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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밤 ㅣ 시로 쓰는 자서전 1
이하석 지음 / 시와반시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부서진 활주로
활주로는 군데군데 금이 가, 풀들
솟아오르고, 나무도 없는 넓은 아스팔트에는
흰 페인트로 횡단로 그어져 있다. 구겨진 표지판 밑
그인 화살표 이지러진 채, 무한한 곳
가리키게 놓아 두고.
방독면 부서져 활주로변 풀덤불 속에
누워 있다. 쥐들 그 속 들락거리고
개스처럼 이따금 먼지 덮인다. 완강한 철조망에 싸여
부서진 총기와 방독면은 부패되어 간다.
풀뿌리가 그것들 더듬고 흙 속으로 당기며.
타임지와 팔말 담배갑과 은종이들은 바래어
바람에 날아가기도 하고, 철조망에 걸려
찢어지기도 한다. 구름처럼
우울한 얼굴을 한 채.
타이어 조각들의 구멍 속으로
하늘은 노오랗다. 마지막 비행기가 문득
끌고 가 버린 하늘.
(이하석, 《환한 밤》, 시와반시, 2012, 14-15면)
“첫 시집 《투명한 속》(1980)에 실린 이 시는 이하석 시인의 초기시 경향을 잘 드러내는 시이며 시인이 많이 아끼는 시인 듯합니다. 1997년에 나온 시선집 《고추잠자리》, 2012년에 나온 ‘시로 쓰는 자서전’ 《환한 밤》모두, 이 시가 처음을 장식합니다. 이하석은, 당시까지만 해도 시의 소재로 낯설었던 ‘버려진 못이나 깡통 · 비닐 · 유리 조각 · 나사 · 총기’를 시 속에 끌어들여〈광물학적 상상력〉을 시의 영역에 접목시킨 시인으로 자리 잡습니다. 폐쇄된 활주로, 흰 페인트 줄이 남아있는 아스팔트는 금이 갔으며 풀이 무성합니다. 구겨진 표지판. 활주로 변 풀덤불, 먼지를 뒤집어쓴, 쥐가 들락날락하는 부서진 방독면, 부서진 총기. 타임지, 팔말 담뱃갑, 바랜 은종이 휘날리다 걸려있는 철조망, 타이어 조각들. 닫힌 이미지만 가득한 이 폐허의 공간을 그러나 시인은 자연 쪽으로 열어놓습니다. 표지판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무한한 곳〉과 마지막 비행기가 끌고 간 〈하늘〉이라는 열린 이미지를 마련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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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 시인이 첫 시집 《투명한 속》이 나올 당시, 시 만들기의 원칙으로 삼은 것은 “첫째, 풍경 또는 사람의 정면보다 뒤란이나 이면을 그리며, 둘째, 사물과 나는 직접 만나지 않고 카메라의 눈을 통해 만나며, 셋째는 두 번째와 연관이 깊은데, 나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억제하고 오직 보이는 것만을 정밀하게 묘사해낸다는 것”이었습니다(최두석∥나희덕 엮음, 《나의 대표시를 말한다》, 도서출판 b, 2012, 53면).
이 원칙을 지키려면 이 시는 카메라에 담은 ‘전쟁의 폐허’에 나뒹구는 〈잔해들〉하나하나를 언어로 묘사하는데 그쳐야 했습니다. ‘무한한 곳’과 ‘하늘’의 이미지는 끌어들이지 말아야 했지요. 시인이 이를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어쨌든 폐허의 풍경을 폐허 그 자체로 보여주려고 했는데, 그렇게 그려내 보니, 너무 삭막하고 답답했다”고 하면서 ‘무한한 곳’과 ‘하늘’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던 연유를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로 쓰는 자서전’ 《환한 밤》, 〈시인의 말〉참조).
시인은, 시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보이는 것만을 정밀하게 묘사하고 싶다고 했지만 실은 이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시인으로서의 그의 역량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의 세계관이 그 원칙과는 애초부터 맞지 않았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전쟁의 폐허, 그 잔해를 묘사하는〈부서진 활주로〉말고 그의 초기시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산업화의 뒤란, 그 잔해의 정밀한 묘사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들도 정밀한 묘사에 그치지 않고 〈부서진 활주로〉처럼 한 단계 더 나갑니다.
뒤쪽 풍경 1
폐차장 뒷길, 석양은 내던져진 유리 조각 속에서
부서지고, 풀들은 유리를 통해 살기를 느낀다.
밤이 오고 공기 중에 떠도는 물방울들
차가운 쇠 표면에 엉겨 반짝인다,
어둠 속으로 투명한 속을 열어놓으며
일부는 제 무게에 못 이겨 흘러내리고
흙 속에 스며들어 풀뿌리에 닿는다,
붉은 녹과 함께 흥건한 녹물이 되어
일부는 어둠속으로 증발해 버린다.
땅 속에 깃든 쇠조각들 풀뿌리의 길을 막고
어느덧 풀뿌리에 엉켜 혼곤해진다.
신문지 위 몇 개의 사건들을 덮는 풀, 쇠의 길을 돌아서
아늑하게, 차차 완강하게 쇠를 잠재우며
풀들은 또 다른 이슬의 반짝임 쪽으로 뻗어나간다.
(이하석, 《환한 밤》, 시와반시, 2012, 20면)
첫 시집 《투명한 속》에 실린 시입니다.
폐차장, 유리 조각, 쇠, 녹물, 신문지들을 이미지화함으로써 산업화의 그림자를 드러내고 있는 시인데 이 시에서도 시인은 자기가 만든 시 만드는 원칙에서 벗어나 시인의 감정을 개입시키고 있습니다.
밤이슬이 물방울로 내려 ‘쇠’ 표면에 엉겨 ‘반짝이다’ 흘러서 흙속으로 스며들어 풀뿌리에 ‘닿습니다’. 흙속의 쇠성분과 만난 스며든 물기는 ‘녹물’이 돼 풀뿌리의 뻗어남을 방해하는 듯하나 풀뿌리의 뻗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풀뿌리에 엉켜 혼곤해’집니다. 결국 풀은 〈아늑하게, 차차 완강하게〉쇠의 힘을 잠재웁니다.
시인은 ‘산업화의 그림자’(폐차장의 쇳조각)를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여기에 ‘자연의 위대한 복원력’(쇠를 잠재우는 풀)을 대비시킵니다. ‘어두운 지금-여기’의 내일에 ‘밝은 전망’을 자리잡게 합니다.
시의 마지막 행입니다.
‘풀들은 또 다른 이슬의 반짝임 쪽으로 뻗어나간다.’
시인에게 보이는 지금-여기, 산업화의 뒤란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있습니다. 시인은 이 시에서도 폐허의 잔해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데 성공하고 있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아마도 자연의 위대함을 믿는 시인은 애초부터 비관주의자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황폐한 지금-여기를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막힌 출구를 견디지 못하고 밝은 전망 쪽을 향한 틈을 열어놓은 까닭일 겁니다.
다음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투명한 속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쇳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다닐 때,
버려진 아무 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 부스러기 흙 속에 깃들여 더욱 투명해지고
더 많은 것들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들어간다. 비로소 쇳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
(이하석, 《환한 밤》, 시와반시, 2012, 16면)
첫 연에서는 산업화의 뒤란인 ‘유리 부스러기’가 그 투명한 속성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로 다른 산업화의 잔해들, 먼지, 녹물, 얼룩진 땅, 쇳조각들을 밝은 전망의 기운으로 품어주면서 스스로는 물론 다른 잔해들에게까지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둘째 연도 마찬가지로 껌종이, 신문지, 비닐, 연탄재로 가득한 골짜기로 산업화의 뒤란을 이미지화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시인은 밝은 전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제비꽃이 흠뻑 먹은 봄기운은 유리 속, 하늘 속, 바위 속은 물론 쇳조각까지, 흙 속까지 파고들어 환하게 비쳐줍니다.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려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