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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기름
단요 지음 / 래빗홀 / 2024년 11월
평점 :

2022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저자는 장편소설 "다이브", "마녀가 되는 주문", "인버스", "개의 설계사",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목소리의 증명", 중편소설 "케이크 손", "담장 너머 버베나", 소설집 "한 개의 머리가 있는 방", 르포 "수능 해킹(공저)"를 썼습니다. 2023년 문윤성SF문학상과 박자리문학상을 수상했고, 2024년 문학동네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럼, 저자의 <피와 기름>을 보겠습니다.

최우혁이 15살 소년이었을 때 외갓집이 있던 광양 백운산 자락에서 급류에 휩쓸려 죽다 살아납니다. 그를 구해준 것은 긴 머리카락을 등줄기까지 길러 묶은 소년으로 눈빛과 기운이 묘합니다. 이 일을 말하면 안 된다는 다짐을 받은 그는 사라졌고, 우혁은 그 이후 자꾸만 죽고 싶은 충동에 시달립니다. 철학 학술 동아리에서 만난 김 형은 우혁에게 도박을 알려준 장본입니다. 아버지와 지인들, 금융권에서 빚을 지면서 중독에 빠진 그는 본가에 들어와 폐인처럼 지내고 있던 중 김 형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도의적인 책임을 진다며 자신이 세운 논술 학원 보조 강사 자리를 제안합니다. 수락하고 일을 하며 겨우 사람처럼 지내는 그는 김 형과 점심을 먹던 식당 TV 프로그램에서 '교주를 죽여라'라는 사이비 종교 새천년파 이야기가 나옵니다. MC의 내레이션과 함께 소년 교주의 사진이 등장하는데, 계곡에서 보았던 소년의 얼굴이 거기에 있습니다. 학원으로 돌아와 일을 하다가 잠시 바람을 쐬고 돌아왔더니 그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1999년 집단 자살 사건 당시 15세였던 이도유는 소년 교주이자 재림 메시아로서 새천년파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12월 31일 종말을 확언했으며 모두를 사랑했습니다. 32명의 숭배자들은 은혜 속에 죽음을 택했고 12명의 아이들만 남았습니다. 집단 자살 사건 직후 교주가 증발하듯 사라졌고, 살아남은 아이들 중 일부가 새천년파 조직을 재구축해 교주 척살에 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해 도망쳤기 때문에 세계가 지금에 이르렀다고 믿었습니다. 타락한 세계가 용서받을 방법은 이도유를 찾아내 죽이는 것 외에는 없다고 합니다. 새천년파 열심당원들은 이도유와 접점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 회유했고, 협박했으며, 납치해 죽이기도 합니다. 이도유의 거취와 기적의 규칙을 알아내기 위해, 그를 고립시키기 위해, 발붙일 곳을 없앤다면 어쩔 수 없이 하늘 왕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냐는 논리였습니다. 조강현은 새천년파 피해자 모임의 대표이며, 구 새천년파의 생존자 12명 중 최연장자입니다. 사건이 벌어졌던 당시 조강현은 보육원 출신의 신학교 자퇴생이었고, 이후 계열사를 여럿 거느린 대기업의 회장으로 성공했습니다. 새천년파와 조강현은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이도유를 쫓고 있습니다.
새천년파와 조강현을 피해 이도유는 설악산까지 데려다 달라고 우혁에게 요구하고, 그와의 동행은 어떻게 전개될지, 자세한 이야기는 <피와 기름>에서 확인하세요.
세상을 끝장낼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요. 나쁜 사람이 잘 살고, 죄 없는 사람은 죽는 이 세상에 안녕을 고할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생명들이 안타까워 이대로 계속 유지할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권한이 내게 있다면 그 권한을 준 신에게 도로 반납하고 싶습니다. <피와 기름>에서의 이도유가 그렇습니다. 감독 직분을 받은 이도유는 땅의 권세가 너무 강해지면 들고일어나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합니다. 만약 이 땅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타락했다는 판단이 서면, 예수에게 그 결정을 전달할 권한도 있습니다. 이도유는 종말을 불러올 능력이 있었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서 오랫동안 살다 보니 인간의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글을 읽을수록 성경 속 내용, 신학적인 종말, 예수 재림의 의미까지 저자가 얼마나 심도 있게 인문, 철학, 종교를 조사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종교를 이런 식으로 보는 관점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불안해서 무언가에 기대는 마음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파고들어가서 만나게 되는 종교의 모습이 색달랐습니다. 누가 봐도 실패자의 모습인 주인공 우혁이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조금씩 변화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반전까지 읽게 되면 그가 왜 주인공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세계를 지탱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평범하다 못해 실패자 같은 모습이라도 그런 사람을 믿어주는 또 다른 사람이 있기에 이 세상은 아직 망하지 않는가 봅니다. 저자가 보여주는 또 다른 희망의 빛을 기대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믿는다는 건
정말 신기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물론 이 믿음이라는 것 때문에 나쁜 일들도 벌어지고 그러죠.
하지만 세상을 망치는 힘이랑, 망가진 상태를 고착시키는 힘이랑,
역으로 고치는 힘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거,
p. 399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고 쓴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