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라미 현 지음 / 마음의숲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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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라미 씨를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봤습니다. 

참전용사들들의 사진을 자비로 찍고 계시더라고요.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대부분은 외국에 있어서 

비행깃값만 해도 만만찮을 텐데 왕복 비행깃값에 숙박비 등의 비용을 

라미 현 씨가 부담하고 카메라로 찍어 현상한 뒤에 

자택으로 액자에 넣은 사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22개국 1500여 명의 참전용사들을 기록했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에 담았습니다.



처음 등장하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윌리엄 빌 베버. 

미국 워싱턴 DC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의 19개 동상 중 

판초 우의를 입고 소총을 든 동상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전투에서 오른팔을 잃었고, 후송 중에 포탄을 맞아서 

같은 날 오른쪽 다리마저 잃었습니다. 

미국은 전쟁 중임에도 그를 살리기 위해 원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일본으로, 

다시 일본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옮기고 또 옮겼습니다. 

미군 최고위층에서 그를 결단코 살리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그가 아픔을 느끼지 못하도록 계속 모르핀을 주사했답니다. 

그렇게 다들 그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딱 하나의 생각만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언제쯤 다시 전투에 참전할 수 있을까!'. 

그는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하달 받았는데 

조선인 노예들을 찾아 고국으로 보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끌려온 조선인과 일본 하류층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돌려보낼 고향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맥아더 장군은 일본 남쪽으로 이주시켜 

일본에 자리 잡고 살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시 중위였던 그는 그때부터 조선에 관심이 생겨 역사부터 공부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가 반도이기 때문에 언제나 강대국에 둘러싸여 

당하고 버티면서 발전해 왔는데 그런 민족을 자신의 도움으로 

지켜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말합니다. 

또 한쪽 팔, 한 쪽 다리가 없는 것보다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는 것이 더 가슴 아프다고 했습니다.

사진을 찍고 인화해서 사진 액자를 선물하러 다시 들린 날, 

참전용사 베버 씨는 너무나 고맙다며 자신이 뭘 해주면 되냐고 물어봅니다. 

그때마다 사진작가 라미는 

"선생님께서는 69년 전에 이미 다 지불하셨습니다. 

저는 다만 그 빚을 조금 갚는 것뿐입니다."라고 대답했대요.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은 "너희가 빚진 것은 하나도 없다. 

자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의무가 있어. 

바로 자유가 없거나, 자유를 잃게 생긴 사람들에게 

그 자유를 전하고 지켜주는 거야. 

우리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도 이 의무를 지키기 위함이지. 

다만 저희도 자유를 얻었으니 의무가 생긴 거야. 

북쪽에 있는 너희 동포들에게 자유를 전달하는 것. 그 의무를 다했으면 한다."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 

생판 모르는 남의 나라에 와서 팔과 다리를 하나씩 잃어도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는 윌리엄 빌 베버 씨. 더없이 그가 위대해 보입니다.



미국, 호주, 캐나다, 영국, 네덜란드 등에서도 UN 군으로 

수많은 10대부터 20대 초반의 어린 청년들이 한국전쟁에 참여했고, 

그중엔 하와이에서 태어난 스탠리 후지이 씨도 있습니다. 

휴식시간이면 벙커에서 쉬며 가족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고, 

동료들이 가족으로부터 받은 음식을 나눠 먹으며 전우애를 키웠는데, 

한 병사는 편지를 쓰지도, 받지도 않아 궁금해 물어보았답니다. 

그 병사는 농장 일을 하느라 글을 못 배워 편지를 못 쓴다고 했답니다. 

스탠리 후지이 씨가 대신 편지를 써줘 

가족으로부터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병사가 전사하고 그의 집으로 편지를 쓸 때는 

더없이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2018년 67년 만에 하와이의 집으로 돌아온 스탠리 후지이 씨의 전우들.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한 자신의 전우들을 기억해 달라고 전합니다.


우리는 참전용사라고 생각하면 군인들만 떠올립니다. 

하지만 군인들이 쓸 물자를 옮긴 민간인들인 지게 부대도 있습니다. 

그들은 정식 군인도 아니었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위험한 전장 속에서 물자를 옮겼습니다. 

도예가로 유명한 천한봉 씨는 세 번의 군 입대를 했지만 

기록에 남지 않아 참전 유공자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복무 증명서와 같은 증거가 없다 해도 

구체적인 정황을 듣고 당시 기록과 맞으면 

참전용사로 인정되는 법이 제정되어 

2013년에 선생님은 6.25 참전 유공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종이보다 더 뜨거운 사람의 이야기를 믿어야 할 때입니다.


2018년 국정감사 참고인으로 백발의 

탈북 국군 포로 유영복 선생님이 증언을 했습니다. 

그분의 증언에 의하면 아직까지 귀환하지 못한 

한국전쟁 국군 포로가 많다고 합니다. 

저자도 그분의 영상을 보고 꼭 만나서 

사진을 찍어드리겠다고 다짐을 했답니다. 

겨우 탈출한 선생님을 국가는 잊었을지 몰라도, 

국민들이 기억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요. 

그래서 SNS을 통해 사진을 같이 찍을 분을 모집해 

40여 명이 참여한 가족사진이 완성되었습니다. 

이후 송환되어 대한민국 땅을 다시 밟을 줄 알았던 

유영복 선생님의 기대는 47년이나 유예되었습니다. 

고된 육체노동과 사상 교육이 있었고, 반항하면 그대로 처형되었습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국군 포로들은 이제 대한민국으로 가겠구나 싶었지만 

국군 포로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답니다. 

그토록 믿었던 국가였는데, 

죽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죽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 중국에서 보따리상 아줌마가 두만강을 건너자는 말에 

함께 건너 2000년 대한민국 땅을 밟게 되었답니다. 

90살이 넘은 아버지와 동생을 만났고, 

한국전쟁 당시 소속되었던 5사단에서 하사로 명예 전역식을 치렀습니다. 

정말 한 많은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버림받은 대한민국을 다시 찾은 그분의 심경은 어떠했을까요. 

정말 죄스러울 뿐입니다.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에 등장한 29명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분들.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분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요. 

이분들의 이야기를 하나씩만 읽어도 마음이 찡하고 

기억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드는 데 말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태어나 

전쟁은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생각하고 지내는 대부분의 우리들은 

이분들의 희생, 용기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쟁 후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몇 십 년을 겪고 계시고, 

지금도 고통스럽게 지내시는 분들이 많은데, 

우리는 감사함을 잊고 살고 있습니다. 

사진작가 라미의 'Project-Soldier 네 번째 이야기,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찾아서'를 

마음 깊이 응원하며 저자가 있기에 조금의 죄스러움을 한 스푼 덜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분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고 솔직하게 쓴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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