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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평점 :

《비밀의 들판》을 읽기 시작하던 시점에, 공교롭게도 어느 배우 일가의 친일 행적 논란이 불거졌다. 일가의 과거 친일 행적이 이른바 '파묘'되면서 논란은 좀처럼 수그러들 모양새가 보이지 않는다. 밝혀진 친일 행위 그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논란이 된 타이틀을 스스로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모습은 역사적 반성 없이 청산되지 못한 과거를 그대로 반영한 지독한 현재를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더욱 씁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맥락에서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의 존재를 찾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비밀의 들판》 속 저자의 긴 여정은 한 개인사를 넘어, 잊혀간 역사 전체를 조망하게 만든다.

나는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그 어느 도시에 살면서도 진정으로 내 집에 머무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그 이유가 할아버지의 삶이 잊히고 만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p.58
저자 '마거릿 주혜 리'는 재미한인 이민 3세대로, 미국 휴스턴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계 미국인이다. 태생적으로 부여된 이방인의 감각 속에서 저자는 할아버지 이철하의 잊혀버린 독립운동 기록을 찾아 나선다. 전문가들을 만나 여러 가지 역사적 사료를 탐색하고, 생존해 있는 친척들의 구술을 참고하며 궤적은 점차 할아버지 이철하에서 독립운동가 이철하로 수렴한다. 성야星野, Starry Feild(원제). 비밀로 가득했던 들판이 손녀 주혜가 그리는 또 다른 궤적을 따라 다시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동지들이 그에게 붙여준 이름, '성야'가 품고 있는 의미, 바로 그대로.

이 여정에서 할머니와의 인터뷰는 굉장히 중요했는데, 시작부터 녹록지 않았다. 할머니는 평생 동안 할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듯, 아들에게조차 일체 관련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수락한 손녀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또 다른 하나의 서사를 비로소 읽어낼 수 있다. 애정이 없던 결혼, 너무 이른 사별, 혼자 짊어져야 했던 가장의 무게. 할아버지의 삶은 영광스럽게 남았지만 할머니의 삶은 그림자 속에서 고달팠다. 침묵 속에 잊혔던 삶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던 것이다. 역사의 한 가운데 있던 삶과 그런 역사를 짊어져야 했던 삶. 표지의 나란히 병치된 두 사진이 그제야 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할머니가 남편의 신념이 담긴 물적 증거를 파기한 것은 이런 이유였다. 할머니는 내용에는 관심이 없었다. 전쟁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할머니의 임무는 목숨을 지키는 것이었다. 자신, 그리고 자식들의 목숨을. p.306
엄혹한 시대를 통과해온 가족에게 이철하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전과자이자 가족의 수치로 여겨졌으나 역사는 그를 충청남도 공주 최초 항일 동맹휴학을 이끌어낸 학생 운동가이자 공산주의에 뿌리를 둔 독립운동가로 기억한다. 이쯤에서야 왜 할머니가 남편의 모든 자료를 파기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는지 납득하게 된다. 그의 고귀했던 신념은 가족들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었던 것이다. 세월이 지나고 시대가 달라졌어도 뼛속 깊이, 영혼 깊이 새겨진 상흔을 다시 해부하는 과정은 필히 고통을 수반했을 것이다. 인터뷰를 기반으로 재구성한 과거의 회상 장면들은 침묵했던 기간만큼이나 묵직하게 다가온다.

마침내 집에 온 기분이다.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베이 에어리어는 아이와 함께 있는데도 여전히 거쳐 가는 곳으로 느껴지고, 한국은 좀 더 익숙하지만 그래도 외국이다. 나에게 집이란 장소가 아니다. 존재의 상태다. p.380
책의 흐름은 비단 할아버지 이철하의 궤적만을 그리고 있지 않다. 다소 파편적으로 흩어지는 여러 성질의 글들 또한 과거를 복각하는 과정 그 자체로 느껴진다. 저자가 한국계 미국인으로 성장하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느끼는 디아스포라적 감상, 할머니 민금순의 시점, 가족 전체 서사 전반에 흐르는 유·무형의 시대적 차별, 침묵으로 가려진 역사적 비애가 세대를 관통한다. 부유하던 자신의 정체성의 실체를 찾기 위해 침묵의 역사를 닦아낸 저자의 여정은 '성야'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자손에 이르러서 비로소 온전해진다. 역사는 이들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말았다. 할아버지 이철하의 존재를 찾기 위해 주혜가 걸어올린 물음표, 이제 그 무게는 모두가 짊어져야 할 역사적 사명일 것이다.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12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