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보는 한국 근대사 - 조선, 세계의 화약고 EBS CLASS ⓔ
신효승 지음 / EBS BOOKS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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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를 중심으로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풀어내는 역사학자인 저자는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다양한 저술 활동과 강연을 통해 한국 근대사를 해석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쓴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한국 근대사>를 보겠습니다.



프랑스 선교사가 처형된 것을 구실로 프랑스는 파병을 보냈고, 병인박해와 관련해 책임자의 처벌과 통상 수교 등을 조선에 요구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프랑스의 요구를 거절했으며 프랑스 함대와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프랑스 군대는 강화도를 약탈했고, 한강으로 이어지는 조운을 봉쇄했습니다. 조선은 군대를 동원해 도성과 한강의 수비를 강화하고, 김포 등에 집결해 강화도의 탈환을 모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강화도의 갑곶진과 염하를 두고 마주한 문수산성을 공격했지만 패배하면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교두보 마련에 실패했습니다. 반면 조선군은 강화도 정족산성의 점령과 이어진 전투에서 승리하며 강화도 탈환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를 발판으로 프랑스군의 철수를 이끌어내며 병인양요는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승자는 누구일까요. 조선이 프랑스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마치 조선이 승리한 것처럼 백성을 기만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교과서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병인양요를 서술했습니다. 그 당시 서구 열강의 언론 보도를 살펴보면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 대리는 승리를 주장했지만, 프랑스 정부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과 프랑스 모두 서로 패배를 주장하는 이 상황에서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일까요.


독립 전쟁사에서 청산리대첩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한국사 교과서에서 청산리대첩은 무장 독립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승리를 거둔 전투이자 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준 전투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청산리대첩을 통해 당시 국제 상황을 살펴볼 수 있을까요. 청산리대첩을 국제 정세 속에서 그 가치를 살펴보아야 한국사를 넘어 세계사적 측면에서 우리 독립운동사가 갖고 있는 가치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 국제 정세 속에서 청산리대첩이 갖고 있는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는 여전히 독립을 위한 여정에 있습니다. <전쟁으로 보는 한국 근대사>는 독립의 여정이 시작되는 시기를 전후해 벌어진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조약, 청불전쟁, 청일전쟁, 대한제국의 군대, 러일전쟁, 의병, 봉오동전투, 청산리 전역과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조선은 19세기 말에 세계 질서에 편입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제뿐만 아니라 서구 열강의 간섭도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벌어진 전쟁이 두 차례의 양요입니다. 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을 거치면서 일제의 간섭과 속박이 본격화되었고, 결국 1907년 군대가 해산되면서 국가의 존립을 유지할 수단이 상실하게 됩니다. 근대의 군사혁명은 국민이 전쟁의 주체로서 자리매김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병인양요부터 청산리 전역까지 우리 근대사를 돌이켜볼 수 있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이를 통해 국민이 국가의 주체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이해하는 방법을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네이버카페 이벤트에 당첨되어 책을 제공받고 쓴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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