로 ‘사랑의 원형’입니다.

〈회한의 무덤〉을 연주할 때 “악보가 펼쳐진, 밝은 푸른 색 천이 덮인 탁자 위에 그는 짚으로 싼 포도주 단지, 다리가 달린 포도주 잔과 둥글게 말린 고프레 몇 개가 담긴 주석 접시를 놓”았습니다. 포도주와 고프레 과자, 사랑의 원형이 불려와 형상화 되는 장소의 소품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사랑의 원형’.

 

그[생트 콜롱브]는 악보를 참조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손은 악기의 키를 자유자재로 옮겨 다녔고, 그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음이 서서히 올라갈 때, 문 옆에 매우 창백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의 연주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아무 말 없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그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더니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녀는 생트 콜롱브의 악보대를 천천히 돌았다. 그리고 탁자와 작은 포도주 병 바로 옆 구석에 있던 궤짝 위에 앉아 그의 연주를 들었다.

그의 아내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가 한 곡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더 이상 거기 없었다. 그는 비올라 다 감바를 놓았다. 짚으로 싼 포도주 단지 옆에 있는 주석 접시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그는 포도주 잔이 반쯤 비워져 있고, 그 옆에 있던 고프레가 반쯤 갉아 먹혀 있는 것을 보았다.

 

생트 콜롱브는 “손 연주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소리쳐 부른다”며 음악이 곧 ‘사랑의 원형’을 형상화 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 장면이 ‘사랑의 원형’을 불러낸 현장입니다. 죽은 아내가 돌아와 포도주와 고프레 과자를 먹었습니다. 이 짧은 작품 안에서 아내는 수도 없이 찾아옵니다. 언제나 연주할 때이기만 하지만. 왜 더 자주 오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기도 합니다. “저도 모르겠어요. 당신의 연주가 날 감동시키니까. 그래서 온 걸 거예요. 당신이 친절하게도 마실 것과 조금씩 갉아먹을 과자를 주기도 하고요.” 생트 콜롱브는 화가인 친구 보쟁에게 부탁해 포도주 잔과 고프레 과자가 있는 그림을 하나 그리게 해 연주할 때면 탁자 위에 놓습니다. 〈제15장〉은 망자의 세계에서 불려나온 아내와의 긴 대화로 채워지기도 합니다.

나는 ‘사랑의 원형’을 형상화 하느라 만들어 낸 이 장면들, 포도주도 마시고 고프레 과자도 먹고 가는 아내와의 만남, 아내가 죽은 지 12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차갑지 않은 침대 등의 에피소드를 환상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들은 생트 콜롱브가 겪는 일이 아니라 비올라 다 감바와 생트 콜롱브가 하나가 돼 만들어 낸 음악이 보여주는 형상을 키냐르가 언어화 한 것으로 읽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라진 ‘원형’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한

 

“세상의 모든 아침은 〈새롭게〉다시 온다, 그것도 매일.”

 

이라고 고쳐 써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살을 파고드는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첫사랑’을 잊고 살아온 이들에게는 망각의 세계에 팽개친 첫사랑을 기억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키냐르를 시작으로 음악, 더 나아가 문학 그리고 예술과 〈원형의 형상화〉는 더 깊이 파볼만한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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