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 - 1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1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봄에 거제, 통영 지역을 여행하다가 박경리 기념관을 다녀온 적이 있다. 청명하고 푸른 하늘이 수평선과 맞닿아 있는 곳, 한려수도의 해안을 굽이굽이 돌다보면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한 박경리 기념관이 나온다. 차를 세우고 건물로 들어서면 바로 북카페가 보이고, 조금 더 지나면 《토지》의 여러 판본이 진열, 판매되고 있는 공간이 있다.

커다란 건물에 비해 관람객이 드문 드문 보이는 고즈넉함을 즐기며 2층으로 향했다. 여기에는 박경리 작가의 생전 유품이나 작품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전시실이 있는데, 가장 많은 공간이 소설 《토지》에 대한 자료로 보존되어 있다.

승리 없는 작업이었다. 끊임없이 희망을 도려내어 버리고 버리곤 하던 아픔의 연속이 내 삶이었는지 모른다.

배수(背水)의 진을 치듯이 절망을 짊어짐으로써만이 나는 차근히 발을 내밀 수가 있었다.

(10쪽, 자서(自序) 중에서)

잔잔한 감동을 안고 기념관을 나서며 아직도 《토지》를 읽어보지 못했음을 잠시 자책했고, 가까운 시일 내에는 꼭 읽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바쁜 일상에 파묻혀 지내다 보니 이러한 다짐은 빛바랜 사진처럼 차츰차츰 퇴색되어가고 있었다.

작년 말, 우리 힐링카페에서 제시한 토지 전권읽기 프로젝트가 눈에 확 들어왔다. 이제는 돌아서면 잊어버릴 나이이기도 하지만, 독서욕이 충만한 이번 시기를 놓치면 영영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로마인 이야기》는 9편에서 읽기를 멈추었지만, 이번에는 바로 출판이 안되서 마무리를 못했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지 않은가.

오래동안 묵혀두었던 숙원사업이라도 된 양, 서둘러 책을 사서 1권부터 읽기 시작했다.

1권의 첫 몇 쪽을 넘기다 보니 서문(序文) 격의 내용이 차례로 세 개가 나온다. 이중 가장 먼저 나오는 자서(自序)라는 서문에는 열정 가득한 명문장으로 가득한데, 개인적으로 느끼는 백미는 맨 마지막에 나오는 구절에 있다.

앞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 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다.

이 밤에 나는 예감을 응시하며 빗소리를 듣는다..

(12쪽)

이제 막 시작하는 소설 《토지》에 대한 선생의 짙은 애정과 자신감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암치료와 함께 시작한 그녀의 토지 집필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데에는 장장 26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이 기간동안 내면의 갈등과 시대적인 아픔으로 여러 차례 절필을 거듭하던 선생은 마지막 서문의 가장 앞 단락을 다음 이야기로 시작한다.

서문 쓰는 것이 두렵다.

할 말을 줄이고, 또 줄여야 하는 인내심에는 억압적 속성이 있으며,

부정적 성향에다 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늘 현실도피를 꿈꾸고 있기 때문인데

내게는 어떤 것도 합리화할 용기가 없다.

(15쪽)

이어지는 문장, “솔직히 말해 그동안 늘 《토지》에서 도망치고 있었다”는 그녀의 표현에서는 우리 근대사를 관통하는 가장 통찰력 있는 대하소설을 완성하고도, 원죄에 가까운 자기성찰로 가득한 작가정신이 느껴진다.

그리고, 가장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두 번째 서문에서는 이제 집필을 막 끝내가는 노작가의 고뇌와 소진된 에너지, 그리고 남은 인생에 대한 담담한 소회가 느껴진다.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

나는 비로서 털고 일어섰다.

찰라 같은 내 시간의 소중함을 느꼈던 것이다..

(13쪽)


소설 토지의 최종본이라고 할 수 있는 마로니에북스 발행 《토지》는 전체가 20권이고, 총 5부작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중 1부는 총 4권으로 구성되는데, 주무대는 경남 하동의 평사리이다.

넓은 들판과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변 마을에서 최참판댁과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다음은 그 첫 문장이다.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 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24쪽)

서문에서 보여준 선생의 놀라운 필력처럼, 이 첫 문장도 엄청난 산고를 겪으며 나온 문장 답게 유려하고, 마치 영상으로 그려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책을 읽다보니,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와 어울어진 자연에 대한 묘사가 너무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서글픈 느낌을 준다. 이에 대한 작가의 소회는 토지 집필이 끝난지 6년 되는 해에 쓴 새로운 판본의 서문 (2001년)에 잘 나타나있다.

전신이 떨렸다. 30년이 지난 뒤에 작품의 현장에서 나는 비로소 《토지》를 실감했다.

서러움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삶을 잇는 서러움이었다.

(17쪽)

당시의 시대상을 관통하는 단어, ‘서러움’을 독자들에게 스미듯 적시게하는 작가의 의도는 여러 문장들에서 보여진다. 즉, 너무나 사실적인 자연 묘사에 감탄하며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다 보면 앞의 시어같은 문장이 다음 내용을 위한 복선이요, 하나의 메타포(metaphor)였음을 알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달이 없는 그믐밤이지만 수없이 나돋는 별빛에 사방은 희뿌윰했다. 초여름이라고는 하나 밤의 냉기를 훔씬 머금은 강바람이 오삭오삭 살에 스며든다... 들물이 팽팽히 들어찬 장면은 별빛을 받아서라기보다는 제물에 희번득이고 있는 것 같았다.

(227쪽)

마을 사람의 눈길을 피해 월선이가 정인 용이집을 찾아가는 장면의 초반에 묘사된 문장이다. 월선이가 이미 결혼한 용이의 집 앞을 그리움에 못이겨 배회하는 장면은 ‘제물에 희번득이며 팽팽히 들어찬 들물’..이라는 표현에서 충분히 의인화되며 다음 내용을 기대하게 한다.

제 소설 《토지》의 1부를 읽었을 뿐이데, 조선말의 수많은 민초들의 일상과 고뇌가 하나씩 하나씩 멍울되어 그 느낌을 쌓아가는 기분이다,

그러나, 단지 묵직한 여운만 남겨주는 소설이라면 후세의 우리가 어찌 명작이라고,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토지》에는 땀 냄새 물씬 풍기는 사람 사는 이야기, 이루어질 수 없어 더 없이 소중하고 슬픈 사랑 이야기도 군데 군데 배치되어 독자들이 지루할 틈을 전혀 주지 않는다.

새해와 함께 읽기 시작한 소설 《토지》는 클럽일정과 같이 한 달에 1권 읽는 것으로 넉넉하게 잡았으나, 실행은 그렇게 이루어질 것 같지가 않다. 우선, 다음 내용이 무지 궁금해지기도 하거니와, 중간에 너무 뜸을 들이다보면 대하소설의 특성상 앞뒤 연결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금년에는 아마 《토지》 완독이 가능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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