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파르티잔
서정춘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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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봄, 파르티잔

 

꽃 그려 새 울려 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서정춘, 《봄, 파르티잔》, 시와시학사, 2001, 11면)

 

“마음속에 자식으로서의 얼굴만 ‘그려’, 엄마 울려 놓고 ‘떠났다는’ 빨치산,

도심 한복판에 봄꽃 흐드러지게 ‘그려’, 새 울려 놓고 ‘떠났다는’ 봄,

모두가 지리산 골짜기에 가 있다는 소식.

사람과 자연이 함께 있는 곳, 恨과 슬픔까지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곳, 지리산입니다.

짧은 시가 좋은 시 아닐까 하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게 하는 이가 바로 서정춘 시인입니다. 살점은 물론 근육도 없이 오로지 뼈대뿐인데 뿜어내는 뜻, 생각, 색깔, 이미지가 은성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시의 제목은 어느 봄날, 지리산으로 사라진 한 빨치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어느 봄’과 ‘어느 빨치산’, 둘의 이야기라는 뜻을 담았습니다.

꽃과 새와 지리산과 봄은 쉽게 연결됩니다. 파르티잔(빨치산)과 지리산은 알겠습니다만 꽃과 새는 어떻게?

이를 유추해볼 수 있는 시인의 시가 두 편 있습니다.

 

할매

 

무슨 영문인지 문상객 하나 없는 산 밑 상갓집 저문 하늘 위로 줄기러기 거뭇거뭇 날아는 가고 상복도 입지 않은 오무래미 할매 혼자는 조등이 낮게 걸린 사립짝 문 밖으로 턱을 빼고 서서는 씨물거리고는 있고.

(서정춘, 《봄, 파르티잔》, 시와시학사, 2001 24면)

 

和音

 

낡은 집 돌각담에 등을 대고 오돌오돌 앉아서 실성한 듯 투덜거리는 저 홀할머니의 아들 하나는 빨치산이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부분, 서정춘,, 《竹篇》, 동학사, 1996/ 2006, 17면)

 

다행히도 이야기가 들어있는 시들입니다. 짐작컨대 오래 전, 자식사랑만 엄마 마음속에 “그려”, 엄마를 “울려 놓고” 빨치산 자식은 지리산 골짜기로 깊숙이 사라졌습니다(그런데 왜 빨치산이 아니라 굳이 ‘파르티잔’이라고 표기하고 있을까요). 빨치산 아들을 둔 엄마, 남편(빨치산의 아버지)의 상을 치르는 중입니다. 빨갱이 집안, 문상객 하나 없습니다. 이가 다 빠져 늘 오물거리는 할매(오무래미)가 된 엄마는 평생 포기하지 않았듯이 혹시나 하며 아들을 기다립니다. “문 밖으로 턱을 빼고 서서는 씨물거”립니다. 또 세월은 지납니다. 엄마는 이제 늙어 “실성한 듯 투덜거리”면서도 여전히 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빨치산이 나온다고 이 시를 이념적으로 읽는다? 꽃과 새가 그렇듯 자식 사랑과 엄마에게 이념 타령이라니요. 온갖 꽃들이 소란스러운 도시에서, 그들에 반한 새들을 남겨놓고 봄은 지리산으로 살그머니 옮겨 앉습니다. 이 빨치산(사람)과 이 봄(자연)이 함께 하는 지리산 골짜기를 머릿속에, 아니 마음속에 그려봅시다. ‘이야기성’은 빼버리고 문득, 그 그림만 즐깁시다.

 

8단어(꽃/ 그려/ 새/ 울려 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로 된 시, 그 짧음으로 시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시를 놓고 이 무슨 구질구질한 횡성수설인지 모르겠습니다. 서정춘 시인의 시들은 짧지만 우리를 붙잡고 있는 시간은 무척 깁니다.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장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려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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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 개정판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57
허수경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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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병장이 내 사내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 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 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허수경,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실천문학사, 1988/2010, 34면)

 

“1964년생 허수경 시인이 1988년에 낸 첫 시집에 실린 시이니 많아야 스물네 살 채 안 된 ‘앳된 단발머리’가 지은 시입니다. 워낙 호가 나 웬만한 허랑방탕으론 꿈쩍도 않을 송기원 시인이 ‘속은 듯한 느낌’이었다니 더 할 말이 뭐가 있겠습니까.

풋사과가 빚어낸 익을 대로 익어, 문드러지기 직전의 그 농염한 맛이라니.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쇳덩이도 녹여낼 정염情炎의 그 서늘함이라니!”

 

 

[더 읽기]

 

“몰골만 겨우 사람 꼴” 갖춘 폐병장이, 어디 쓸까 싶겠지만 그의 “미친 듯 타오르는” 눈매는 대단한 흡인력으로 뭇 여자들의 여성성을 흠뻑 빨아들입니다.

스물 갓 넘은 처녀, 그를 살리기 위해 뭔 짓은 못하겠습니까.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미친 듯 타오르는 눈매”를 시발로 시작하는 이 서사의 곳곳에서는 관능과 애욕의 냄새가 납니다. 뱀 잡고 개 잡는 여자가 스물 갓 넘었다는 처녀라는 사실이 그 밀도를 더 짙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마지막 두 행으로 시인은 완전 반전에 성공합니다.

 

해방되자 징용 갔다 돌아온 할아버지, 한국전쟁에 나섰다 돌아온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할미 어미가 허벅지를 베어 선지피를 먹인 것에 비하면 뱀 잡고 개 잡는 게 뭐 대수겠습니까. 내 남자만 특별대우를 받은 게 아닙니다.

 

이 시가 만든 서사의 끝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관능〉이 아니라 아마 〈모성〉입니다.

 

“세상의 모든 남정네들에게 버림받고, 그렇게 버림받아 자유로운 몸이 되어 드디어 세상의 모든 남정네들을 제 살붙이로 여기는 진주 남강이나 혹은 낙동강 하류으 어느 가난한 선술집의 주모”(송기원)가 써냈을 법한 시들을 마구 써댄 20대 초반 허수경 시인의 시에는 이런 시도 있습니다.

 

사식을 먹으며

 

그리 모질게 매질을 당하고도 솟증이 돋아 입탐을 하네 돼지비계 두둥실 떠 있는 순대국이나 한 사발 가슴 녹여 내며 들이켜고 싶으이 방아냄새 상긋한 개장국에 밥을 말며 장정들 틈에 끼여 앉아 주는 대로 탁주도 뿌리치지 않고 싶으이 제아무리 매질 오질토록 닥쳐봐라 내 입맛 하나 온전히 다칠 수 있으랴 두레마을의 아낙으로 살점 일구어내고 연애도 달덩이 같은 아들도 낳아

이보시게 아들도 이녁들에게 매질당하게 키우것네

(허수경,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실천문학사, 1988/2010, 38면)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려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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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학교 - 이정록 시집
이정록 지음 / 열림원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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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어머니와 한 몸이 돼, 아들은 오른손만 빌려드렸을 뿐 오롯이 엄마가 써내려간 시집《어머니학교》를 낸 이정록 시인이 이번에는 시집 《아버지학교》를 냈습니다. 아버지의 경우에도 엄마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아(우연한 기회에 운 좋게 얻어들은 극비사항에 따르면), 시인은 쉰 살이 된 올해 쉰여섯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아 단 수무엿새 만에” 이 시집의 시를 몽땅 써냈습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교수가 지난번 시집 발문에서 “《어머니학교》가 하나의 성장서사가 된다”고 정곡을 찌른 바 있는데 이번에는 시인 스스로가 “두 시집을 나란히 읽어보니 〈성숙시집〉같다. 생의 여로가 그렇게 이어진 듯싶다”고 합니다.

 

 

이정록 시인의 여러 지인들이 진반농반으로 하듯, 시인의 체질을 엄마에게서 물려받았다면 올곧은 천생 진국인 성품은 아버지의 다음과 같은 평생의 가르침 덕분인 듯합니다.

 

“모든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유머러스하면서도 슬기로운 삶으로 치면 《어머니학교》가 한층 윗길이지만 곧 죽어도 사내의 삶으로 치면 단연 《아버지학교》입니다.

72편의 시를 실었던 엄마시집에 비해 아버지시집은 56편밖에 싣지 않았지만 있어야 할 덕목은 다 갖췄습니다. 56편의 시를 다섯 부분으로 나눴는데 소제목만 봐도 어떤 시집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끌립니다.

 

1. 가슴은 식어야 넓어지는 겨

2. 똥구덩이에 빠져도 기죽지 마라

3. 큰 걸음으로 건너가라

4. 아버지의 마음 한쪽을 상속받았습니다

5. 얼음지붕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얼음으로 살아야 한다.

 

산문 3편이 묶인 한 부분이 있는데 이곳의 소제목은 딱 엄마 취향을 닮았습니다.

 

6. 사랑을 하면 가슴팍에 짐승이 돌아다니고 귀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학교》,《아버지학교》두 시집은 무더운 여름에도 잘 읽힐 시집입니다. 강추합니다.

 

털신

아버지학교 52

 

군청 앞 백화식당에서 글 쓰는 벗들과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고 있는데, 흘깃흘깃

나를 훔쳐보던 도우미 아주머니가 제 옆에 앉았습니다.

미남을 알아본다고 친구들이 농을 쳤습니다. 저를 아세요?

여쭙는 순간, 십여 년 전의 안개천지라는 식당이 떠오르고

사십여년 전의 뾰족구두가 떠올랐습니다.

이 자字, 경 자, 연 자 쓰는 분을 아세요?

네, 아버님이십니다. 정말 닮았다 했어요. 근데, 요즈음 뵐 수가 없어서요.

작년 봄에 돌아가셨어요. 순간, 낯빛을 파르르 떨며 무릎을 꿇고는

제게 술잔을 건네는 거예요. 한 손으로 편하게 받아요.

이 잔은 아버님께 올리는 겁니다. 저도 무릎 꿇고 잔을 건넸지요.

한 손으로 따르란 걸 두 손으로 올렸지요. 아들로서 올리는 거예요

찡긋 웃어 보였지요. 돌아가신 날짜랑 선산도 알려드렸어요.

당연히 어머니에겐 비밀로 부쳐야죠. 하늘나라로 부치는

어머니의 편지가 끊기면 많이도 심심하고 궁금할 테니까요.

그분을 뵌 지도 십수 년이 흘렀네요.

요번 기일에 내려오면 군청 앞 백화식당에 들러보세요.

찾아갈 때에는 저처럼 뿔테안경에 파마머리로 가세요.

제 나이 쉰이고, 아버지는 쉰여섯에 떠나셨으니 속을 거에요.

그분 연세도 일흔이 넘었으니 주름졌다고 실망하진 마세요.

만나면, 아직도 경 자, 연 자, 쓰는 분이 그리워요?

개구쟁이처럼 몇 번이고 물어보세요. 저는 주로 청바지를 입어요.

저도 들러볼게요. 그럼 하루에 두 번이나 왔냐고

기뻐하시겠지요. 그 옛날처럼 돌아서서 눈물 찍으시겠죠.

참, 그분은 이제 뾰족구두 대신에 털신을 신어요.

어머니처럼 눈자위가 젖어 있고요.

(이정록, 《아버지학교》, 열림원, 2013, 92-93면)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애이불비哀而不悲,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고 했습니다. 속으로는 슬퍼도 겉으로는 슬프지 않은 척, 아프지 않은 척해야한다는 말이지요.

 

아버지가 오십대에 다니시던 술집의 아주머니를 아들이 오십대가 돼 만나는 자리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애인(실은 아들도 아는 아주머니, 〈삐딱구두〉참조)을 아들이 만나 술잔을 주고받는다는 줄거리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시는 그러나 제대로 된 산문으로 늘어놓으면 웃음과 눈물을 함께 보장할 수 있는 한 편의 스토리가 됩니다. 이 도우미 아주머니, 어린 시절, 아버지가 집에 데리고 들어왔던 〈삐딱구두〉입니다. 대를 이은 길고 긴 인연입니다. 그 자세한 내용은 《어머니학교》에 실린 다음 시를 읽어보세요. 더 절절한 스토리가 가능합니다.

 

삐딱구두

어머니학교 66

 

뭔 일 저질렀나?

늦기는 해도 외박은 없던 양반인데 말이여.

일이 손에 안 잡혀. 물동이를 이어도 똬리가 쪽머리에 걸치고

고추 순을 집어도 가지째 꺾어대야. 아니나 다를까 저물녘에

개똥참외처럼 노란 택시 한 대가 독 오른 복어처럼 들이치더구나.

반가운 마음하고 속상한 마음을 썩썩 비벼서 한마디 쏴붙이려는데

삐딱구두에 명태알 같은 스타킹이 택시 뒷문에서 나오는 거여.

먼저 내린 아버지가 양산을 펼쳐주며 눈꼬리에 은방울꽃을 매달더구나.

들고 있던 연장을 휘둘러도 시원치 않을 판에 내가 뭔 죄를 졌다고

땀 닦고 치마에 검불을 떼어내며 머리를 조아렸는지 몰라.

아버지가 누추한 내 몰골에 혀를 차더니, 작은댁 출출할 테니

조기 굽고 닭 잡아서 뚝딱 밥상 차리라고 으름장을 놓더구나.

머리로는 쥐약에 살충제를 간간하게 섞어서 국 끓이고

된장 독 구더기만 꺼내다가 호박전을 부쳐주고 싶었다만

이 악물고 소찬이나마 정갈하게 한 상 차려 올렸지.

뭔 구경났다고 빡빡머리 새끼들은 어미 입성 한번 보고 그쪽 한번 보고

그 양반은 애들 차례로 불러서 동전닢 뿌리며

구정물에 양조간장 치듯 싱긋싱긋 웃어대는데 환장하겄더라.

숟가락 놓자마자 삐딱구두를 툇마루 옆 토끼장으로 불렀지.

토끼가 먼저 울었는지 붉은 눈으로 쳐다보더구나.

앞길이 창창한 처자가 우리 집에 제 발로 들어와줘서 고마워.

논은 열일곱 마지기고 밭도 몇 뙈기 있으니 밥은 굶지 않을 거여.

종갓집이니 제사와 시제는 당연하고 한식 차례도 잘 부탁하네.

내가 밭이 성해서 삼삼 이녀 골고루 뒀으니 후손은 걱정 말게.

이미 들었겄지만 시어머님이 두 분이니 공경심이 곱으로다 필요할 거여.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있으니 꼭 들어줬으면 하네.

자네는 이제부터 농사짓고 밥하고 빨래하며 살아가야 할테니

그 필요없는 삐딱구두와 양산은 나에게 선물로 줌세.

나도 고것만 있으면 읍내 제일은행원도 사귈 수 있겠구먼.

어뗘? 빛바랜 양산과 구두 한 켤레를 비싼 논밭하고 맞바꾸면

괜찮은 거래 아닌감? 내가 말의 시치미도 거둬들이질 안 했는데

바깥마당으로 나가서 기다리던 택시에 겨들어가더라고.

한 시간 안에 저 여우를 다시 태우고 나가게 될 거라고

택시기사와 내기를 걸었거든. 돈을 걸었지만 어떻게 받겄어.

삼십 년도 더 지난 얘기여. 지금 읍내 제일은행에 손녀가 다니는데

들를 때마다 나 혼자 머쓱하고 불콰해지고 그랴.

그때 삐딱한 인연을 바꿔치기 했으면 어찌 됐을까, 하고.

(이정록, 《어머니학교》, 열림원, 2012, 113-115면)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활과 리라>에도 올려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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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아픔 - 투신자살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의 시집
프리모 레비 지음, 이산하 엮음 / 노마드북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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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 -〈천국과 지옥〉, 교수는 지옥행이겠지요!

 

천국과 지옥

 

누가 지옥으로 가야되는지 말해주겠다.

미국 언론인들과 정치인들, 회계사들과 재정관들

종교인들, 기업 경영인들과 대부분의 의사들

수학선생들과 고양이들

그리고 쓸데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

 

천국으로 가야할 사람들도 말해주겠다.

아이들을 비롯한 구두닦이 소년들과 연인들

어부들과 철도노동자들, 와인감별사들과 병사들

러시아인들과 발명가들, 말들과 닭들

그리고 새벽 출근전차에서 하품하며 조는 사람들.

(프리모 레비, 《살아남은 자의 아픔》, 이산하 편역, 노마드북스, 2011, 29면)

 

“그럼 대학교수는? 정원 초과로 학생을 못 채운 죄, 멀쩡한 젊은이 데려다 취업 못 시킨 죄, 인센티브에 목을 매는 죄, ‘삼성’에 취직해야만 행복한 거 아니라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못한 죄, 학교 부실의 원인이 총장직선제에 있다는 것을 도통 납득하지 못한 죄 등등, 교수는 당연히 지옥행입니다.

다시 한번.

‘가난한 이들의 외침이 항상 정의롭지는 않지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정의가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하워드 진이 《미국민중사》 앞쪽에서 인용한 대목입니다. 이 말을 잊지 않고 살려고 애쓰렵니다.”

 

 

 

 

 

 

 

 

 

 

 

 

 

다음은 이 시집 편역자 이산하 시인의 해설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자신이 존경하는 작가이던 단테의 《신곡》을 여러 글에서 인용했다. 은근히 사회풍자적인 이 시에서 단테가 지옥과 천국에 갈 인물들을 분류한 것과 그로부터 600여년 이후에 프리모 레비가 분류한 것을 서로 비교해보면 상당히 흥미롭다.

참고로 단테가 ‘지옥’으로 보낸 죄수들은 ‘신을 모른다는 이유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지식인들과 탐욕적이고 부패한 정치가와 폭력배들, 바람둥이와 인신매매범들, 사기꾼과 배신자들, 고리대금업의 금융업자와 매관매직의 교황 및 고위성직자들이다.

그리고 천국으로 보낸 인물들로서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성 프란체스코, 신의 농부 도미니쿠스, 율법주석가 엔리코 디 수사, 수도원장 우고, 여러 스콜라 학사들, 그리고 로마법대전을 만든 비잔틴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명판결을 내렸다는 솔로몬왕 같은 법률가들이다.

서울대 법대 안경환 교수가 말했다.

“단테처럼 법률가들을 천당으로 보내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극히 드문 일이며, 단테의 신곡은 ‘神曲’이 아니라 오히려 ‘法曲’이다.”

‘바티칸의 금서’ 1호인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가 말했다.

“나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천국보다 지옥에 더 가고 싶다. 왜냐하면 천국이 주변환경이야 훨씬 좋겠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재미있는 구라들(정치가들)은 지옥에 다 모여서 신나게 떠들고 있을 테니까!”

(프리모 레비, 《살아남은 자의 아픔》, 이산하 편역, 노마드북스, 2011, 30면)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 이탈리아의 작가이자 화학자인 레비는 1943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끌려갑니다. 1945년 10월, 평균생존기간이 3개월인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집으로 돌아온 그는, 그러나 1987년 4월 11일 돌연, 투신자살합니다.

 

[더 읽기]

 

생각하지 않은 죄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바람이 평원을 가로질러 자유로이 불어오고

거센 파도가 끊임없이 해변으로 몰아친다.

인간은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땅은 그에게 꽃과 열매를 선사한다.

인간은 고된 노동과 기쁨 속에 살아가고

희망과 공포 속에서 더 고귀한 자손들을 남긴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의 저승사자인 그대가 나타났고

짐승처럼 우리들은 죽음의 쇠사슬에 묶여버렸다.

우리가 만난다면 그대는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여전히 신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겠는가?

그럼 어느 신에게 말인가?

또 기꺼이 무덤에라도 뛰어들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미완성의 작품을 아쉬워하는 예술가들처럼

아직 살아있는 1300만의 생명에 대해 통탄이라도 할 텐가?

-죽음의 화신이여

 

우리는 그대에게 결코 한 순간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며

그 어느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장수하기를 바란다.

단지 500만 년 동안만 불면으로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가스실에서 숨져간 모든 이들의 신음과 비명소리가

매일 밤 그대를 방문해 강한 위롤르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프리모 레비, 《살아남은 자의 아픔》, 이산하 편역, 노마드북스, 2011, 31-32면)

 

이산하 시인의 해설입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 총책임자였다. 종전 후 1급 국제전범으로 수배되자 아르헨티나로 도피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15년간의 끈질긴 추적으로 1960년에 체포된 그는 예루살렘 나치전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62년에 처형되었다.

법정 최후진술에서 아이히만이 말했다.

“나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며, 저 신 앞에서는 유죄지만 이 법 앞에서는 무죄다.”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며 말했다.

“의심하지 않은 죄, 생각하지 않은 죄, 그리고 행동하지 않은 죄......그것이 피고의 진짜 죄다.”

미국 ‘뉴요크’ 특파원으로 참관한 방청석의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했다.

“자기 생각 없이 남의 생각대로 산 것과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가장 큰 죄다.”

이날, 프리모 레비는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관하려다 끝내 가지 않고, 혼자 조용히 이 시를 썼다.

(프리모 레비, 《살아남은 자의 아픔》, 이산하 편역, 노마드북스, 2011, 33면)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이히만, 나치전범 재판과정을 통해 드러난 그의 모습은 몸과 마음 속속들이 살인마, 악마, 피에 굶주린 흡혈귀가 아닌 “근면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391면)의 인간이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통해〈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악이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음”을 아렌트는 우리에게 말하려고 했습니다. 잘못된 일을 저지른 고위직 공무원들이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 오직 지시에 따른다’라며 자신들을 옹호하는 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맥락의 일들입니다.

〈악의 평범성〉, 아이히만의 경우를 제대로 알고 싶은 분들은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달린 한나 아렌트의《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일반인을 위해 신문에 분재한 아이히만 재판 참관기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다음은 이 책의 본문 마지막, 아이히만이 교수형을 당하는 장면을 옮긴 글입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아주 근엄한 태도로 교수대로 걸어갔다. 그는 붉은 포도주 한 병을 요구했고 그 절반을 마셨다. 그는 그에게 성서를 읽어주겠다고 제안한 개신교 목사 윌리엄 헐 목사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는 두 시간밖에 더 살 수 없기 때문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감방에서 형장에 이르는 50야드를 조용히 그리고 꼿꼿이 걸어갔다. 간수들이 그의 발목과 무릎을 묶자 그는 간수들에게 헐렁하게 묶어서 자신이 똑바로 설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검은색 두건을 머리에 쓰겠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나는 필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는 완전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말로 남긴 기괴한 어리석음보다도 이 점을 더 분명히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을 믿는 자라고 분명히 진술하면서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며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일반적인 나치스 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는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348-349면)

 

아우슈비츠의 소녀

 

타인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 속에 함께 산다.

어린 폼페이의 소녀여!

하늘이 잿빛으로 변하며 세상이 무너질 때

다시 자궁 속으로 회귀라도 하듯

넌 뼈만 남을 때까지 어머니의 몸을 끌어안고 있구나.

검은 화산재는 노래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던

너의 집 창문으로 일제히 침투했다.

그 재는 2천년의 세월이 흘러

가냘픈 소녀들의 육체를 영원히 덮어버렸다.

이처럼 넌 지금도 우리와 함께

회색 담장 속에 갇혀 끝없이 고통 받고 있구나.

 

내일이면 굴뚝의 검은 연기로 피어오를지도 모를

도축장 같은 수용소에 갇혀 날마다 몰래 일기를 쓴

13살 어린 아우슈비츠의 소녀여!

가녀린 그대 가슴 속에는 검은 재만 흩날릴 뿐

이미 안네의 짧은 생애는 일기장에서 끝나버렸구나.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리틀 보이’의 검은 불바다에

살점 하나 없이 완벽하게 사라져버린

어린 히로시마의 소녀여!

네 영혼이 아직도 검은 구름처럼 떠돌며 울부짖는구나.

더러운 자본의 권력, 끊임없는 탐욕의 침략자들

지금도 살육의 광풍을 은밀히 준비하는 전쟁광들이여

그대들은 그동안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고통들만으로는 정녕 부족하단 말인가.

한 개의 손가락으로 폭탄단추를 누르기 전에

잠깐만, 아주 잠깐만 멈추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타인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다.

(프리모 레비, 《살아남은 자의 아픔》, 이산하 편역, 노마드북스, 2011, 35-36면)

 

우리 인간들에게 큰 고통을 안긴 세 가지 재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폼페이 화산 폭발, 아우슈비츠 대학살, 히로시마 원폭 투하. 하나는 자연이 내린 재앙이고 둘은 인간들이 저지른 재앙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들, 하나는 우리 편이고 하나는 적의 편입니다. 자연/인간, 너/나 구분 없이 이 세상의 모두가, 모든 것이 인간에게 재앙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고통〉.

살면서 저절로 깨우치게 된 이치가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 온갖 만물 가운데 나와 상관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이치입니다. 인간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살고 있는데, 언젠가부터 알게 됐습니다. 지구상에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내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지구 자체가, 자유롭지 못하면 내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고통 받는 사람이 있으면 내 행복은 참된 행복이 아닙니다.

타인의 행복이 내 행복입니다.

“타인의 고통은 내 고통”입니다.

타인의 자유가 내 자유입니다.

 

(같은 글을 네이버 블로그 <정승옥의 활과 리라>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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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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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대목]

 

10명의 군인들이 착검한 총을 들고 구덩이 삼면을 에워쌌다. 나머지 둘은 스키 폴만큼이나 긴 죽창을 쥐고 철장 문을 열었다. 덤프의 적재함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개들이 구덩이로 떨어져 내렸다. 처음엔 몇 마리씩, 곧 무더기로 떨어진 개들은 곧장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누워 자빠진 동료의 몸을 딛고 서로의 머리를 밟으며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구덩이를 에워싼 군인들은 착검한 총 끝으로 개들을 찍어서 구덩이로 다시 떨어뜨렸다. 죽창 군인 둘은 철장 벽에 붙어 버티는 개들을 창으로 찍어 떼어냈다. 큰 개, 작은 개, 검은 개, 흰 개들이 눈을 찍히고, 뱃가죽이 뚫리고, 등이 꿰인 채 핏물을 내뿜으며 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백구 한 마리가 창살을 발로 움켜쥐고 버둥거렸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피투성이가 돼서 구덩이로 떨어지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다른 한편에선 굴삭기가 구덩이를 덮기 시작했다. 개들은 떨어져 내리는 흙과 쓰레기 더미 속에서 울부짖었다. 그 울음이 윤주에겐 사람의 말로 들렸다.

 

살려주세요.

 

흙덮기가 끝났다. 굴삭기와 군인들이 떠났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땅거미가 깔리는 벌판 밑에선 개들의 비명이 들끓었다. 땅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온 벌판이 울부짖고 있는 것 같았다.

(정유정, 《28》, 은행나무, 2013, 240-241면)

 

[북 리뷰]

 

《7년의 밤》의 작가 정유정이 신간을 냈습니다.

 

 

 

 

 

 

 

 

 

 

앞에 뽑은 [이 한 대목]으로 눈치 챈 분들이 많겠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우선 2010년부터 2011년 상반기까지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역을 휩쓴〈구제역 사태〉를 떠올렸습니다. 그때 나는 구제역에 걸린 돼지들을 살처분(산 돼지들을 생매장하는 것)하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본 적이 있는데 돼지들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습니다. 임산부나 노약자는 그 동영상을 보지 말라는 경고문까지 있었을 정도이니 그 끔찍함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괴물과도 같은 전염병에 일격을 당함으로써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 차단된 도시에서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는 처절한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가상의 도시 이름이 ‘눈부신 햇빛’[화양]이라는 것 때문에 ‘빛고을’인 〈광주〉를 또한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페스트로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도시 오랑시에서 동기야 어찌됐든 아름다울만큼 치열하게 구조활동을 벌이는 인간군들의 휴머니즘이 한껏 발하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페스트》를 떠올렸습니다.

 

2014년 1월 말, 가상의 도시인 경기도 화양시에서, 원인도 치료법도 알 수없는, 걸리면 회복 불능인 ‘빨간 눈’이라 불리는 인수공통전염병이 발생하여 28일간 도시를 지옥으로 만듭니다.

 

화양華陽시.

다섯 개 산과 열두 개 봉우리 안에 들어앉은 분지도시로 도로 하나로 서울 북쪽과 내통하듯 몸을 맞댄 도시의 하늘이 갑갑한 도시입니다.

 

서재형(35).

알래스카의 개썰매대회에 참가한 서재형은 고립무원의 설원에서 굶주린 늑대떼를 만나 썰매를 끄는 개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목숨을 구합니다. 귀국한 서재형은 11년이 지난 지금 ‘드림랜드’라는 유기동물보호소 겸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수의사가 돼 있습니다. 동물을 포함한 ‘생명을 향한 진정어린 애정’으로 여론과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어 후원단체까지 생겨납니다.

 

“나는 때로 인간 없는 세상을 꿈꾼다. 자연의 법칙이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곳, 모든 생명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계, 꿈의 나라를. 만약 세상 어딘가에 그런 곳이 있다면 나는 결코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이다”(28면)

 

김윤주.

쌩촌 닭집 딸로 자라 신문기자가 된 김윤주는 진정 동물을 사랑하는 서재형이 잔인하고 비인간적 개썰매 대회 참가자이며 개들의 죽음을 담보로 목숨을 구한 인간임을 말해주는 자료를 익명의 제보자에게서 받아 그것을 폭로해 서재형을 졸지에 비열한 인간으로 매도합니다.

 

박남철

화양의료원장이며 여러 마리의 개를 기릅니다. 집에서, 식구들에게는 그가 곧 법입니다.

 

박동해

박남철의 아들. 형과 여동생에 비해 똑똑하지 못하다고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애정결핍자로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버지가 아끼는 개를 잔인하게 린치하여 죽이려 합니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돼있습니다.

 

한기준

화양 동부소방서 구조팀장으로 부인(박은희)과 딸(한유빈)이 개떼에게 물려 죽는 참사를 당합니다.

 

만호공파 노기사, 노수진, 노현진.

노기사는 한기준이 설악산 등반 중 급거 귀대할 때 얻어 탄 화물차 기사이고 수진, 현진은 쌍둥이로 수진은 화양의료원 간호사이고 현진은 학사장교 출신으로 화양시에 투입된 11공수 장교입니다. 수진은 한기준의 아내와 딸이 개떼에게 물려죽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들을 병원으로 옮겨 왔습니다.

 

쿠키.

박남철의 개로 아들 동해가 린치를 가해 죽이려 하는 것을 서재형이 구해와 함께 지내는 썰매개입니다.

 

스타.

정신 나간 개 수집광의 지하실에서 구출한 썰매개로, 방향을 찾는 데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링고.

챔프 투견장에 끌려가 너의 죽음이 곧 내 삶임을 터득한 팀버 울프로, 늑대의 야성을 지니고 있고 내 안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개입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들입니다. 사람과 동물이 서로 전염시키는 괴질, ‘빨간 눈’이 속수무책으로 인수人獸 구분 않고 목숨을 앗아가는 화양시에서 신기할 만큼 ‘촘촘하게’ 얽히고설키는 이들 사이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전부입니다.

 

《7년의 밤》때에도 그랬지만 역시 정유정 작가는 한편의 장편소설을 〈만들어내는〉 솜씨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7년의 밤》, 그 내용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 소설을 읽으며 필연의 얼개를 갖추지 않고도 어쩌면 이렇게 소설을 짜임새 있게, 그리고 이게 중요한데, 아주 〈재미있게〉만들 수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착착 들어맞는 게 부자연스러울 수 있는데 왜 그렇지가 않을까 궁금했습니다. 남자 주인공은 젊었을 때 야구선수였고 자리가 바로 ‘포수’였습니다. 저렇게까지 용의주도할 수는 없을 텐데, 논리적일 수는 없을 텐데 하는 선입견을 내가 매번 떨쳐 낸 것은 바로 야구경기에서 ‘포수’가 하는 역할을 주인공이 사건/스토리의 흐름에서도 똑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관계 속에서 스토리가 전개되는 게 아니라 포수였던 주인공이 스토리를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28》도 전작 못지않은 짜임새를 갖추고 재미로 독자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쉬운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의 순서를 트집을 잡는 데서 시작하겠습니다.

 

소설 속에 나타난 서재형의 성격으로 보아 다큐멘타리를 제작할 때 개썰매 대회 이야기를 감췄다는 것이 많이 생뚱맞습니다. 그것이 꼭꼭 숨겨야 할 범죄행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개를 살리자고 사람이 죽는다? 이게 권장할 일입니까. 사람과 개들 중 한 쪽은 죽어야 한다면 개들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었을까요?

 

김윤주 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썰매 대회의 참사를 제보 받고 그것을 숨긴 서재형을 못돼먹은 개장수로 전락시켜야 했을까요, 소설 속에 드러난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 왜 그 사실을 서재형이 말하지 않았을까, 파렴치한이라서 이었을까, 드림랜드를 운영하면서 한 일로 보면 자기 방식으로 죽은 개들에게 속죄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그 사고는 서재형의 비열한 인간성이 불러온 참사가 아니라 불가항력으로 다가온, 지울 수 없는 그래서 꺼내기 싫은 깊은 상처 아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을 것 같습니다.

 

소설을 알래스카 설원에서 열리는 개썰매대회라는 이국적이고 낯선 장면으로 시작하고 늑대의 공격을 받아 일어난 참극을 덧붙임으로써 작가는 독자를 단숨에 소설 속으로 끌어당깁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작가는 이 참극을 주인공의 상처가 아니라 씻을 수 없는 파렴치한 죄과로 사용합니다. 〈착한 사람인지 알았는데 나쁜 과거가 있더라〉,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아주 흔히 써먹는 통속적 수법입니다. 주인공의 상처가 드러날 때 독자들이 비극성을 느끼지 파렴치함이 드러나면 모멸감을 느낍니다. 이 소설이 대중소설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시비가 걸릴 수 있는 대목입니다.

  

왜 알래스카 설원에서의 참사를 이렇게 쉽게, 통속적으로 사용했는지 나는 많이 아쉽습니다.

 

‘알래스카에서 서재형에게 참사가 있었다-귀국하여 수의학을 전공해 동물병원을 차렸다-생명에 대한 진정한 애정으로 주변의 호감을 샀다-참사가 매도되는 바람에 파렴치한으로 추락하다’

 

‘빨간 눈’ 사태가 벌어지자 이런 과정이 있었으나마나가 됩니다. 참사를 폭로함으로써 서재형을 매도한 김윤주 기자와도 갈등하는 관계 설정 없이 그냥 사건 속으로 함께 빨려 들어갑니다. 서재형에게는 일생일대의 문제가 작가에게는 흥미진진한 도입부를 위한 소재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한기준은 화물차 기사 만호공파 노씨의 트럭을 얻어 타고, 노씨의 딸인 간호사 노수진은 한기준의 아내와 딸 참사를 목격, 그들을 병원으로 후송하는 것으로 관계를 설정한 것이 우연 같지 않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할 경우 특성상 등장인물을 느슨하게 늘리기보다는 최소한으로 해 관계를 얽히고설키게 하려는 치밀한 계산으로 읽힙니다.

 

아마 이러한 트집들은 정유정 작가가 소설에서 보여준 다음의 뛰어난 업적에 비하면 사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눈여겨 본 것은 〈분노의 절정〉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한편에는 개들이 아내와 딸을 물어 죽인 ‘한기준’, 애정결핍자로 사이코패스가 돼 아버지가 아끼는 대상을 망쳐 놓으려는 ‘박동해’가 있습니다. 다른 한 편에는 사랑하는 스타를 인간에게 잃은 야성의 늑대개 ‘링고’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고 다른 점도 있습니다. 공통점은 ‘분노의 절정’을 드러내는 방식이 오로지 ‘복수’입니다. 다른 점은 한기준과 박동해는 복수의 대상이 무분별합니다. 한기준만 해도 아내와 딸을 어느 개가 물어 죽였는지 제대로 따져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링고는 복수의 대상이 선택적입니다. 스타를 해친 상대로 제한돼있습니다(물론 개들을 살처분하는 장면을 목격한 다음에는 링고의 〈분노의 절정〉내용이 달라져 개의 원수는 인간으로 설정돼 복수의 대상도 인간 일반으로 넓혀집니다). 또 하나 공통점은 모두가 ‘동물’이라는 점이고 다른 점은 한기준과 박동해는 ‘인간’이고 링고는 ‘개’라는 점입니다.

 

정유정 작가의 〈비극적 세계관〉이 드러나는 게 바로 ‘분노의 절정’을 드러내는 〈복수의 방식〉에서입니다.

 

북 리뷰의 시작에서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2010-2011년의 〈구제역 사태〉, 1980년 〈5월의 광주〉를 떠올렸다고 했습니다(책 말미에 있는〈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 소설의 “시놉시스를 쓴 건 돼지 생매장 동영상을 접하던 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구제역 사태’를 연상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5월의 광주’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광주 전역에서 타오른 저항의 불길과 비교할 때 화양에서 있었던 ‘빨간 눈’에 맞선 싸움의 내용이 지리멸렬한 게 아니냐 할 수 있고 틀린 지적도 아닙니다.

 

나는 작가가 이 소설에서 ‘5월의 광주’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내비친 것으로 생각하며, 바로 그것을 통해 작가의 ‘비극적 세계관’을 읽습니다. 지금-여기의 현실세계에서 돈과 정치의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의 실체를 작가는 꿰뚫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폭력에 맞선 저항세력이 사라진 적은 없으나 결국은 〈구색 맞추기 용〉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냐 하는 뼈아픈 절망감에서 작가가 자유롭지 않은 것 아닐까 짐작합니다. ‘5월의 광주’에서 저항한 시민의 진정성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판세는 결판 나 있었던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게다가 ‘구제역 사태’에서 벌어지는, 살처분을 포함한 기가 막힌 일들을 겪으면서 인간에 대한 모멸감을 맛본 것 아닐까 합니다. 이런 것들이 이 소설이 엮여지는 바탕 같습니다.

 

이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는 끔찍하지만 이런 게 아닐까 합니다.

“지금-여기의 인간세계에는 당위에 대한 성찰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로지 생존만이 남아 있다.”

 

등장인물 서재형을 소개하면서 인용한 대목입니다.

 

“나는 때로 인간 없는 세상을 꿈꾼다. 자연의 법칙이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곳, 모든 생명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계, 꿈의 나라를. 만약 세상 어딘가에 그런 곳이 있다면 나는 결코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이다”(28면)

 

작가의 비극적 세계관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인용문입니다. 서재형은 이상향을 그려놓고 막상 자기는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마무리 짓습니다. 아마도 누구든 한 인간이라도 그 세계에 발을 들여 놓으면 이미 그 세계는 〈꿈의 나라〉가 아니게 된다는 뜻이겠지요. 한기준을 구하고 링고와 함께 죽는 서재형,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서재형, 인간 없는 세상으로 가다.

 

서재형은 〈꿈의 나라〉에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자연의 한 생명〉으로서 이었을 것입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함께 읽는 것도 재미있는 책읽기의 한 방식일 것입니다.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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