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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 남방의 포로감시원, 5년의 기록
최영우.최양현 지음 / 효형출판 / 2022년 3월
평점 :

1923년 전북 남원 서도리에서 태어난 최영우 씨는
전주공업전수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20살이 되던 해에
포로감시원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해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여러 수용소에서 근무했습니다.
종전 후 전범 용의자가 되어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1947년 9월 히로시마를 거쳐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생전에 틈틈이 포로감시원 시절을 기록으로 남겼고 2002년 작고했습니다.
첨단영상기술 기반의 실감콘텐츠와 영화를 제작하는 '파란오이' 대표 겸
감독인 최양현 씨는 다수의 영화와 다큐멘터리, TV 단막극을 제작했습니다.
외조부가 남긴 글을 해제하고 보충, 재구성해서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를 출간했습니다. 그럼 내용을 보겠습니다.

1939년 9월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유럽에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조선까지 전해졌고,
1941년 겨울,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전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에 휩싸입니다.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후 몇 개월 되지 않아 전선이 점차 확대되고
일본군과 연합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오고 가면서
황군을 조선인이 도와야 한다는 내선일체 여론이 조선 반도에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반도의 조선인 청년들도 일본군에 차출되기 시작했으며
집안에 남자 형제들이 여럿이라면 그중 한 명은 강제로 일본군으로 징병되거나
전쟁을 돕는 징용을 해야만 한다는 억압된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가장 노릇을 한 작은아버지가 가족회의를 소집했고
차남인 최영우에게 포로감시원 공고란을 보여주며 권유합니다.
군대 소속 공무원으로 직접 싸우지 않아 안전하고
월급도 주며 2년만 있으면 한국으로 올 수 있답니다.
그래서 최영우는 지원했고, 1942년 부산에서 2개월간의 훈련 후
싱가포르에 도착해 1/3은 내렸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말랑 포로수용소로 갔습니다.
목적지에 당도하자 지역민들이 일본군을 환영합니다.
일본군은 그들에게 해방자이고 원수 네덜란드인을 몰아낸 자이며 은인이기 때문이죠.
말랑 포로수용소에서 관리하는 포로는 약 오천 명이고
주변에는 철조망으로 둘러져 있어 외부 세계는 볼 수 없습니다.
포로들의 국적은 거의 네덜란드인이고 영국인, 호주인도 섞여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음식입니다.
날마다 세 끼를 먹어야 했는데 빵과 우유가 중단된 지가 한참 되어
질을 떨어지는 하등미로 죽을 쑤어 먹어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적의 공습이 이어지면서 보급이 제때 닿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급이 끊기자 각 지방의 포로수용소는 해산 후 수도 자카르타로 집결해야만 했습니다.
동시에 포로감시원들은 태국의 철도 건설이나
섬의 비행장 건설 등 노역을 위해 차출되었습니다.
일본군이 동남아 전선 곳곳에서 패전하면서
일본군 점령지는 점차 연합군 수복지로 바뀌어 갔고
이로 인해 포로감시원들 역시 다른 곳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며
재배치 및 근무를 해야만 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 이후 포로감시원들은
자신의 신분과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일본군 소속임과 동시에 일본에 의해 수탈당하던 식민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연합군으로부터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처우에 관해 협상하기 위해
'조선인 민회'라는 단체를 결성하였으나
오히려 테러와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조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최영우는 싱가포르 창이 전범 수용소에 갇혔고,
자카르타 치피낭 형무소로 이동되었습니다.
경비원과 통역관이 감방을 돌아다니며 명단을 들고 몇 명의 이름을 읽습니다.
석방인지, 아니면 죽으러 가는 건지 모르지만
수감된 사람들은 석방되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무슨 운명이 그들을 부르고 있는지는 그때그때 부닥쳐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운이 좋아 최영우 역시 귀향선을 타고 집으로 왔습니다.
1947년 9월, 부산을 떠나 약 5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일제강점기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독립운동가와 위안부일 겁니다.
그 외에도 독립을 위해 자신의 힘을 다해
돈, 식량을 지원하거나 숨겨준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일본군으로 징집되어 일본군과 싸우던 한국인도 있겠지요.
하지만 포로감시원은 생소합니다.
이분들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포로감시원은 '채용'에 지원한 '자발적 참전자'들이 다수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징집이나 징용으로 육체적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달리
군대 소속 공무원으로 월급을 받으며 포로를 감시하는 군무원 신분이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피해 사례를 노출하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또한 연합군 전범 재판소 측에 기소되어 전쟁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힌 것도
개개인에게 가혹하고 감동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일제 치하에 있지 않았다면 포로감시원을 지원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원하지 않으면 일본군으로 징병되거나 전쟁을 돕는 징용을 해야 하기에
그나마 편하게 보이는 포로감시원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져 고향으로 돌아와도
전쟁이 남긴 트라우마는 결코 작지 않았으며
젊은이들의 인생을 바꿔놓았을 겁니다.
참전하기 전까지 순수했고 열정이 가득했던 최영우 씨도
5년 후 돌아와서 내면이 황폐화되고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좋은 전쟁이란 없다."라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다시는 전쟁이 반복되어선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전쟁이 벌어지는 그곳에서도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길 빕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고 쓴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