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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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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 19로 인해 전염병에 대한 관심이 커지다 보니 이에 관련된 책을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우선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설 중에서는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였다. 책을 사놓고서 바로 읽지는 못했는데, 그 사이에 《페스트》는 TV ‘책을 읽어드립니다’ 프로에 한번 방송되더니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계속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외국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지속된다고 하니 가히 카뮈의 재발견이라 할 만하다.

사실 카뮈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약간의 로망이 있었다. 바바리코트 깃을 올리고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에서 제임스 딘의 반항아적인 모습을 떠올렸고, 그가 말했던 ‘부조리’도 결국은 기존사회의 모순을 온 몸으로 거부하는 저항의 지식인이었기에 가능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방인》은 부조리의 본질을 부각하다 보니 다소 어둡고 난해한 편이다. 반면에 《페스트》는 실천적 행동주의자인 리유를 내세워 ‘페스트’라는 부조리한 현실과 정면으로 승부하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제공한다.

이 소설에는 ‘서술자’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서술자’는 이 책의 주인공인 의사 리유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1인칭 ‘나’를 사용하지 않고 굳이 ‘서술자’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의사 리유의 시점에 한정하지 않고 주요인물의 시선으로 확장하여 보다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이 이야기는 지도로 보면 아프리카 대륙 맨 위의 알제리 (당시는 프랑스 영토)의 조용한 해안도시 오랑에서 발생한 최악의 전염병 페스트에 대한 저항의 연대기이다.

1940년대의 어느 날, 오랑시에서 쥐가 한 두 마리씩 죽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주민들의 원인 모를 사망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거리에는 죽은 쥐들이 넘쳐나게 된다. 의사 리유는 시 당국에다 전염병의 위험성을 알리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않는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 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말한다. "오래가지는 않겠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야." 전쟁이라는 것은 필경 너무나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같은 것이다. - p54

악몽에서 악몽을 거듭하는 가운데 평범한 일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쪽은 대개 휴머니스트들이다. 대비책을 세우지 못하면서 사업을 계속하고 있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p55

페스트가 막 창궐하기 시작할 즈음, 치명적인 전염병이 도시에 번지기 시작하는 데도 시민들은 일상의 삶의 형식을 유지하기 위해 평소의 생활패턴에 매달린다. 이 전염병이 자신을 비극으로 몰아넣을 것이라고는 전혀 믿지 않았다. 그러나 페스트는 점차 심각해지고 정부는 오랑을 폐쇄하기에 이른다.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오랑의 시민들까지 산 채로 도시에 갇히게 된 것이다.

폐쇄된 도시에서 사람들이 처음 겪은 것은 가족 또는 연인과의 생이별, 그 다음은 귀양살이를 하는 듯한 옛 생활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하지만 점차 페스트로 인해 사람이 죽어나도 슬퍼하는 마음은 무뎌지고, 다음 차례가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도 서서히 적응하게 된다.

페스트로 인해 시민들의 희생이 따른 한참 후에야 시 당국은 도시폐쇄의 결정을 내리고 이 몹쓸 전염병을 물리치기 위한 인간 군상들의 응전과 저항이 시작된다.

이 책에는 의사 리유 주변에서 페스트와 대항하여 필사의 항전을 펼치는 여러 인간 군상들이 등장한다. 외지인이지만 보건대를 만들어 리유를 돕는 타루, 오랑시의 말단서기 그랑, 프랑스에서 취재차 왔다가 발이 묶인 신문기자 랑베르, 페스트가 사악한 인간에게 내린 신의 형벌이라 믿던 파늘루 신부 등이다.

그때까지는 자기들의 고통을 한사코 집단의 불행과 떼어서 생각해 왔지만 이제는 두 문제를 섞어서 생각해도 좋다고 여기게 되었다. 기억도 희망도 없이, 그들은 현재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 p239

어떤 노력으로도 이 불행한 상황을 벗어 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신앙인지, 아니면 사랑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리유와 그의 친구 타루는 일단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을 멈추지 않기로 한다.

동료 의사 카스텔은 여러 가지 혈청을 통해 면역제 실험을 계속하지만 뚜렷한 진전이 없다. 그러던 어느날 판사 오통의 어린 아들이 페스트에 걸려 입원을 하자 병원은 바로 격리가 되고 비극은 극에 달한다. 아이는 결국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병균에 침식된 채 죽게 되고 이를 옆에서 기도와 함께 지켜보던 파늘루 신부도 큰 혼란에 빠진다.

아이의 죽음을 지켜보던 리유와 주위 인물들에게 파늘루 신부는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라는 말을 한다.

“아닙니다. 신부님. 나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고 있어요.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 놓은 이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 -285p

카뮈 본인은 아니라고 했지만 주변에서는 그를 무신론적인 실존주의자라고 평하는데 이에 대한 사상이 잘 나타나있는 문장인 것 같다.

그러다 결국, 페스트가 ‘말없이 자신이 나왔던 알 수 없는 어떤 야수의 굴로 들어가며’ (358p)조금씩 줄어들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사망 통계를 작성하는 오랑시의 기록이 차츰 줄어들더니 마침내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고 극으로 치닫던 페스트가 기적처럼 사라지게 된다. 10개월여의 봉쇄령이 드디어 풀린 것이다.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 사람들을 보면서 리유는 페스트가 끝났더라도 그것이 인간에게 가르쳐 준 교훈과 흔적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문장을 남긴다.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 소리에 귀를 귀울이면서,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페스크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지하실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02p

알베르 카뮈는 소설 《페스트》를 통해 공포와 죽음, 이별의 아픔 등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극한의 고통과 절망을 그려내었다. 그래서 《페스트》는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이자 재난 소설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이 책을 덮고서 우리의 코로나 정국과 대비해보니 너무나 비슷한 면이 많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정점을 찍은 느낌이기는 하지만 언제 어떻게 종식될지는 그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전염병으로 인한 인간의 터무니 없는 몰락을 끊임없는 연대와 성실성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카뮈의 제안은 거의 8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시대에도 너무나 유효하고 빛이 나는 것이다.

카뮈가 말하는 ‘성실성’이 무엇인지는 리유의 친구 타루의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춰서는 안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하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해이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꼭 필요하단 말입니다.. (329p)

그런데 전염병에 대해 이렇게 핵심을 꿰뚫는 발언을 한 타루는 전염병이 끝나기 직전에 너무나 피곤했기 때문에 마지막 혈청 주사를 빼먹은 탓으로 그만 감염이 되고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 한다.

결론적으로 카뮈는 《페스트》를 통해 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언급은 하지만, 무턱대고 장밋빛 결론을 내거나 희망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모든 부조리에 대한 해결은 우리 각자의 개별적인 노력에 달린 것이다.

최근의 우리 사회에서 다중이 모이는 모임을 아무리 금지해도 개별적인 집회는 반복되고 있다. 또 대구에서는 소규모 집단감염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보면 타루가 말한 긴장의 끈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의지와 정직성의 가치는 지금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더욱이 그의 부조리한 죽음을 통해 온 몸으로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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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쓰다 슈테판 츠바이크 평전시리즈 3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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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에 배운 니체에 대한 상식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라는 저서가 있고, ‘초인철학을 주장했다. 그리고,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대변되는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아마 예전의 나라면 이 정도 이야기하고 나서는 그다음부턴 말문이 턱 막혔을 것이다. 굳이 그 이유를 따져보자면, 우선 철학이란 학문이 무척 난해하기도 하거니와, 살기도 바쁜데 니체 같은 철학자를 더 잘 안다고 무슨 큰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사고방식이 마음속 저변에 깊히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어찌 그리 단순하기만 하고, 생각은 늘 한 군데에 머물러 있기만 할 것인가? 어찌어찌 살다 보니 인생의 풍파도 많이 겪게 되었고, 진실은 한 가지 모범답안으로만 정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몇 년 전, 사이버대학에 편입하여 심리학 과정을 공부한 적이 있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심리학(psychology)이 철학(philosophy)에서 파생한 실용학문이란 사실을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경제학의 기본 흐름을 모르고서는 국제통상학을 공부하기 힘든 것처럼, 니체, 프로이트 등의 인간 본성을 꿰뚫는 철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깊이있는 심리학을 공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니체를 쓰다라는 평전의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20세기 초반의 유명한 전기작가이자 시인이다. 세계 3대 전기작가로 꼽히는 츠바이크는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을 깊이 탐색하고 인간관계에서 작용하는 심리적 측면을 예리하게 포착한 작품을 다수 선보였다.

 

미리부터 이야기해 두는게 좋겠다. 츠바이크를 처음으로 접한 이 책에서 나는 그의 감수성 넘치는 유려한 문장과 현란한 비유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것을.

 

이 책의 맨 처음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비극은 모노드라마처럼 펼쳐진다그렇기에 그의 비극은 삶이라는 짧은 무대장면 위에 자신의 형상만을 올려놓는다눈사태처럼 무너져 내리는 그 모든 행위들에는 고독하게 홀로 싸우는 니체가 있다어느 누구도 그의 곁에 다가서거나그와 마주치지 않는다어떤 여인도 그와 함께 머물며 긴장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다독이지 않는다모든 운동은 오로지 그로부터 시작되어 그에게로 되돌아온다.. (후략』 (p9 ~ p10)


 

이 책을 조금 넘기다 보면 츠바이크는 요즘 말로 니체 덕후이자 광팬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금방 든다.

마치 시대를 앞서간 니체의 천재성에 감탄하며,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나는 유쾌하오!..” 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드니 말이다.

 

츠바이크의 니체를 쓰다는 소설적 전기 형식을 띄고 있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마치 니체의 분신인 것처럼 가 주어인 1인칭 작가시점에서 글을 쓰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 그의 니체에 대한 평전은 사실적 관계만 기록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주관에 투영된 인물의 재창조를 시도하고 있다. 마치 니체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과 같은 생생한 표현들은 니체의 사상을 가장 정확히 이해하는 듯한 묘한 동질감 마저 준다.

 

츠바이크는 니체의 고독한 구도자로서의 삶을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요약하고 있다.


니체의 비극은 배우들이나 상대역청중도 없이 그 자신의 영웅비극만을 보여준다.』 (p10)


 천재적인 감별사 니체는 항상 심리학자로서 자신의 고통을 통해 신기한 쾌감을 얻고자 했고, “스스로 실험자 및 실험 대상자가 되고자 했다.』 (p37)



24세의 젊은 나이에 대학 교수가 된 니체는 바그너의 후광으로 쉽게 유명세를 떨쳤으나 10여년만에 교직생활을 끝내고 그는 곧 철저한 혼자가 된다.

잠깐 동안의 종군생활에서 얻은 질병, 이론적인 추종자였던 바그너와의 결별 등으로 인해 그는 얼마 안되는 대학연금에 의존한 혼자만의 유랑생활을 시작한다.


 핏자국이 밴 넝마를 걸치고 운명과 싸우는 광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헤라클라스처럼 반인반마의 괴물 네수스의 불타는 옷을 찢어버림으로써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p14)


니체는 온갖 고통을 기교나 육체적 위기의 부정을 통해서가 아니라올바른 인식을 통해서 극복했다.』 (p45


건강한 자들에게는 심리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모든 지식은 고통으로부터 나왔다고통은 늘 원인에 대해 묻는다반면에 쾌락은 제자리에 머물러 뒤도 돌아보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인간은 고통 속에서 점점 더 섬세해진다.』 (p44)


니체가 사랑한 것은 불확실성’, ‘확고하지 않은 것이었다. 가치전도의 달인인 니체는 어떠한 인식행위도 실제적인 최종지식일 수 없으며 종국적인 의미에서 진리는 소유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지붕과 여자아이하인도 없는 영원한 무산자이고자 했다그 대신에 사냥의 쾌감과 즐거움을 누리고자 했다그는 지속적인 감정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돈 후안처럼 위대하고 황홀한 순간을 사랑했다그를 유혹한 것은 오로지 정신의 모험저 위험한 불확실성이었다.』 (p54)

 

니체에 의하면 우리는 뭔가 쟁취하기를 좋아한다그렇다고 그것이 철저히 우리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라고 우리의 내부에 있는 폭군이 말한다. (우리는 이런 자를 우리의 더 높은 자아라고 부르고 싶다). 바로 이 더 높은 자아가 나의 제물이 된다.”』 (p58)

  

많은 학자는 19세기 이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철학 이론으로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꼽곤 한다.

(EBS 인문학 특강 니체, 신이 죽은 시대를 말하다중에서)

 

이 중에서 니체는 그의 삶이 바로 하나의 사상이자 철학이었던 사람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철학자, 전복/혁명/파괴의 철학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백신이 없을 정도로 감염력이 뛰어난 지적인 병균이라는 표현은 대중들이 끝내 감추고 싶어하는 부분의 가장 핵심을 찌르는 그의 실존 사상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이란 저서에서 말한다.

내 말을 믿어라. 실존의 가장 커다란 결실과 향락을 수확하는 비결은 위험하게 사는 것이다.”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등 학문적 본성의 인간들은 몸과 마음, 운명까지 다 바쳐 인식을 얻기 위한 영웅적인 투쟁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니체는 모든 것을 다 바쳐 모험에 뛰어들었다. (p59~p60)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니체의 사상과 글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이제, 이 책에 나온 구절 중 가장 감명깊은 문장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위대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공식은  운명을 사랑하라 (Amor Fati)는 것이다우리가 운명을 사랑하게 되면우리는 다른 어떤 것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앞으로뒤로영원으로도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필연적인 것을 견디거나 감추는 것이 아니라그것을 사랑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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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 - 1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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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에 거제, 통영 지역을 여행하다가 박경리 기념관을 다녀온 적이 있다. 청명하고 푸른 하늘이 수평선과 맞닿아 있는 곳, 한려수도의 해안을 굽이굽이 돌다보면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한 박경리 기념관이 나온다. 차를 세우고 건물로 들어서면 바로 북카페가 보이고, 조금 더 지나면 《토지》의 여러 판본이 진열, 판매되고 있는 공간이 있다.

커다란 건물에 비해 관람객이 드문 드문 보이는 고즈넉함을 즐기며 2층으로 향했다. 여기에는 박경리 작가의 생전 유품이나 작품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전시실이 있는데, 가장 많은 공간이 소설 《토지》에 대한 자료로 보존되어 있다.

승리 없는 작업이었다. 끊임없이 희망을 도려내어 버리고 버리곤 하던 아픔의 연속이 내 삶이었는지 모른다.

배수(背水)의 진을 치듯이 절망을 짊어짐으로써만이 나는 차근히 발을 내밀 수가 있었다.

(10쪽, 자서(自序) 중에서)

잔잔한 감동을 안고 기념관을 나서며 아직도 《토지》를 읽어보지 못했음을 잠시 자책했고, 가까운 시일 내에는 꼭 읽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바쁜 일상에 파묻혀 지내다 보니 이러한 다짐은 빛바랜 사진처럼 차츰차츰 퇴색되어가고 있었다.

작년 말, 우리 힐링카페에서 제시한 토지 전권읽기 프로젝트가 눈에 확 들어왔다. 이제는 돌아서면 잊어버릴 나이이기도 하지만, 독서욕이 충만한 이번 시기를 놓치면 영영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로마인 이야기》는 9편에서 읽기를 멈추었지만, 이번에는 바로 출판이 안되서 마무리를 못했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지 않은가.

오래동안 묵혀두었던 숙원사업이라도 된 양, 서둘러 책을 사서 1권부터 읽기 시작했다.

1권의 첫 몇 쪽을 넘기다 보니 서문(序文) 격의 내용이 차례로 세 개가 나온다. 이중 가장 먼저 나오는 자서(自序)라는 서문에는 열정 가득한 명문장으로 가득한데, 개인적으로 느끼는 백미는 맨 마지막에 나오는 구절에 있다.

앞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 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다.

이 밤에 나는 예감을 응시하며 빗소리를 듣는다..

(12쪽)

이제 막 시작하는 소설 《토지》에 대한 선생의 짙은 애정과 자신감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암치료와 함께 시작한 그녀의 토지 집필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데에는 장장 26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이 기간동안 내면의 갈등과 시대적인 아픔으로 여러 차례 절필을 거듭하던 선생은 마지막 서문의 가장 앞 단락을 다음 이야기로 시작한다.

서문 쓰는 것이 두렵다.

할 말을 줄이고, 또 줄여야 하는 인내심에는 억압적 속성이 있으며,

부정적 성향에다 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늘 현실도피를 꿈꾸고 있기 때문인데

내게는 어떤 것도 합리화할 용기가 없다.

(15쪽)

이어지는 문장, “솔직히 말해 그동안 늘 《토지》에서 도망치고 있었다”는 그녀의 표현에서는 우리 근대사를 관통하는 가장 통찰력 있는 대하소설을 완성하고도, 원죄에 가까운 자기성찰로 가득한 작가정신이 느껴진다.

그리고, 가장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두 번째 서문에서는 이제 집필을 막 끝내가는 노작가의 고뇌와 소진된 에너지, 그리고 남은 인생에 대한 담담한 소회가 느껴진다.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

나는 비로서 털고 일어섰다.

찰라 같은 내 시간의 소중함을 느꼈던 것이다..

(13쪽)


소설 토지의 최종본이라고 할 수 있는 마로니에북스 발행 《토지》는 전체가 20권이고, 총 5부작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중 1부는 총 4권으로 구성되는데, 주무대는 경남 하동의 평사리이다.

넓은 들판과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변 마을에서 최참판댁과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다음은 그 첫 문장이다.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 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24쪽)

서문에서 보여준 선생의 놀라운 필력처럼, 이 첫 문장도 엄청난 산고를 겪으며 나온 문장 답게 유려하고, 마치 영상으로 그려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책을 읽다보니,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와 어울어진 자연에 대한 묘사가 너무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서글픈 느낌을 준다. 이에 대한 작가의 소회는 토지 집필이 끝난지 6년 되는 해에 쓴 새로운 판본의 서문 (2001년)에 잘 나타나있다.

전신이 떨렸다. 30년이 지난 뒤에 작품의 현장에서 나는 비로소 《토지》를 실감했다.

서러움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삶을 잇는 서러움이었다.

(17쪽)

당시의 시대상을 관통하는 단어, ‘서러움’을 독자들에게 스미듯 적시게하는 작가의 의도는 여러 문장들에서 보여진다. 즉, 너무나 사실적인 자연 묘사에 감탄하며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다 보면 앞의 시어같은 문장이 다음 내용을 위한 복선이요, 하나의 메타포(metaphor)였음을 알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달이 없는 그믐밤이지만 수없이 나돋는 별빛에 사방은 희뿌윰했다. 초여름이라고는 하나 밤의 냉기를 훔씬 머금은 강바람이 오삭오삭 살에 스며든다... 들물이 팽팽히 들어찬 장면은 별빛을 받아서라기보다는 제물에 희번득이고 있는 것 같았다.

(227쪽)

마을 사람의 눈길을 피해 월선이가 정인 용이집을 찾아가는 장면의 초반에 묘사된 문장이다. 월선이가 이미 결혼한 용이의 집 앞을 그리움에 못이겨 배회하는 장면은 ‘제물에 희번득이며 팽팽히 들어찬 들물’..이라는 표현에서 충분히 의인화되며 다음 내용을 기대하게 한다.

제 소설 《토지》의 1부를 읽었을 뿐이데, 조선말의 수많은 민초들의 일상과 고뇌가 하나씩 하나씩 멍울되어 그 느낌을 쌓아가는 기분이다,

그러나, 단지 묵직한 여운만 남겨주는 소설이라면 후세의 우리가 어찌 명작이라고,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토지》에는 땀 냄새 물씬 풍기는 사람 사는 이야기, 이루어질 수 없어 더 없이 소중하고 슬픈 사랑 이야기도 군데 군데 배치되어 독자들이 지루할 틈을 전혀 주지 않는다.

새해와 함께 읽기 시작한 소설 《토지》는 클럽일정과 같이 한 달에 1권 읽는 것으로 넉넉하게 잡았으나, 실행은 그렇게 이루어질 것 같지가 않다. 우선, 다음 내용이 무지 궁금해지기도 하거니와, 중간에 너무 뜸을 들이다보면 대하소설의 특성상 앞뒤 연결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금년에는 아마 《토지》 완독이 가능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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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 인생을 위한 고전, 개정판 명역고전 시리즈
공자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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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신적인 멘토가 사라져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간단한 지식은 인터넷 클릭 몇 번만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유튜브를 통해서는 아예 동영상 째로 설명을 제공받으니 거의 정보의 홍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요즘 TV 뉴스를 보다보면 하루가 멀다하고 신종 사건사고로 점철되어 있는데, 이제 왠만한 대형사고 외에는 우리의 시선을 끌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 인터넷 댓글을 보면 자신의 생각과 같지 않은 사람은 거의 적군 취급이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다보니, 편안하게 아무 생각 없이 댓글을 달았다가는 피아식별 구분 없이 당겨지는 방아쇠에 장렬하게 전사하기 십상이다.

 

언제부터 대중의 마음이 이렇게 즉흥적이고, 본능적으로 바뀌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씁씁한 느낌이 끝나갈 즈음에는, 보다 영속적이고 보편타당한 가치관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한번씩 해보게 된다.

 

작년 연말부터 힐링클럽 활동의 일환으로 논어를 읽기 시작했는데, 약 한 달의 기간을 거쳐 오늘에야 마지막 장까지 모두 읽게 되었다. 논어에 대한 전체 주석 격인 해제(解題)를 한 챕터로 치면 본문의 20편과 함께 모두 21장이 되는 분량이다. 그리 짧지 않은 기간이지만 전체 내용을 모두 속속들이 이해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부족했음을 느낀다.

 

이번에 읽게 된 논어는 작년 10월에 개정판이 나온 김원중 교수의 인생을 위한 고전, 논어이다. 저자는 2018년에 시작된 네이버 오디오클립 논어백독을 통해 이미 중국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한 바 있다. 이 오디오클립을 통해 젊은 독자층을 많이 확보한 저자는 원문에 대한 상세한 해석을 달아, 한 호흡에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의 개정 신판을 이번에 내놓게 되었다.

 

이 책의 문장 배열은 여백의 미를 살려 여유가 있으며, 커다란 활자로 구성된 원문과 해석은 쉽게 읽히고 또 재미가 있다. 그리고, 원문의 아래 쪽에 나오는 주석을 읽다 보면 당시의 상세한 시대적 흐름을 알 수 있고, 원문 사이사이에 인용된 대괄호, 소괄호 글은 한 호흡에 문장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힘을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이 책의 제목이 된 논어는 공자 사후에 제자와 주위 문인들이 그것을 모아 논의하여 편찬하였기에 논어(論語)라고 했다는데, 그 어원이 재미있다. 논어는 공자의 핵심제자와 제자의 제자들이 모은 자료들을 적어도 수십년의 시차를 두고 편찬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의 앞부분, 해제(解題)에 나온 설명대로 여러 판본이 나오고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검색해본 결과, 공자가 활동한 기원전 5세기 경은 동서양 문명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인물들이 나타난 시기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서양문명의 토대가 되는 철학을 태동시켰고, 인도에서는 석가가 탄생한 시기라고 한다. 우리가 서양문명을 이야기할 때,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사상을 먼저 언급하듯이, 동양에서는 유교의 출발점인 공자가 동양문명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각 장별로 마음에 닿는 문장의 원문과 해석, 그리고 당시에 느꼈던 소회를 개인적으로 정리해 두었다. 시대적인 배경이 지금으로부터 무려 2,500년 전의 일이라 현재의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도 당연히 있었지만 당시 상황이 지금에 와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를 생각해보며, 이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첨삭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과정이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도 널리 귀감이 될 만한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느낌을 적어나가는 것만 해도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생각된다.

 

논어가 워낙 방대한 분량인지라 개인적으로는 각 장에서 두 개의 문장 정도만 추려서 그 느낌을 기록해두었다. 그런데 기록 중 일부를 이 독후감에서 인용하고자 하니 어디서부터 내용을 끄집어내야 할 지 도무지 엄두가 안 나고, 잘 못 끄집어냈다가는 용두사미가 될 것 같아 구체적인 인용은 생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이 논어를 읽고 마음의 수양을 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직접 지면으로 만나는 것도 괜찮고, 오디오클립 논어백독을 통해 접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으로 생각된다.

 

이 책의 해제 부분 말미에 논어는 다른 고전과는 달리 읽는 이에 따라 같은 문장을 전혀 다른 의미로 파악하기도 한다’..라는 표현이 있다. 유명 학자들도 이럴진데, 이제 논어를 처음으로 읽는 일반인 입장에서는 해석 상의 다양한 측면을 오히려 즐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다시 한번 되집어 보며 자신의 의견을 첨삭해보는 것이 고전을 접하는 좋은 자세가 되지 않을까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글의 마지막을 논어의 위정(爲政) 편에 나오는 다음의 문장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자왈,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혹되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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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 정여울의 심리테라피
정여울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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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사둔 책 중에서 가장 먼저 뽑아든 책은 정여울의 ‘심리 테라피’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라는 책이다.

나는 인근 교보문고에 가끔씩 들러 책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데,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잠깐 훑어본 이 책은 서문을 읽자마자 꼭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싶은 충동이 들었다.

우선, 내 마음을 이끈 구절은 이 책의 가장 첫 줄에 나와 있다.

심리학을 공부하면 좀 나아지는 줄 알았다.

나의 이 예민하고 까탈스럽고, 내성적이면서도, 속에 품은

것을 언젠가는 터트리지 않으면 못 견디는 성격이..


이 글을 풀어가는 나 역시 심리학을 최근에 공부한 사람인지라, 작가가 서문에 밝힌 이 문장을 책 속에서 어떻게 풀어나갈지 많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다음은 서문의 중간쯤에 나와 있는 문장이다.

마치 지진이나 전쟁에 대비해 미리 꾸며놓은 생존 배낭처럼, 내 안의 힐링 패키지에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음악,

사람들과의 대화, 심리학에서 얻은 지식들,

문학작품의 문장들, 내가 맡은 꽃향기,

맛있는 음식의 향취까지 함께 빼곡히 들어차 있다..


한 사람의 인격이나 아이덴티티는 이런 모든 특성의 집합체인 건 분명하지만, ‘내가 맡은 꽃향기, 맛있는 음식의 향취’에 이르러서는 이 작가의 글을 맛보고, 그 향취를 느끼고 싶은 생각이 더욱 커졌다. 이 작가의 글을 맛보고 그 향취를 느끼고 싶은 생각이 더욱 커졌다.

마치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기에 그의 소설에 나온 음악들을 분석해놓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00곡’이 궁금해지듯이..


총 4부로 이루어진 이 책은 각각의 내용이 짤막한 별도의 주제로 되어 있고, 부분부분 나오는 심리학 용어조차도 일상적인 언어로 쉽게 풀어져 있어서 술술 잘 읽히는 편이다.


잠깐 작가의 프로필을 훑어보니, 학부에서 독일어를 전공한 이 정여울이라는 작가는 자신을 더 알고 싶어 심리학이라는 학문을 다시 공부하게 된다.


초등학교 시절에 한 담임선생에게 지적을 자주 받았고, 주위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한 경험도 있는 그녀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란다. 작가의 이와 같은 성격과 치열한 극복 담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내향성과 예민함과 우울함이 무려 삼박자를 이루었으니,

내향성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배낭여행을 하고,

강의를 하고, 바쁘게 사람을 만나고 다녔다.

내향성을 극복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기에,

저자가 관심을 가진 심리학의 분야는 ‘융’의 분석심리학이다. 인간의 유형을 ‘외향형(外向型)’과 ‘내향형(內向型)’으로 나누어 분석하기 시작한 사람이 바로 '융'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외향적 기질과 내향적 기질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어느 한 쪽이 우세한가에 따라 자신의 유형이 결정된다고 하였다.



시작한 사람이 바로 ‘융’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외향적 기질과 내향적 기질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어느 한쪽이 우세한가에 따라 자신의 유형이 결정된다고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심리학자가 된 ‘융’은 초기에는 프로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정신 현상을 성욕에 귀착시켜 설명하는 프로이트에 반대하였고, 아들러(A. Adler)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훗날 정신분석학의 기초가 되는 많은 연구를 하였다.

 설명하는 프로이트에 반대하였고, 아들러(A. Adler)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훗날 정신분석학의 기초가 되는 많은 연구를 하게 된다.


작가가 이 책을 통하여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정리가 될 것 같다.

그동안 나는 나를 잘 돌보아왔을까?

내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비명소리 나올까 봐, 

무조건 회피하고 보지는 않았을까?

유독 나에게 더 가혹하게 잣대를 들이대지는 않는가?

짤막하고 쉬운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작가의 깊은 아픔이 베여있어 깊이가 결코 얕지 않은 이 책을 한 챕터씩 읽다 보면, 어느새 치유에 대한 방법론을 실천적으로 구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대한 방법론을 실천적으로 구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작가가 자기 자신을 돌보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바로 ‘글쓰기’이다.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그녀는 처음으로 맞이하는 학생들에게 '휴대폰을 멀리 하고 오직 종이와 펜으로만 글을 써보자’는 제안을 한다. 처음에는 이 과정을 무척 낯설어 하던 학생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눈에 띄게 표정이 진지해지며 글쓰기에 열중하게 된다.


타인의 시선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신경 쓰는 습관을 멈추고, 글을 쓰는 그 순간에만 집중하는 것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끊임없이 일깨우게 한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치유를 해가는 그녀는 이 책의 말미 즈음에 다음과 같은 소망을 표현한다.

나는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고 싶다.

상처 입어 피눈물 흘리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피해자가 아니라, 마침내 트라우마의 흉터보다

더 아름다운 꽃을 피어내는,

끝내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마음 또한 어루만지는

다정하고 사려깊은 치유자가 되고 싶다.

저자의 희망처럼 이 책은,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자신을 돌보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친밀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좋은 안내서가 될 것 같다. 좋은 안내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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