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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정세진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2년 9월
평점 :

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큐레이터로 활동한 저자는 제4회 전국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공모전 시나리오 부문 우수상 수상 후 시나리오 작가 활동을 겸했습니다. 그럼, 저자가 쓴 첫 소설집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를 보겠습니다.

납치범인 나는 부잣집에 들어가서 부모로 보이는 사람에게 이 집 딸을 데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부부는 미심쩍은 듯 바라보다가 지푸라기라고 잡고 싶은 표정으로 어디에 있는지를 묻습니다. 난 가만히 있었고 부부는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내보내고 집 안으로 초대했습니다. 나는 1억만 주면 무사히 가정으로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이만한 집에서 1억 정도는 큰돈이 아닙니다. 주차된 안주인의 차만 해도 1억이 넘으니 그 정도는 부담이라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나도 염치가 있는 인간으로 지나치게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하는 행위에 가책을 느낍니다. 하지만 1억 정도라면 나의 노동과 위험도를 적용했을 때 합리적이고 적정한 금액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1억 현금을 여기에서 받으면 아이가 있는 곳을 알려줄 테니, 나중에 아이를 찾은 후 자신을 신고하지 않을 숨겨둔 비밀을 들려달라고 요구합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운이 좋았습니다. 임신 7개월 즈음에 엄마는 외딴섬에 여행을 떠났는데, 갑작스러운 조산 기운에 섬을 나오려고 했으나 날씨 때문에 갇혀버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양수까지 터지고 어쩔 수 없이 출산을 시도하려는데 운 좋게 그 섬에 여행 온 산부인과 의사와 산부인과 간호사인 민박집 딸도 고향에 휴가차 내려와 있어 아이는 무사히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출혈이 멈추지 않아 다음 날 죽었습니다. 살아오면서 나는 수도 없이 많은 행운을 손에 쥐었고 그와 비례해 불행한 일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는데, 내게 행운이 오면 곧바로 다음 날 불행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백화점에 우연히 갔다 백만 번째 입장 고객이 되어 제주도 여행권을 경품으로 받은 다음 날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아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20대 청약통장 하나로 아파트에 당첨이 되고 다음 날 퍽치기를 만나 두개골이 함몰되는 부상으로 사경을 헤맸습니다. 커갈수록 행운의 빈도수는 점차 늘어났고, 이제는 지나치리만큼 끝없이 밀려듭니다. 그러 때마다 불행을 맞이해야만 했고 나는 고통받았습니다. 이제는 온종일 쏟아지는 행운을 거부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을 거부하고 혼자 지내는 나에게 회사 계약직 여사원이 자꾸만 눈에 들어옵니다.
난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아 피부와 뼈의 성장이 멈추고 그래서 외관상 늙지 않는 선천적 희귀질병, 하이랜더 증후군을 앓고 있습니다. 나의 병은 몸이 작은 왜소증과 다르고 정신의 성장이 멈춰버린 피터팬 증후군과도 다릅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의 평균 예상 수명은 30세라고 하는데, 그보다 더 오래 산 경우도 존재하고, 급작스러운 노화가 진행되면서 평균보다 더 일찍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난 6살 정도로 보이지만 18살입니다. 이런 결함을 예상한 부모는 3살 때 놀이공원에 버렸고 이후 보육원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만 18살이 되는 내년 2월이면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보육원에서도 퇴소하고 사회로 나가야 합니다. 나처럼 보육원 퇴소를 앞둔 친구들은 자립능력은 물론 대처하는 능력도 미숙합니다. 그런데다 조언해 줄 어른이 없다는 막막함과, 보호해 줄, 내 편이 되어줄 가족이 없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갖습니다. 난 어려 보이는 외모로 조금 불법적인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고 있습니다. 버려진 아이들이 잠시 머무는 영아 일시보호소의 입양을 담당하는 사회복지사 봉팔이에게 입양되고 싶다며 내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가족이 어떤 것인지 한 번이라도 가져보고 싶다며, 그렇게 6살 남자아이로 잠깐 살다가 눈치채기 전에 파양될 거라고요.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에는 7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목이며 첫 번째 이야기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는 아이를 납치한 납치범이 1억 원을 요구하며 남에게 절대 알려지길 원치 않는 숨겨진 비밀을 들려달라고 말합니다. 매해 2019년이 되면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가는 무한 반복을 지속하고 있는 투자계의 전설을 인터뷰하는 신문 기자의 이야기 '인터뷰', 행운 다음 날 불운이 꼭 오는 남자에게 찾아오는 행운 이야기 '어쩌면 운이 좋아 우연처럼', 자고 일어나니 평행 세계를 경험하게 된 한때 잘나가던 소설가 이야기 '도적',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난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산 자들의 땅', 피아노 학원에서 집에 오는 길에 납치당해 어딘지도 모르는 섬에서 일하는 15살 해영의 이야기 '나를 버릴지라도', 하이랜더 증후군을 앓고 있는 주인공이 입양 자격이 안 되는 가정에 6살 남자아이로 입양되는 이야기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지만 나의 시간은 멈췄다'가 실려 있습니다.
저자는 비현실 같은 SF 세계관부터 미디어에서 볼 수 있는 현실까지, 상식 같은 이야기를 뒤집어 마술 같은 이야기로 바꿉니다. 그 안에서 느끼는 감정은 일곱 가지 이야기보다 더욱 다채롭습니다. 존재하고 있지만 결코 조명 받지 못했던, 우리 사회에 배제된 것들을 이야기로 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여운이 더욱 오래 남습니다. 그래서 저자의 다음 소설이 기다려지고 기대됩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고 쓴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