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 - 현대인을 위한 정신분석사전
노은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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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읽어 보는 심리 에세이. 20대 초중반에는 비슷한 분야의 교양 심리 에세이를 많이, 아니 거의 그런 종류의 책만 읽었던 것 같다. 특히나 스스로를 불안이 짙은,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책 한 권으로 명쾌한 해답을 얻기를 요행처럼 바랐다. 그러나 진중한 자기 탐구 없는 그런 요행은 변화 없이 태만할 따름이었고, 유행처럼 찍어내는 '힐링'을 표방하는 심리 에세이류에 환멸을 느끼며 꽤 오랜 시간 의도적으로 관련 분야를 피해왔다. 그런고로 《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을 통해 이러한 경계의 녹슨 빗장을 풀어 낼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정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의 상태를 알려주는 신호다.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다. 스스로를 비난하는 대신, 왜 그런 감정이 생겼는지 자신에게 호기심을 갖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 될 수 있다.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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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는 네 가지 챕터로 이루어졌으며 총 28가지의 심리학적 개념을 다룬다. EP문화, 노모패시, 피플 플리저, 리머런스, 말비빔, 조적 방어 등과 같이 낯선 용어들이 흥미롭다. 용어가 주는 낯섦과는 달리 설명하는 개념에는 익숙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이런 상황과 저런 사람, 이랬던 관계와 저랬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형태도 질감도 느껴지지 않았던 무의식 속에서 숨을 죽이며 웅크렸던 무엇들이 스르륵 존재를 드러낸다. 드라마나 영화, 문학 혹은 일상에서 익숙하게 맞이하는 보편적인 상황을 예시로 들고, 간결한 개념 설명과 독자 스스로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을 던지며 능동적 이해를 돕는 저자의 방식이 그러한 과정을 한결 수월하게 만들어준다.





 근간에 읽었던 권혁란의 《이름의 빈자리에》가 생각난다. '이름'이라는 존재, 호명하는 행위에 대한 의의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었는데 자신의 병명을 찾아 고군분투했던 그래픽 노블 《제가 좀 별납니다만…》의 마그리트가 되어보는 기분을 느낀다. 자신의 병명을 찾은 마그리트는 자신의 '비정상'에 '이름'이 주어진 순간, 일종의 안도감과 해방감을 성취한다. '모호했던 마음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과 꼭 닮아있는 것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 '길'을 톺아가며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모호함으로부터 안도감으로 나아갈 것이다. 







 개인적 취향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위안이나 위로, 다 잘 될 것이라는 만사형통식 서술이나 감정적이지 않은 담백한 방식이 좋았다. 혼란스럽고 갸우뚱한 마음을 설명해 줄 다양한 용어와 개념을 담백하게 설명하는 저자의 방식은, 결국 치열하게 답을 구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고 《모호한 마음의 이름 붙이기》는 저자가 제공해 줄 수 있는 하나의 도구처럼 읽히기에 초반에 우려했던 나의 편협한 편견은 말끔히 불식되었다. 또 각 챕터의 길이와 다루는 내용의 깊이와 범위도 부담이 없고 간결하다. 목차를 살펴보며 흥미로운 용어를 따라 챕터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읽어볼 수 있는 점은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곁에 두고 읽기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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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짜 안전감 속에 숨어 있는 것은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견디는 능력이라고 할 수 없다. 모호함을 견디는 것은 회피와 다르며, 성급한 단정을 유예하는 태도다.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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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스스로 쉽사리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나로서는 무척이나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피로한 과정인지라 회피하며 게으르게 굴었다. 초반에 언급한 녹슨 편견과 이러한 상태에 일종의 경각심을 울린, 알파 기능에 관한 마지막 챕터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나의 '베타 요소'가 '알파 요소'로 전환되게 하는 '알파 기능'의 역할을 이미 《모호한 마음의 이름 붙이기》가 상당한 부분을 수행해 준 덕분에 조그만 용기가 생긴다. 소극적 능력에 자신을 조금 맡겨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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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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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의 들판》을 읽기 시작하던 시점에, 공교롭게도 어느 배우 일가의 친일 행적 논란이 불거졌다. 일가의 과거 친일 행적이 이른바 '파묘'되면서 논란은 좀처럼 수그러들 모양새가 보이지 않는다. 밝혀진 친일 행위 그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논란이 된 타이틀을 스스로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모습은 역사적 반성 없이 청산되지 못한 과거를 그대로 반영한 지독한 현재를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더욱 씁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맥락에서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의 존재를 찾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비밀의 들판》 속 저자의 긴 여정은 한 개인사를 넘어, 잊혀간 역사 전체를 조망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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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그 어느 도시에 살면서도 진정으로 내 집에 머무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그 이유가 할아버지의 삶이 잊히고 만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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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마거릿 주혜 리'는 재미한인 이민 3세대로, 미국 휴스턴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계 미국인이다. 태생적으로 부여된 이방인의 감각 속에서 저자는 할아버지 이철하의 잊혀버린 독립운동 기록을 찾아 나선다. 전문가들을 만나 여러 가지 역사적 사료를 탐색하고, 생존해 있는 친척들의 구술을 참고하며 궤적은 점차 할아버지 이철하에서 독립운동가 이철하로 수렴한다. 성야星野, Starry Feild(원제). 비밀로 가득했던 들판이 손녀 주혜가 그리는 또 다른 궤적을 따라 다시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동지들이 그에게 붙여준 이름, '성야'가 품고 있는 의미, 바로 그대로.






 이 여정에서 할머니와의 인터뷰는 굉장히 중요했는데, 시작부터 녹록지 않았다. 할머니는 평생 동안 할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듯, 아들에게조차 일체 관련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수락한 손녀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또 다른 하나의 서사를 비로소 읽어낼 수 있다. 애정이 없던 결혼, 너무 이른 사별, 혼자 짊어져야 했던 가장의 무게. 할아버지의 삶은 영광스럽게 남았지만 할머니의 삶은 그림자 속에서 고달팠다. 침묵 속에 잊혔던 삶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던 것이다. 역사의 한 가운데 있던 삶과 그런 역사를 짊어져야 했던 삶. 표지의 나란히 병치된 두 사진이 그제야 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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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가 남편의 신념이 담긴 물적 증거를 파기한 것은 이런 이유였다. 할머니는 내용에는 관심이 없었다. 전쟁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할머니의 임무는 목숨을 지키는 것이었다. 자신, 그리고 자식들의 목숨을.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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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혹한 시대를 통과해온 가족에게 이철하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전과자이자 가족의 수치로 여겨졌으나 역사는 그를 충청남도 공주 최초 항일 동맹휴학을 이끌어낸 학생 운동가이자 공산주의에 뿌리를 둔 독립운동가로 기억한다. 이쯤에서야 왜 할머니가 남편의 모든 자료를 파기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는지 납득하게 된다. 그의 고귀했던 신념은 가족들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었던 것이다. 세월이 지나고 시대가 달라졌어도 뼛속 깊이, 영혼 깊이 새겨진 상흔을 다시 해부하는 과정은 필히 고통을 수반했을 것이다. 인터뷰를 기반으로 재구성한 과거의 회상 장면들은 침묵했던 기간만큼이나 묵직하게 다가온다.







 마침내 집에 온 기분이다.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베이 에어리어는 아이와 함께 있는데도 여전히 거쳐 가는 곳으로 느껴지고, 한국은 좀 더 익숙하지만 그래도 외국이다. 나에게 집이란 장소가 아니다. 존재의 상태다.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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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흐름은 비단 할아버지 이철하의 궤적만을 그리고 있지 않다. 다소 파편적으로 흩어지는 여러 성질의 글들 또한 과거를 복각하는 과정 그 자체로 느껴진다. 저자가 한국계 미국인으로 성장하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느끼는 디아스포라적 감상, 할머니 민금순의 시점, 가족 전체 서사 전반에 흐르는 유·무형의 시대적 차별, 침묵으로 가려진 역사적 비애가 세대를 관통한다. 부유하던 자신의 정체성의 실체를 찾기 위해 침묵의 역사를 닦아낸 저자의 여정은 '성야'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자손에 이르러서 비로소 온전해진다. 역사는 이들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말았다. 할아버지 이철하의 존재를 찾기 위해 주혜가 걸어올린 물음표, 이제 그 무게는 모두가 짊어져야 할 역사적 사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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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방의 가성비 - 대한민국, 누가 어디까지 지킬 것인가
정욱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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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희고 커다란 4절지에 물감을 가지고 '통일'이라는 주제로 포스터 그리기 숙제를 했던 기억이 있다. 당연히 어린이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였고 그저 통일이라는 것은 국가가 응당 지향해야 할 하나의 당위 정도로만 생각하며 비둘기가 날아다니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그려냈다. 분단국가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배우며 자랐지만 현실에서는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한미 연합 대응 훈련, 세계 군사력 순위, K-방산 등과 같은 국방 소식이 더 익숙하게 들린다. 더불어 최근 각자도생이 되어버린 국제 정세 속에서 '자주국방'의 의미가 더욱 강렬해진 시대에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최근 미국과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 문제와 지난 2월 서해에서 미·중 전투기가 대치하는 사건으로 안보 자강에 대한 논의가 다시 화두에 오르기도 했던 터라 낯선 주제임에도 《자주국방의 가성비》를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지난 정권들을 거슬러 올라가며 역대 정부가 추진했던 국방 정책과 결과를 기술하며 여러 패착들을 분석한다. 이러한 패착을 저자는 '자주국방의 비애'라고 칭하지만 역설적으로 자강의 길은 그 '비애' 속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지적하고 있다. 이를 비롯해 첨예한 현안들 또한 자세하게 살펴보며 그 허와 실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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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를 '자주국방론의 비애'라고 부른다. 비애를 외면하면 자주국방은 실패의 반복을 낳는다. 반대로 비애를 직시할 때만이 자강의 길이 열린다. 이 책은 바로 그 비애를 분석하고, 반복을 끊기 위한 실천적 상상력을 모색한다. p.9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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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시와 전시로 쪼개놓은 작전권은 그 자체로 모순이기도 하지만 전작권을 회수하는 일련의 과정 또한 굉장히 모순적이다. 전작권 환수가 '기간'이 아니라 '조건'으로 변경되면서 그 기준을 충족하고 한국군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한국이 미국에 지불해야 하는 무기 구입비나 방위비 분담금 등과 같은 동맹 비용이 증가한다. 이와 같이 자주국방을 이룩하려는 노력은 역설적으로 동맹 의존도와 경제적 부담을 증가시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이러한 과도한 군비 증강은 북한을 더욱 자극하여 군비 경쟁을 부추겨 한반도 평화 증진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또 다른 딜레마에도 빠지게 되는 것이다.






 구태여 설명을 더할 필요도 없이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의의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더하여 변화무쌍한 국제 정세와 변화한 북한의 위상 또한 현실을 적확하게 직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북한은 이제 사실상을 핵을 보유한, 하나의 정상 국가라는 실제적인 인식 바탕으로 국방 계획을 현실적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유사시 북한을 무력으로 흡수 통일하겠다는 관념적인 목표를 폐기하고 영토 범위를 군사분계선 이남으로 축소한다면 그동안 허비되었던 천문학적인 국방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과감한 전환으로 '가성비'있는 자주국방의 토대를 닦아야 할 것을 제언하는 것이다. 







 이렇듯 조선은 '가난하고 고립된 핵개발국'에서 '가난과 고립을 탈피하는 핵보유국'이 되고 있다. '무너질 북한'이 아니라 '강해지는 조선'을 인식과 정책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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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으며 무엇보다 의미가 있었던 것은 과거의 낡은 국방 안보 관념을 타파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이제 더 이상 명분도, 더하여 실리도 취할 수 없다는 엄혹한 현실과 '우리가 바라던' 북한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마주하는 현실적인 인식의 전환이야말로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자주국방'이라는 기치를 바로 세울 수 있다. 냉철하게 현실을 인식하는 감각에서 비롯한 구조적인 체질 개선의 필요성을 함께 통감한다. 《자주국방의 가성비》에서 말하고 있는 '가성비'란 안보를 타협하는 것이 아닌, 부당한 군비 부담 지출을 정리하여 관념적인 자주국방에서 벗어난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자강 방안의 모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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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 의과학사 - 그림으로 읽는 의과학 혁명의 순간들
유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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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으로 읽는 의과학사?' 쉽게 감이 오지 않은 채로 슬렁슬렁 책을 털어보니 각종 그림과 사진, 포스터, 그래프와 도해 등이 가득한 것을 보고 그제야 이해가 됐다. 의학과 과학과 역사라는 삼중 콜라보가 빚어낸 두툼한 부피를 무겁게 가늠해 본다. 어릴 적 가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나 보았던 다소 기묘하고 괴랄했던, 의술보다는 주술에 가까웠던 초기 의학에 관한 짧고 말초적인 에피소드를 알고 있던 것이 전부였기에 새로운 영역에서 습관처럼 또 낯을 가리며 《비주얼 의과학사》를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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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음파가 청진기를 완전히 밀어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어쩌면 둘은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며 공존하게 될 것이다. 환자 곁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는 도구, 판단과 행위가 시작되는 지점, 그 자리는 언제나 의학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기술의 발전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 어떤 관계를 만드느냐, 그것이 더 본질적인 질문일지도 모른다.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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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힘없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읽어나갔는데 복잡한 의학적 개념을 무리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닌, 그에 이르기까지의 지적 탐구 과정에 초점을 맞춰 인간 서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과학적 호기심이라는 맹아는 과학적 상상력이라는 질문을 만난다. 관찰과 실험, 연구를 양분 삼아 끝내 싹을 틔우며 성장하는 와중에도 내·외부적으로 갖가지 시련에 도전을 받는다. 제 시기에 꽃을 피우지 못하기도 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열매를 맺기도 하는, 그야말로 치열하고 드라마틱한 서사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의사 레오폴트 아우렌브루거는 양조장을 운영하는 부친이 남은 술의 양을 가늠하기 위해 술통을 쳐서 확인하는 모습을 보고 질병이 의심되는 부위를 손가락으로 타진하는 '타진법'을 고안해냈다. 이는 살아 있는 환자에게서 질병의 위치를 추정하려고 한 최초의 체계적 시도(p.91)로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당시에는 환자의 몸을 손으로 접촉하는 진료가 의사의 품위를 훼손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큰 저항을 받았다고. 이렇듯 간단한 방식조차도 새로운 방법론으로 편입되기 어려웠는데 대개의 경우 당대 주류의 상식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개념과 정의를 관철시키는 일은 의과학사에서 몹시도 지난하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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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헝가리 출신 의사 이그나츠 제멜바이스가 의사들에게 소독액으로 손 씻는 것을 의무화하여 산모들의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감소시켰으나 역시 당대 주류의 오만한 편견과 비난 속에서 끝내 인정받지 못하고 씁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또, DNA 이중 나선 구조의 결정적 단서인 'X선 회절 사진'을 먼저 발견한 것은 여성 과학자인 '로절린드 프랭클린'이었으나 왓슨-크릭이 그 공을 가로채 그녀를 제외하고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 사후에야 그녀의 결정적인 기여가 재조명되었다고 하나 제멜바이스의 사례처럼 생전에 인정받지 못한 그들의 씁쓸한 삶은 안타까움을 남긴다. 그들의 공헌이 후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만큼, 그들의 생전 비극이 더욱 짙게 느껴진다.







 과학적 진실은 언제나 깨끗한 실험실에서만 태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야망과 우정, 질투와 협력, 전쟁과 우연이 뒤엉킨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인간적인 맥락까지 함께 읽을 때, 과학은 비로소 살아 있는 이야기가 된다.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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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뜩이는 영감의 순간, 성실하다 못해 집요한 연구,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분노가 서린 열정이나 고귀하고 숭고한 명예 혹은 욕망으로 얼룩진 명예 또한 공존하는, 의과학사는 그 자체로 인간의 드라마틱한 대서사시로 읽힌다. 획기적인 발견들 속에서 여지없이 녹아있는 '인간적인 맥락'은, 다소 차갑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의과학의 역사에 온기를 불어넣으며 생동하게 만들어준다. 몇몇 인물들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질 만큼 입문 교양서로 제격. 꼭 관련 분야가 아니더라도 세상만사에 호기심이 많다면 흥미롭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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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 - 보이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지노동'의 불평등
앨리슨 데이밍거 지음, 전경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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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성의 육아휴직 비율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남성의 가사 노동 참여도나 그에 관한 인식 역시 과거에 비해 많이 개선되었다는 흐름 또한 체감이 될 정도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SNS에서 '유머'로 돌아다니는 남편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일어나는 일에 관한 내용은 여전히 가사 노동을 진두지휘(?)하는 쪽은 여성이고 남성은 이를 수동적으로 수행하며 부차적인 역할에 그치고 마는, 가사 노동의 또 다른 이면을 웃프게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는 가사 노동 속 '인지노동'에 대하여 밀도 높은 탐구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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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단히 말하자면, 인지적 가사노동이란 가족의 필요와 요구가 무엇인지, 가족이 가족 외부의 타인과 사회에 대해 어떤 의무를 지는지, 그러한 가족의 필요와 의무가 충족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수행되는 일련의 사고 과정이다.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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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의 '인지노동'이란 하나의 가정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일에 필요한 모든 정신적인 노동을 뜻하는데, 매일의 식사 메뉴를 결정하고 식재료 재고 현황을 파악하거나 혹은 침대 시트의 적절한 교체 시기를 가늠하는 것과 공과금 납부 기한을 챙기며 각종 경조사 일정을 챙기고 일정을 조율하는 일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앨리슨 데이밍거는 이러한 인지노동을 가정 내 가사 노동에 관한 ①여러 상황과 현상을 파악하고(예측하기) ②다양한 정보를 조사하며(선택지 파악하기) ③그러한 선택지를 바탕으로 결정하고(결정하기) ④사후 관리하며 확인하는(점검하기) 4가지 단계로 정의한다.





 비교적 정량적인 측정이 가능한 육체노동과 달리 인지노동은 눈에 전혀 보이지 않는 비가시성으로 인해 그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다. 인지노동이 주체적으로 모든 가사노동을 총체적이고 포괄적으로 기획하며 총괄하는데 비해 육체노동은 이러한 인지노동 아래 그 과업을 수행하는 수동적이고 조력적인 측면이 강하다. 노동의 강도 측면에서 우리는 신체적인 활동에만 치중하여 판단하는 우를 범하기 쉬우나 인지노동은 회사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도, 침대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24시간 내내 백그라운드 작동을 멈추지 않기에 만성적인 피로를 유발하는 것이다.






 경험적으로도 충분히 예상이 가지만 책에서 진행한 면접 조사에서도 인지노동은 주로 여성이 주도하는 경우가 역시나 많았다. 이들은 이러한 여성 주도 현상을 개인적인 기질 탓으로 돌리는, 불평등을 착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자는 이러한 '성격 본질주의'가 인지노동의 불평등한 심리 정서와 갈등을 자체적으로 완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개인적인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 성별화된 사회가 인지노동에 관한 여러 자본을 여성이 보다 더 쉽게 획득·축적·달성하도록 유도하는 사회적 보상이 강하게 작동한 결과이고, 부정적 결과에 대한 불안과 책임의 사회적 비대칭성 또한 자기방어 맥락에서 강화된 측면이 있다고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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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으로 문제적인 것은 개인들의 선택지를 제한하고, 그들의 행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힘들을 간과하는 데 있다.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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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사회적 성역할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퀴어 커플은 인지노동의 불균형 격차가 이성 커플에 비해 적었으며 관습적인 사회적 각본이 없으므로 서로 대화를 나누며 조율하는 보다 유연한 태도를 보인다. 즉 이성 커플은 사회적, 관습적으로 부여된 성역할을 기질적으로 판단하나 퀴어 커플은 그런 관념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개인의 상황이나 현실적 여건 등과 같은 객관적 기준으로 인지노동을 부담하여 보다 평등한 경향성을 보여준다. 어쩔 수 없이 타고난 '기질'이 아닌 언제든 배워서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관점의 전환이 불평등한 인지노동을 타파할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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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소위 '여성 문제'는 오랜 세월 동안 별도의 영역으로 격리되고, 사소한 것으로 취급되며, 결국에는 무시되어왔다. 더 폭넓은 연대야말로 의미 있는 변화를 요구하는 연구자와 정책 입안자, 그리고 일반 시민들 가운데 남성의 목소리가 더 많이 필요하다.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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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인지노동의 정성적 연구 방법이나 표본 설정의 한계를 스스로 지적하면서도 그동안 정량적 육체노동에 가려진 과소평가된 인지노동의 불평등에 관한 연구와 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인지노동'을 가시화하여 사회적 논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하며 성격 본질주의를 타파하여 사회 구조적인 측면에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책 입안자, 학교, 고용자, 관계 기관 등 다층적이고 포괄적인 층위에서 대안과 방안을 마련하는 제안도 인상적이다. 또 개인 단위에서는 인지노동의 이양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비효율성을 감내하고 지난한 과정을 인내해야 할 디테일까지 짚어낸다.





 '가사노동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라는 명쾌한 슬로건이 딱 인지노동에 관한 적절한 한 문장으로 떠오른다. 실제 커플들의 여러 사례에서 다분히 불평등한 상황을 두고 그저 '기질'탓으로 흐린 눈을 하며 그것을 기꺼이 감내하고야 만다. 인지노동이라는 개념으로 문제를 분석하고 체계화 시키는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의 연구는 그 '흐린 눈'을 개안해 주는 느낌이다. 육체적 가사 노동이 평등해지고 있다지만 여전히 쾌적하게 평등을 체감하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이 불균형한 인지노동에서 기원한 불쾌였다는 각성은 문제 해결을 위한 하나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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