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볼 수 없는 책 - 귀중본이란 무엇인가
장유승 지음 / 파이돈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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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으로 한국출판문화상 편집상,

 "동아시아의 문헌교류"로 한국출판학술상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그럼 귀중본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아무나 볼 수 없는 책>을 보겠습니다.



"팔만대장경"을 활자로 인쇄했다면 거대한 장경판전은 필요 없었을 겁니다. 

인쇄에 사용된 활자와 틀, 각종 도구를 전부 모아봤자 

해인사 해우소 한 칸도 못 채울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은 목판으로 인쇄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어마어마한 유산을 남긴 것입니다. 

목판인쇄의 장점은 판목 하나로 최소 수백 장의 동일한 인쇄물을 찍어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소량만 필요하다면 목판인쇄를 효율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소량 인쇄에 적합한 것은 활자 인쇄입니다. 

목판인쇄는 단일 품종 대량 생산에 적합하고, 

활자 인쇄는 다품종 소량 생산에 적합합니다. 

대장경의 수요는 왕실 및 일부 귀족 그리고 대형 사찰 정도로 수요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고려는 팔만대장경을 활자로 찍어내지 않았을까요. 

굳이 목판인쇄를 선택한 이유는 책보다 판목의 가치를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활자 인쇄는 한 장씩 조판하여 인쇄하고, 인쇄를 마치면 흩어버립니다. 

활자 인쇄를 마치면 남는 것이라고는 낱낱이 흩어진 활자뿐입니다. 

그러나 목판인쇄는 다릅니다. 

목판인쇄를 위해 제작된 판목은 인쇄한 뒤에도 그대로 남습니다. 

판목만 있으면 책은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으므로 

판목은 인쇄한 책보다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만약 팔만대장경의 판목이 전부 없어지고  판목으로 인쇄한 종이만 남이 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팔만대장경에 경외심을 품을까요. 

책보다 판목을 중시하는 관념은 조선시대에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판목을 아무리 소중히 보관한들, 

그 자체로는 사회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판목은 그것이 책으로 바뀌어 널리 보급될 때 비로소 가치를 발휘하는 법입니다. 

그 속에 아무리 수준 높은 지식이 들어 있어도 

책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고스란히 전해진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지만 

그 기적에 심취하고 말아서는 곤란합니다. 

철저히 조사하고 그 가치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쓸모 있는 것을 찾아보고 어떻게 활용할지 궁리해야 합니다.


문신 관료를 선발하는 문관은 초시, 회시, 전시 3차에 걸쳐 치러집니다. 

이 가운데 마지막 관문인 전시에서 출제된 것이 책문인데, 

오늘날의 논술에 해당합니다. 

조선시대 책문은 주로 정치 현안에 대한 의견을 묻는 내용입니다. 

응시자는 경전과 역사를 근거로 제시하고, 

현안을 분석하여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책문을 얼마나 잘 쓰느냐에 따라 최종 합격자 순위가 결정됩니다. 

논술은 정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기출문제의 모범 답안입니다. 

"동국장원책"은 1396년부터 1447년까지 시행된 

과거 시험의 장원급제자 답안지를 모은 책입니다. 

연도별로 문제와 답안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주어진 문제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이지만 답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기야 경전과 역사책만 공부하던 선비가 실무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노련한 관원들도 어쩌지 못한 실무적 문제를 해결할 창의적인 대책은 

출제자 입장에서도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출제 의도는 따로 있었습니다. 

수많은 폐단에도 불구하고 과거 제도를 유지한 이유는 체제의 유지와 안정입니다. 

책문에서 사회 문제 해결 방안을 질문한 의도 역시 

반드시 개혁 방안을 찾겠다는 의도는 아닌 듯합니다. 

과거 제도의 시행은 혁명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 체제의 안정을 흔들 수 있는 급진적 개혁안을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배제됩니다. 

체재의 안정을 흔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답변은 일반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와 기업 모두 창의적인 인재를 뽑고 싶다고 하지만, 

그들은 정말 창의적인 인재를 원할까요.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인재를 곁에 둘 자신이 있을까요. 

창의적인 인재가 없다고들 말하지만,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과 포용하는 문화가 없는 것입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약 28만 권의 고서가 있습니다. 

그중 1%에 해당하는 963종 3,475권은 '귀중본'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귀중본은 귀중한 책을 말합니다. 어떤 책이 귀중한 책인지는 기준이 있습니다. 

대체로 17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책이라면 귀중본으로 취급합니다. 

근현대 서적에서의 기준도 있습니다. 

꼭 오래된 책만 귀중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수량에 관한 조건이 있는데 하나뿐이거나 몇 없는 책은 

오래되지 않아도 귀중본이지만, 수량이 적다고 반드시 귀중본은 아닙니다. 

책 주인이 유명한 사람이고 그 책에 흔적을 남겼다면 귀중본입니다. 

이름난 사람의 자필 원고나 편지는 귀중본이며, 초판과 한정판도 귀중합니다. 

서화나 고지도, 탁본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도 귀중본 대접을 받습니다. 

귀중본은 내용이 귀중한 책이 아니라 책의 물리적 특징이 중요합니다.


과거에 책을 만든 사람들은 많은 독자를 기대하기보다 

책의 가치를 알아줄 단 한 사람의 독자를 기대했습니다. 

조선 지식인의 저술은 대부분 간행되지 못했고, 

운 좋게 간행돼도 널리 보급되지 못했습니다. 

당대의 독자를 기대할 수 없었던 그들은 후대의 독자를 위해 

저술을 정리하고 보관했습니다. 

그 결과가 세계 어디를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의 기록문화입니다. 

독자가 아무리 적더라도 책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책은 앞으로도 

학문의 진보, 사회의 진보에 일조할 것입니다. 

이것이 책을 쓰는 사람, 책을 만드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의 의무입니다. 

그리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귀중한 책의 역사는 계속될 것입니다.




네이버카페 이벤트에 당첨되어 책을 제공받고 쓴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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