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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제로 편 - 지혜를 찾아 138억 년을 달리는 시간 여행서 ㅣ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9년 12월
평점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시리즈의 마지막 책인 <지대넓얕 0>입니다.
우리가 왜 이 여행을 떠났는지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고대의 인류는 우리만큼 불안하고 혼란스러웠지요.
그러다 문명이 발생하고 도시가 건설되며 사회는 복잡해지고,
그에 따른 갈등과 대립은 심해졌습니다.
이 혼돈 속에서 현명한 자가 나타나 사람들을 가르쳐 인간을 인간답게 했으며,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안에서 빛나는 질문들을 다시 꺼내들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스승이라 불렀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고전을 펼쳐야 하는 이유는
바로 위대한 스승을 만나기 위해서랍니다.
그들의 지혜를 참고함으로써 오늘 내 안의 혼란을 멈추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서 나는 무엇이며, 세계란 무엇이고,
이 둘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빛나는 질문과 대면해야 합니다.

우주는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누구도 그에 대한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빅뱅 이론을 살펴보면 빅뱅은 기원전 138억 년에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빅뱅 이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다중 우주와 다차원을 설명합니다.
우주의 탄생, 지구의 탄생, 생명의 탄생과 더불어 인류의 조상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7천 년 전, 문명이 탄생해 도시를 만들고, 언어가 탄생해 지식이 확산되었습니다.
문명은 풍요와 안전을 보장했지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갈등과 욕망이 생겨나 고통과 괴로움이 발생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세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세계라고 할 땐 물질적인 세계를 생각하지만 그것은 세계의 일부일 뿐입니다.
국가와 사회, 문명과 문화도 세계이며,
인류와 타인이라는 사람들도 우리를 둘러싼 세계이며,
내가 던져진 나의 신체, 인간이라는 종으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욕망과 집착도 내가 던져진 세계입니다.
이제 위대한 스승들을 만나러 가봅시다.

4천 년 전, 인도 서북부 지역에 정착한 아리아인의 경전인
"베다"는 인도 사상의 근간을 이뤘습니다.
"베아", '우파니샤드', 힌두교로 전통은 이어졌고, 핵심은 범아일여 사상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도 사상 안에서 내적 갈등이 생겨나
세속을 벗어나는 수행자들이 늘어났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수행자들이 늘어나는 것이 우려되는 일이라
'바가바드기타'를 통해 인도인은 자신의 위치로 돌아옵니다.
힌두교는 '우파니샤드' 전통의 탈속과 '바가바드기타'의 세속의 균형을 찾아
인도인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고대 중국의 신화와 역사, 춘추전국시대의 혼란 속에서 나타난
노자와 공자의 사상을 배울 수 있습니다.
노자와 공자가 가졌던 근본 물음은 동일했습니다.
어떻게 이 고통과 혼란을 멈출 것인가.
노자와 공자가 추구한 해결 방안은 후에
노자의 도가 사상과 공자의 유가 사상으로 발전되면서
중국인의 세계관으로 정착했으며, 세속과 탈속의 균형을 찾을 수 있게 했습니다.
특히 유가 사상은 동아시아 국가 체제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철학 담론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녔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주돈이나 '태극도설'을 제시해 철학적 탐구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붓다 초기의 가르침과 이후에 등장한
대승불교의 중관파와 유식파의 사상을 살펴보며,
일체유심조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인도와 중국을 아우르는 고대 동양의 사유 방식은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지 않는 일원론에 기반을 둡니다.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자아의 마음이 그려내는 것이고,
세계란 자아의 마음 안에 담긴 것이며,
자기의 내면으로 깊게 침잠했을 때 비로소 세계의 실체와 조우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위대한 스승들의 보편적 가르침입니다.

일원론으로 걸어온 동양 사상과 반대로 서양은 이원론의 세계로 흘러갑니다.
고대에 시작된 서양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철학과 종교에 영향을 미치며 근대까지 이어집니다.
이원론과 로고스 중심주의로 정의할 수 있는 플라톤주의는
자아와 세계를 나누면서 인간, 서양, 백인, 남성, 이성으로 상징되는 주체가
자연, 동양, 유색인, 여성, 신체로 상징되는 대상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정당케 합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인류는 플라톤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대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원론을 대신할 다원론의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탈근대,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흐름으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양 사상의 양대 뿌리가 되는 기독교입니다.
역사적 측면에서의 탄생 배경과 바울의 사상으로 성장한 그리스도교,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신과의 관계를 매개하는 보편자가 되며
인간은 직접적으로 관계 맺을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런 기독교 교리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플라톤의 이원론과 만나 체계화되었습니다.
이원론은 오랜 시간 서양을 지배해 신의 완전무결함으로 보존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기독교 신비주의에서
일원론적 측면에 대한 탐구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원론과 일원론을 알아야 할까요?
우리가 반쪽의 세계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사유를 출발시킨 위대한 스승들은 일원론을 말했는데,
우리는 이원론의 세계에서 태어나 그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외국을 여행하며 시야를 넓히는 데 시간과 비용을 쓰지만,
자기 내면의 가려진 영역으로 나아갈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이제 내면세계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일원론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이 '세계관'이라는 것을 대수롭게 생각하지만,
세계관은 내면의 감옥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 세계관 안에서 탄생하고 성장하며 죽습니다.
그 바깥으로는 나가지 않고, 심지어 그 바깥이 있는지조차 상상하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태어나서 기독교인으로 성장하고 기독교도로 죽습니다.
그는 한 번도 불교의 세계관에, 이슬람의 세계관에, 유물론의 세계관에
발을 디뎌보지 않고 자신의 세계가 전부라고 믿으며 눈을 감습니다.
어떤 이들은 과학주의자로 태어나고 성장했으면서도
자신에게는 세계관 같은 건 없다고 믿으며 눈을 감습니다.
우리가 이원론을 넘어 일원론의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잃어버린 절반의 세계인 일원론의 세계, 그곳의 주인이 원래 나이기 때문이고,
내가 들어서기 전까지 그곳은 깊은 어둠 속에 버려져 있습니다.
위대한 스승들은 그 깊은 곳에 출구가 있다고,
그 출구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곳에서 빛나는 우주의 본질을 마주할 것입니다.
네이버카페 이벤트로 당첨되어 책을 제공받고 솔직하게 쓴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