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개정판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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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조지 오웰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를 읽은 후에 그의 르포르타주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었다. 앞선 에세이에서 오웰의 전반적인 생의 이력과 그가 주창하는 정치적 사상과 사회적인 비평들은 이 책을 몰입하면서 읽기에 더할 나위 없는 바탕 지식이 되어주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오웰이 버마에서 식민지 경찰 생활에서 환멸을 느끼고 고국으로 돌아온 사건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식민지 경찰 간부로서의 생활은 그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했고 '피억압자와 억압자'라는 부조리한 구조적 문제에 대한 문제적 의식을 짙게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와중에 레프트 북클럽이라는 진보 단체의 청탁으로 이 르포를 집필하기에 이른 것이다. 조지 오웰의 이 르포는 당대에도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 핍진한 기록은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지대하고도 위대한 고전이 되었다.




이 르포의 1부는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영국 북부 탄광 지역의 광부들의 전반적인 삶을 오웰 자신이 직접 체험하며 탐구한 내용이다. 시작은 그가 묵었던 하숙집의 열악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에 대한 묘사부터 시작된다. 다리를 곧게 뻗을만한 정도의 공간도 확보되지 못한 침실 공간, 먼지가 덥수룩하게 쌓인 가구들, 하숙집에서 제공되는 빈약하고 불결한 식사 수준… 등의 묘사를 어찌나 세세하게 포착하는지 읽는 내내 불쾌한 감각이 살갗을 더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웰이 여러 하숙집을 비교하며 기록한 메모들을 비교하며 읽어도 그가 머문 브루커 씨의 하숙집이 그렇게 유별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광부를 비롯한 노동 계급의 하층민들의 주거 수준이 전반적으로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보여준다.


아침 식사 때 식탁 밑에 가득 찬 요강 단지가 있는 것을 본 날, 나는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있다 보면 더 우울해질 것 같았다. 더럽고 냄새나고 음식이 형편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의미하게 정체되어 썩어간다는 느낌, 사람들이 지하에 갇혀 바퀴벌레처럼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기어다니며 끊임없이 비열한 불평불만만 늘어놓고 있다는 느낌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p.26


오웰은 광부가 되어 갱도의 막장으로 입장한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온갖 곤혹스러움이 그를 덮친다. 암흑과 소음, 탁한 공기, 탄진 속에서 온전히 서서 걷기도 힘든 상태로 막장까지 기어가듯 걸어간다. 입구에서부터 막장까지의 길이는 멀게는 수 킬로미터까지 떨어져 있는데, 이 막장까지 걸어가는 시간은 노동 시간에 포함되지 않는 부조리부터가 시작이었다. 막장에서 무릎을 꿇고 석탄을 채굴하기 시작하는 노동은 마땅한 쉬는 시간 없이 7시간의 고강도 노동으로 이어진다. 엄청난 강도의 육체노동에 비해 그들이 받는 임금 수준은 형편없을뿐더러 그마저도 램프 같은 필수품의 값이 부당하게 청구되는 등 다분히 착취적인 면모들이 드러난다. 특히 일반적인 통계와 현장의 실제적인 상황을 놓고 비교하는 부분들은 수치와 현실의 사이의 괴리를 짚어내는, 분석적이고 꼼꼼한 시선의 해석이 아닐 수가 없다.





막장 체험에서 더 나아가 광부 노동자들의 거주지에 대한 탐색도 이어나간다. 등을 맞댄 공동 주택이나 버스를 개조한 캐러밴 등의 주거 형태는 슬럼화되어서 정부의 골칫덩이 취급을 받는다. 인구 과밀 문제 및 슬럼가 철거를 위한 주택 재개발 계획은 몹시 느리기도 했지만 비인간적인 방식, 예컨대 근무지와 주거지 간의 거리 및 교통편을 고려하지 않거나 고지대에 지어져서 기후 조건을 무시하는 등의 무자비한 방식을 채택한다. 당국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처리'하는 것에 가까운 행태를 보인다. 지자체에서 제공하는 주택의 입주 조건과 제약들은 까다롭기 마련이었고, 오웰은 이런 수칙들은 주거민, 즉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생활의 생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하게 다루는 지점은, 대량 실업 상황에서의 실업 수당에 관한 여러 허울들이다. 당국에서 제공하는 수당과 현실에서 수급자들이 그 수당을 가지고 생활하는 수준의 차이, 실업 수당으로부터의 사각지대에서 생기는 모순 등을 수치적으로 비교한다. 또한 '실업'을 인지하는 차이를 지적하면서 '개인적인 재앙' 또는 '개인의 게으름'으로 단순 납작하게 정의하는 것을 경계한다. 광부로 대변되는 노동 계급의 거의 모든 실태, 열악한 노동 환경과 형편없는 임금, 슬럼화된 주거지와 명분뿐인 실업 수당, 더불어 광부라는 노동 계급에 대한 편견과 인간적인 몰이해를 깊이 파고든다. 연민과 같은 감정에 호소하는 감상적인 접근 방법이 아니라 날카롭고 꼼꼼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그 상황과 실태를 담담하게 서술하며, 통계와 수치를 사용하여 구체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의 접근이 오히려 더 설득력 있게, 그들의 상황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든다.


이렇게 저열한 불편과 냉대를 당하고, 늘 기다려야 하고, 모든 걸 상대방 편한 대로 해야 하는 것은 노동 계급의 생활에선 당연한 일이다. 무수히 많은 영향력이 끊임없이 노동자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피동적인' 역할로 축소시켜버린다. p.66




2부에서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이상향으로 하는 오웰의 정치적인 견해와 더불어 파시즘을 타파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써의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오웰의 주장을 다룬다. 일단은 조지 오웰의 자전적인 고백으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버마에서 제국 경찰 간부로 재직하던 시절 속 괴로웠던 심정을 고백하며 5년 만에 퇴직을 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피압제자'의 위치에서 일종의 속죄를 위해 자발적으로 부랑자 생활을 시작한다. 오웰은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기도 하고, 빈민 구제소에 들락거리며 노동 계급의 하층민의 삶에 융해된다. 이런 생활 속에서 그는 노동 계급,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특성과 진정성을 이해하게 되며 이와 비교하여 부르주아 계급, 중산층의 허울과 위선을 서술한다.


내가 돈을 기준으로 계급을 정의하고 있음을 간파하셨을 텐데, 그렇게 해야 이해하기가 가장 쉽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영국의 계급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돈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돈으로 이루어진 계층 구조이지만, 거기에 그림자 같은 계급 제도가 스며들어 있는 형국이다. p.162


특히 오웰은 자신을 '상류 중산층의 하류 계급'이라는 신분으로 정의하는데 이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 삶의 여흥을 즐기는 방식, 일상을 영유하는 과정 그리고 'h' 발음의 유무로써 신분을 구분하나, 경제적으로는 부르주아 계급에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노동 계급에 가까운 재정 상황을 유지하는 처지를 이른다. 이 모순적인 계급에 속한 오웰은 다시, 노동 계급에 대한 모멸적인 인식이 태생부터 유래한 과정과 자신 또한 그러한 인식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과거를 고백한다. 버마 시절로부터의 양심의 가책은 자발적 부랑자 생활을 시작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삶에 직접 뛰어들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노동 계급에 대한 차별적이고 모멸적인 시선을 거둘 수 있었다고 말한다.




오웰은 자신과 같은 다수의 중산층 하류 계급의 특성을 해석하고 그 계급적 모순을 지적한다. 또한 노동 계급이 중산층과 부르주아 계급을 오만하고 게으른 무지렁이로 폄하하며 반목하는 인식을 두 계급이 화합하지 못하도록 하는 원인으로 분석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오웰은 자신이 주장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어떻게 다수의 대중에게 전파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인텔리들이 주장해왔던 사회주의 운동의 위선적이고 피상적인 면모들을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의 본질을 '정의와 자유'로 정의한다. 여러 가지 방법론 중 하나의 예시로, 부르주아 중산층 계급은 자신의 경제적인 계급을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그들의 '동지' 등의 상투어를 강요하지 않는 방식 등 보다 포괄적이고 대중적이며 세련된 사회주의 운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특히나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적인 요소로 구조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약탈자-피약탈자'라는 부조리한 경제 체제 구조로 인식해 보자는 하나의 대안은 인상적이다.


우리가 함께 목표로 삼고 단결할 수 있는 이상은 사회주의의 바탕이 되는 이상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정의와 자유다. 그러나 이런 이상은 거의 완전히 잊혀버려 '바탕'이란 말을 쓸 수도 없는 지경이다. 이 이상은 이론 일변도의 독선과 파벌 다툼과 설익은 '진보주의'에 층층이 묻혀버렸다. 똥 더미 속에 감춰진 다이아몬드가 되어버린 셈이다. 사회주의자가 할 일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정의와 자유 말이다! p.286



조지 오웰은 이 책을 집필하고 탈고하자마자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스페인 전쟁에 참전했다고 한다. 그 당시 팽배했던 파시즘의 영향권에 대항하기 위한 민주적 사회주의로의 제안은 그 우려와 한계가 명확하게 보이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가 노동 계급, 피억압자들을 이해하기 위한 체험적 노력들과 섬세하면서도 냉철한 시선들은 당신의 사회적 배경과 오웰의 계급적 신분까지 고려하면 사뭇 경이롭기까지 하다. 노동하는 삶의 르포와 파시즘에 대한 저항, 사회주의라는 사상까지 읽어나가면서 떨칠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의 노동 사정도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까닭이다. 산업 현장에서 죽어가는 노동자들, 고공에서 농성하는 노동자들,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현시점에서 다시 읽는 조지 오웰의 책들은 이런 지점에서 더욱 유의미하다. 그의 글들이 아직까지 유효한 까닭이 서글프면서도 그의 냉철하고도 날카로운 현실 비판 의식은 다시 널리 읽혀야 할 것이다.





*한겨레 서평단 하니포터 10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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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개정증보판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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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와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작가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는 초판 29편의 에세이에 국내 초역 2편을 추가한 개정증보판이다. 도합 31편의 에세이와 조지 오웰의 연보, 조지 오웰과 책의 이해를 돕는 옮긴이의 말까지 합하면 500페이지가 거뜬히 넘어간다. 옮긴이가 선정한 31편의 에세이는 실제 발간된 순서대로 실려있고, 각 에세이의 첫 부분에는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 속 작가 조지 오웰의 개인적 상황을 덧붙인 주석이 달려있어 각 편의 시대적인 맥락의 이해를 돕는다. 조지 오웰의 개인사 관련 에세이나 사회·정치 비평, 작가론 등 다종다양한 방면의 글들이 쏟아지는 터라 개인적으로는 뒤에 짤막한 작가의 연보를 통해 그의 생애 흐름을 먼저 이해한 뒤에 읽는 것이 더욱 도움이 될 것 같다.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무수한 에세이와 서평과 칼럼을 남겼던 그는 소설 《1984》와 《동물농장》으로 위대한 작가 반열에 들어섰던 명성만큼이나 에세이스트로서의 면모도 그 역량만큼이나 과연 대단하다. 당대 혼란스러웠던 시대적 흐름 속에서 여러 정치사상에 대한 정치 비평이나 칼럼, 시대적 흐름에 놓인 사회적 상황에 대한 적극적인 의견 개진 등의 글들은 다소 어렵기는 해도 정치와 예술의 융합을 꾀하고자 했던 그의 정치관과 예술관 중의 한 축을 농밀하게 살펴볼 수 있는 밀도 높은 에세이들이다. 특히 당대 세계 대전이라는 폭력적이고도 혼란한 시대적 상황에서 모순적이면서도 분열되는 다양한 계급층의 태도와 여러 어지러운 사상들 간의 충돌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태도는 그가 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리게 할 만큼 완벽한 저널리스트의 모습이었다.



이러저러하게 냉철한 정치 비평도 인상적이지만 기억에 남는 에세이들은 그가 어릴 적 겪은 기숙학교에서의 일들이라던가, 대영제국 시절 버마에서 제국 경찰로 복무하던 시절에 겪은 일들이라던가, 장미 나무를 심는 것에 대한 단상이라던가 같은 개인적이고도 내밀한 신변잡기적인 에세이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아무래도 그런 글들 속에서 작가 조지 오웰을 넘어선 인간 에릭 아서 블레어의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두 소설만으로 조지 오웰을 설명하기에는 역시나 부족한 측면이 있기에 여러 에세이를 모아놓은 이 묶음이야말로 그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인 것이다.



꽤 총명했던 그는 명문 학교였던 이튼 스쿨을 장학생이었다. 이튼 스쿨에 입학하기 전에 다녔던 세인트 시프리언스에서의 유년 시절을 반추하며 쓴 〈정말, 정말 좋았지〉라는 자전적 에세이는 그 제목부터 풍자적이다. 학생의 부모 소득 수준이나 자산 규모 혹은 작위라는 계급에 따라서 행해지는 교사들의 차별, 체벌을 빙자한 폭력, 열악한 기숙 환경 속에서 어린 조지 오웰이 파악했던 부조리한 생태를 담담하게 서술한다. 반액 장학생이자 평범했던 가정 출신이었던 오웰에게 학교가 기대하는 것은 명문 학교 입학이라는 도구적 결과였을 뿐이었다. 폭력적인 교사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일말의 애정과 인정을 갈구하기도 하는 모순적인 양가감정에 관한 서술은 세태를 인식하는 작가의 세밀한 감각을 엿볼 수 있고, 부조리한 생태 속에서 일방적으로 찍힌 낙인을 몸소 체화하면서 깨닫는 차별의 고백은 그 담담한 서술이 상황을 더욱 부조리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당하는 건 가난하지만 '재주'는 있는 아이였다. 그런 우리의 머리는 그가 돈을 묻어둔 금광이었으니, 그는 자기 몫을 되찾기 위해 우리 머리를 쥐어짜야 했다. 나는 삼보와 나의 금전적 관계의 성격을 파악하기 오래전부터, 내가 대부분의 다른 아이들과는 처지가 다르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p.423 〈정말, 정말 좋았지〉


장학생으로 이튼 스쿨에 입학하면서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던 오웰은 이튼을 졸업하고 대학 진학으로 이어지는, 미래가 보장된 길을 걷지 않는다. 이튼을 졸업하고 '인도 제국경찰'에 지원하며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관할의 버마에서 경찰 간부 생활을 5년 동안 수행하게 된다. 이 시절을 기록한 〈교수형〉과 〈코끼리를 쏘다〉라는 두 편의 에세이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버마에서 제국 경찰 간부로 지내면서 그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은 그에게 제국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은 양심의 가책으로 다가왔고 결국 경찰직을 그만두고 글을 쓰기로 마음먹는 계기가 된다.



〈교수형〉이라는 에세이는 사형이 집행되던 날, 사형수를 사형장까지 인도하는 그 짧은 시간의 과정을 기록한 내용이다. 긴장된 분위기,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집행자들의 어색한 태도, 생명의 무엇을 깨닫는 찰나의 순간들이 한데 섞여 기묘하게 불쾌한 감상이 남는다. 사형수의 웅덩이를 피하는 몸짓, 즉 무의식적으로 행해진 생의 본능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다름없음에서 관성적으로 활자를 따르던 나도 화들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모든 일이 끝나고 과장되게 웃는 그들의 모습은 불쾌하기 짝이 없고, 한편의 블랙 코미디가 아닐 수가 없다.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p.25 <교수형>


역시 버마에서 경찰 간부로 지내던 어느 날에 기록인 〈코끼리를 쏘다〉. 오웰은 통제력을 상실한 코끼리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는 긴급한 신고를 받고 총을 챙겨 코끼리를 찾아 나선다. 흥분한 코끼리는 끝내 사상자를 만들고 오웰은 그를 뒤따르고 있던 마을 주민들로부터 코끼리를 사살하기를 종용 받는, 무언의 압박감을 느낀다. 그저 겁을 줄 요량으로 총을 챙긴 초반의 마음과는 다르게 오웰은 결국 코끼리를 사살하고야 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번민하던 오웰의 내적 갈등은 그가 제국 경찰이라는 지위에서 오는 응당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체면치레와 기원 없는 의무감의 발로였다. 죽어가는 코끼리에 대한 묘사와 식량을 얻기 위해 득달같이 코끼리에게 달려가는 마을 주민들을 목도하면서 느끼는 기괴한 죄책감을 읽는 사람도 함께 느끼게 된다. 억압이 역전되는 상황과 인간의 죽음을 자신의 사살 행위의 정당성으로 치환해버리는 무자비한 인간성을 발휘해버린다.



이 책의 표제작인 〈나는 왜 쓰는가〉는 조지 오웰의 정치론과 문학론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에세이로써 글을 쓰는 동기를 4가지로 설명한다. 1. 순전한 이기심, 2. 미학적 열정, 3. 역사적 충돌, 4. 정치적 목적이 그러하다. 특히 네 번째 정치적 목적은 그의 글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가 살아온 삶의 여러 궤적들, 특히나 혼란스러웠던 시대상을 비롯하여 이를테면 제국 경찰 간부 시절에서의 경험, 빈민가의 밑바닥 생활을 바탕으로 쓴 르포와 에세이, 전쟁에 참전하며 생사를 가르던 경험이 그를 정치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p.320 〈나는 왜 쓰는가〉




책을 다 읽고 다시 앞으로 돌아와 표제작의 상징성은 차치하고, 제목인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을 곰곰이 생각한다. 작가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끊임없이 쓰는 것으로,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이 방대한 양의 비평과 칼럼, 르포와 에세이, 그리고 시와 소설로 대신하고 있는 것 같다. 섬세한 시선과 관찰력으로 다양한 계층의 삶을 기록하고, 사회상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비평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문학과 정치라는 두 가지 속성을 융합하려는 노력이 끝내 빛을 발하며 현대까지 칭송받는다. 읽다 보면 그는 '왜 쓰는가?'라는 고상한 톤보다 '왜 써야만 하는가?'라는 보다 당위적이고 투쟁적인 톤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편 해본다. 그의 말과 글과 사유들이 와르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 압도적인 활자들 속에서 유유히 유영하기도, 정신없이 허우적거리기도 했지만 윤슬처럼 반짝이는 그의 사유들을 좇는 찬란한 순간을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한겨레 서평단 하니포터 10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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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가 왔다
정이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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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주 오랜만에 친구 집에 다녀왔다. 매일 카톡을 주고받지만 거의 반년 만에 만남이었는데 그 사이, 작고 하얀 말티즈 한 마리가 등장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작고 하얀 개가 친구 집 현관문을 열자마자 온몸으로 맹렬하게 반가움을 드러냈다. 어쩔 도리 없이 문 앞에 주저앉아 한참을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연신 '귀엽다, 귀여워'를 남발하며 쓰다듬으면서도 이 작은 생명체의 맹목적인 반가움이 의아스럽기도 했다. 반년의 안부는 제쳐두고 내리 2시간 동안 이 작고 하얀 개의 서사부터 특성과 말썽, 기깔나는 개인기들까지… 쉼이 없었다. 이즈음에 《어린 개가 왔다》를 반쯤 읽고 있었는데 하루를 머물고 돌아와 마저 읽기 시작하니 감흥이 사뭇 남달랐다. 저마다의 고유한 서사였다.



이 책은 작가가 유기견 보호소에서 루돌이를 반려견으로 맞으면서 일어나는 여러 경험과 사유의 기록이다. 유기견 보호소 SNS에서 어린 바둑이를 보고 작가의 가족 구성원 75%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서 루돌이는 그렇게 가족의 반려견이 되었다. 가족들과 달리 작가는 무지라는 불안과 걱정 속에서 루돌이를 맞을 준비를 한다. 특히 루돌이와의 처음을 맞이하는 전후,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작가가 경험하는 걱정과 불안,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만남의 기쁨보다 책임의 무게를 더 무겁게 느끼는 반려인으로서 작가의 태도를 읽고 나는 그가 곧 루돌이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 누가 온다는 것은 정말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방금 누군가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가, 한 '개'의 일생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p.31


가족 구성원 75%의 절대적인 지지와는 무관하게 루돌이와 가장 많이 지내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작가 자신이었다. 이러한 독박 돌봄에 대한 작은 한탄과 시간적·공간적 자유의 박탈 등은 어느새 루돌이와 함께 하는 일상으로 융해되면서 끝내는 루돌이 없는 세상은 생각할 수 없다는 고백으로 변모한다. 서로 공존하기 위한 여러 가지 온갖 부침의 과정 속에서 훈련과 교육이 동반되기도 하지만 결국 서로의 마음을 추동하게 만든 것은 교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나의 '개'가 물리적으로 오는 것이 아닌, 하나의 '세계'가 밀물처럼 밀려들어오는 것이다. 그 밀물에 살짝 발목만 담가보는 독자이자 비반려인인 나에게도 이것은 새로운 차원의 세계였던 것이다.


어린 개와 사는 것은 그전에 모르고 지났던, 모르고 지나도 아무 문제 없었던 삶의 여러 지평이 갑자기 넓어지는 일이었다. p.108





반려견과 함께하는 일상의 적응과 초반의 부침에 관한 내용을 읽다 보면 나의 친구가 풀어준 지난한 시간과도 꽤나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퇴근 후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돌아온 집에서 마주하는 반려견의 분별없는 배변 자국과 새벽 시간 뜬금없는 하울링, 사회성을 기르기 위해 다른 반려견과의 교류를 주선하지만 좌절되는 무용한 노력들 외에도 크고 작은 질병으로 수술과 케어가 필요했던 상황들은 내가 어림짐작했던 반려 생활의 모든 것을 뛰어넘는 차원이었다. 짜증과 한탄, 현타를 넘어서 이제는 그저 어울렁 더울렁 같이 사는 것이라고, 저 녀석도 저 나름의 고충 속에서 인간인 자신을 이해하고 적응하며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친구의 말은 그야말로 두 세계가 끊임없이 충돌하며 빚어낸 공존의 세계였다.





책장을 넘어갈수록 변모하며 진전하는 작가와 루돌이의 관계성도 감동적인 부분이 있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세계가 점점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특히 루돌이를 하나의 개체로 독립시켜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반려 견뿐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種이 다른 종種을 대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어야 할 하나의 올바른 관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려동물 인구가 1500만 명이 넘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지만 여러 플랫폼에서 빈번하게 마주하는 동물에 관한 학대와 방임과 유기 사건들은 이런 인식의 부재가 초래한 비극이다. 작가가 루돌이를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을 따라 책을 읽다 보면 법적으로 아직도 소유물 혹은 재물로 취급되어버리는 생명체가 더는 없길 바라는 마음이 절로 든다.


…무엇보다 이 책이 내게 준 가장 큰 깨우침은 모든 개가 개별적 존재임을 알게 한 게 아닌가 싶다. 하나의 인간은 이 세상 어떤 인간들과도 다른 개별 개체인 것처럼 루돌이 역시 이 세상의 어떤 개들과도 다른 개별 개체였다. 우리는 틀림없이 '인류의 일원:개의 일원'이지만 '개별 개체 1:개별 개체 1'로 치환되는 순간 무언가 조금쯤 달라졌다. 우주 아래 동등하게, 너 하나 나 하나. 그렇게 우리는 균등하게 일대일. p.96


책에서는 루돌이와 함께 하면서 겪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등장한다. 어린 개가 아니었으면 모르고 살았겠지만 모르지도 몰랐을 것들에 대하여라는 책의 어디쯤에 적힌 문구는 루돌이와 작가가 일상을 함께 해나가면서 경험하는 일들, 그 과정에서 찬란한 사유의 순간들, 그러나 결코 유쾌하지만은 일들을 마주하는 경험들의 총체를 정말 정확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모르는 것도 몰랐을 것들의 세계가 확장되면서 서로의 삶은 다채로워진다. 결국은 반려동물과 사랑에 빠지고야 마는 반려인들의 서사는 일면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각 서사의 결은 또 고유하고 개별적이어서 작가가 말한 개별 개체로서의 존재를 다시 끔 생각해 보게 한다. 인간의 오만한 관점을 고백했던 작가의 말처럼 반려견의 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또 다른 사랑의 무한한 확장은 아닐까를 미루어 짐작해 볼 뿐이다.





이 사회의 어떤 분야든 구조적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저 '내가 모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태도로 살아간다. 루돌이가 아니었으면 나 역시 '보호받지 못하는 동물의 세계와 그 세계를 둘러싼 여러 일에 대해 인지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내가 사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으므로 계속 모르는 채 평온히 살았을 것이다. 어렴풋이 눈을 뜬 이상 몰랐던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p.174


친구의 말티즈는 하룻밤 손님인 나에게도 무한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따뜻하고 작고 하얀 몸통을 찰싹 붙여 앉아 계속해서 손길을 갈구하던 까만 두 눈동자가 아직도 선명하다. 어떤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존재에 대한 이해의 축을 옮겨 가는 것,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 사랑에는 필히 책임과 의무가 뒤따른다는 것 등과 같은 자명한 사실들은 이것이 결코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다시 끔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 사랑의 그림자까지도 기꺼이 감내하는 수고로움 앞에 겸허해지고야 만다. '어린 개'에서 비롯한 또 다른 차원으로의 확장은 책을 읽는 독자인 나에게도 인식의 확장을 도와주었다. 책을 덮고도 잠시 여운이 남아 부디 모든 반려의 세계가 안온하고 평화롭기를 빌어본다.





*한겨레 서평단 하니포터 10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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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독은 축복이 될 수 있을까 - 1인분의 육아와 살림 노동 사이 여전히 나인 것들
김수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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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분의 육아와 살림 노동 사이 여전히 나인 것들〉이라는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저자가 20대에 겪은 퇴사와 결혼, 임신과 출산, 육아와 살림이라는 인생의 중차대한 곡절들을 넘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느낀 일련의 감정들과 상념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책을 읽기 전에 으레 책날개의 저자 소개를 읽고는 하는데 저자의 나이와 지상파 아나운서라는 이력,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룬 결혼과 출산이라는 저자의 경험이 새삼 놀랍기도 했고 나로서는 경험해 본 적 없는 결혼·출산·육아라는 차원의 세계인지라 일면 궁금해지기도 했다. 피상적으로 생각한 저자의 삶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들을 착실하게, 누구보다 성실하게 넘어온 것처럼 보였다. 그런 저자가 말하는 고독과 축복은 어떤 의미일까? 이런 질문을 걸고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글을 썼고,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글을 썼다. 그러나 육아는 단 한순간도 내게 고상한 것을 보여준 적이 없다. 내가 부릴 수 있는 재주 중에 제일 고상한 글쓰기가, 내가 태어나 해본 것 중에 가장 추레한 육아를 소재로 다루기 시작하니 인지부조화가 시작됐다. 그 사이의 간극이 나를 힘들게 했다. 글쓰기는 나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거였는데, 글쓰기조차 내 마음을 솔직하게 기록하라고 등 떠밀자 사지에 내몰린 사람처럼 두려웠다. p.15


이런 자기 고백으로 시작하는 저자의 이야기는 일단 굉장히 솔직했다. 육아를 시작한 경험을 토네이도에(p.7) 비유하며 주위에 모든 것이 휩쓸어 사라지는 것 같았다는 비유 속에서 저자는 끊임없이 '나'에 대해서, 자신의 자아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엄마'라는 지위와 '육아'라는 책임 앞에서 저자는 한껏 추레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위축되기도 한다. SNS에서 자신의 모습과 현실에서의 자신의 모습 사이에 괴리를 고백하면서도 그것의 모습과 이것의 모습, 전부 어쩔 수 없는 '나'의 모습임을 인정한다. 육아의 신체적인 부침과 정신적인 방황,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자아 속에서 좌절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상황을 '고독'으로 정의하면서 해결하는, 나름의 방식으로 상황을 타개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또 임신과 출산, 육아라는 경험을 사회적인 이미지로 뭉뚱그려 추상적으로 술회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의 산물로 풀어나가는 점도 진솔하게 느껴진다.


엄마가 된 이가 어른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출산 후 아이를 키우며 지나온 헌신과 돌봄의 시간이 짙은 향이 되어 몸에 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완전히 혼자인 시간을 건너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들을 지나오고 나면 우리는 언제나 어른이 되어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완벽히 혼자가 되어봤다는 뜻이라는 것을 엄마가 된 뒤에 알았다. p.28




남성의 육아 휴직 비율이 과거에 비해 비약적으로 상승했고,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추세라지만 위와 같은 에세이에 공감을 보내는 여성들이 많은 것을 보면 아직도 현실 육아 상황에는 그 자리가 요원한 것 같다. 저자가 경험한 현실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쪼그라든 자아가 애처롭게 느껴지는 반면에 끊임없이 자신만의 자아를 발굴하고 지켜내려고 하는 저자의 노력은 투쟁으로 읽히고, 그런 와중에도 육아와 살림 노동으로 점철되는 일상 속에서 행복이 보내오는 시선을 놓치지않는다. 연애와 결혼에서 사랑이라는 의미의 재정립, 이제는 배우자와 자식으로 묶인 가족이라는 형태 속에서의 자신의 새로운 위치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저자의 삶을 뒤흔들었던 결혼, 출산, 육아, 살림이라는 토네이도. 저자가 거대한 고독이라는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푹죽 같은 축복의 찰나들을 포착해나가는 모습으 내밀하고도 치열하지만 자못 당차고 씩씩하게 보이기도 한다.



완벽한 이해는 또 다른 차원을 이해하는 데서 오는 이해의 확장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던 지점은, 저자의 어머니께서 중년의 나이에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는 부분이었다. 처음에 저자는 자신의 육아에 어머니의 도움이 소홀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현실적이고도 사뭇 이기적인 이유로 불퉁해했지만 저자 자신이 로스쿨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 그 시간 속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고찰하면서, 부모의 마음을 스스로 깨닫고 이해를 확장하는 부분은 저자가 고독 속에서 찾아낸 가장 찬란한 축복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개인적으로는 가장 감동적인 사유의 순간이었다.


…엄마의 열정을 '나이 먹고 자식 다 길러도 끝나지 않은 꿈' 같은 걸로 치환해서 교수님이 노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편협함을 지적한 바와 같이 엄마라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인생의 상상력을 마구 축소했다. p.195


이른 나이에 결혼을 결심하고 아이를 가지며 퇴사한 상황을 두고 사회의 잣대는 그녀의 정체성을 거칠게 재단했다. 결혼을 위한 도구로 자신의 직업과 커리어를 폄하하고, 뉴스 기사 앞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 앞에는 항상 남편의 직업이 따라 붙었다. 출산과 육아로 얻은 '엄마'라는 지위와 그에 따라붙는 각종 책임과 신체적, 정신적 혼란만으로도 넘칠 만큼 버거운 상황인데 저자자는 그 와중에도 사회인으로써의 자아, 자신의 직업과 커리어에 대한 고민 또한 놓지 않는다.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출산을 하고 아이를 양육하면서 여러 번의 로스쿨 시험에 응시한다. 여러 번 낙방을 거듭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는 미국 로스쿨 대학에 장학금을 받으며 합격하기에 이른다. 저자의 고독은 결괏값으로의 축복이 아닌 고독 속에서 치열하게 분투하는 모든 과정이 축복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어림짐작을 해본다.





저자가 겪은 결혼과 출산, 육아와 살림이라는 경험은 사회가 지적한 여러 문제들을 포함한다. 육아를 전담하는 주 양육자인 여성의 경력 단절 문제, 육아 휴직 문제, 독박 육아, 맞벌이 부부를 위한 육아 돌봄 정책의 부재…, 결국 사회 정책의 부재나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들이 많다. 그러면서 파생하는 결혼이나 출산, 육아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들은 자연스럽게 비혼과 저출산으로 귀결되고 만다. 저자의 에세이에 공감과 위로를 받는 같은 처지의 여성들의 후기를 읽다 보니 공감과 위로만으로 현실을 달래야 하는 현실이 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려 아이를 양육하는 데서 오는 긍정적인 것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왜 이런 모든 부침의 수난을 오로지 개인적인 문제로, 개인의 역량에만 기대어 해결되기를 바라는, 모두가 방관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와는 거의 대척점에 있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른 나이에 급격한 생의 변화 속에서 부단히 중심을 잡고자 했던, 여러 감정과 가치와 사유들이 충돌하면서 내는, 마치 부싯돌 사이에 튀어 오르는 작은 불꽃같은 치열한 고민들의 흔적이었다. 저자는 육아하는 자신의 모습을 두고 고상하지 않다고 했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잣대에 불과하다. 고독 속에서 치열하게 사유하고 고찰하는 모습은 분명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차원의 축복이 아닐 수가 없다.





*본 서평은 한겨레 서평단 하니포터 10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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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운 보수 의로운 진보 - 최강 형제가 들려주는 최소한의 정치 교양
최강욱.최강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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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TV로 지상파 뉴스를 보는 대신에 시사·정치 유튜브를 본다. 12·3 불법 비상계엄 사태 이후로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속보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가장 빠르게, 또는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달해 주는 플랫폼이 유튜브였기 때문이다. 빠른 정보 전달도 전달이었지만 무엇보다 사안에 대한 가감 없는 비평과 해석은 답답한 시국에 유일한 해갈이었달까. 현 상태의 정치적인 생태, 서울대 법대라는 엘리트 카르텔, 변화무쌍한 상황 속에 튀어 오르는 각 사안들을 탁월한 비유를 들어 쉽게 무엇보다 '재미있게' 비평하는, 즐겨보던 채널에서 '유튜버 최강욱'으로 소개되던 최강욱 전 의원이 동생인 최강혁과 함께 쓴 《이로운 보수 의로운 진보》는 그래서 더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특유의 해학적이고도 구수한 말빨(?)이 책 전반에 녹아들어서 '정치'라는 카테고리가 주는 뻣뻣한 인식은 괜한 기우 정도가 되었다.




대선 투표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선거 대열전'이라고 표현해도 과연이 아닐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진영 대립이 치열하다고 느낀다. 특히 작금의 사태에서 비롯된 일련의 사회적인 갈등들 속에서 혐오와 분노를 느끼면서도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도대체 왜?'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 이념이 이토록 극단적으로 발현되는지, 이렇게 되기까지 어떤 서사를 가지고 이어져 왔는지, 답답할 뿐이었다. 책에서는 먼저 그에 앞서 보수와 진보의 역사와 개념부터 짚어가기 시작한다. 고대부터 중세, 근대, 현대를 아우르며 세계사의 흐름을 개괄적으로 살펴본다. 이러한 세계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프랑스 혁명의 태동과 함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의 정치 이념이 비로소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왕의 시대가 끝나고 '공화정'의 시대가 열립니다. 나라의 주권이 왕이나 절대군주가 아니라 국민에게 있는 나라, 국민이 투표로 뽑은 대표자들이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는 것, 대의민주주의를 통해 국민의 의사가 정치에 반영되도록 하는 체제가 공화정이고 공화국입니다. p.69


1부에서 다루는 진보와 보수의 탄생 배경을 세계사의 흐름에 따라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이념의 진정한 본질을 살펴보는 거시적인 흐름이 좋았다. 프랑스 혁명에서 주권이 왕에서 국민으로 넘어오는 과정은 오랜 시간 여러 번의 체제 번복 시도를 오가며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데 그야말로 유혈이 낭자했다. 말 그대로 '피로 쓰여진 민주주의'라는 말이 결코 비유의 표현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랜 역사와 서사를 가진 프랑스 시민 혁명의 과정을 톺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을 떠올리게 된다. 특히 이번 대통령 탄핵 과정을 거치면서 일어났던 반헌법 세력의 무도한 언동들, 극우 세력의 서부 지법 폭동 사건 등을 목도하면서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은 미완의 체제인 것을, 책을 계속해서 읽으면서는 더욱이 그러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진보와 보수의 개념을 다양한 사회적 상황을 두고 '진봉 씨'와 '봉수 씨'의 입을 빌려 각자의 입장을 다룬다. 보수의 가치와 진보의 가치가 어떻게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고, 어떠한 방향과 속도로 해결 방안을 타개하는지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해 구체적으로, 또 독자에게 친화적으로 설명하며 이해를 돕는다. 진영에 관한 여러 사회학자의 주장과 이론을 가미하며, 특히 <다크 나이트>, <죽은 시인의 사회>, <설국열차>, <기생충> 등의 유명한 영화를 예시로 들어 각 영화 속에 구현된 상황과 그 상황 속의 인물이 취하는 태도를 보수와 진보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해석하는 점은 매우 흥미로웠다.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은 정치적인 카테고리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빈부 격차, 평등과 복지, 능력주의와 학벌, LGBTQ, 낙태와 사형까지. 사회의 광범위한 분야에서 진보와 보수가 추구하는 가치가 어떤 주장을 하고 각자의 논리를 어떻게 전개하는지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 여러 예시를 나의 가치 판단과 비교하고 가늠하며 읽을 수 있는데 모든 가치가 진보와 보수라는 잣대로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도 주지 해봐야 할 지점이다. 나 또한 어떤 사항에서는 아주 명확하게 진보 성향이지만 어떤 사항에서는 보수의 방향성이 더 안정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치 성향이 진보인가?, 보수인가?'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나름의 명확한 대답을 하지만 과연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자 하면 입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일 것이다. 나 역시도 굉장히 편협하게 나의 정치적 성향을 이해하고 있었고, 또 나와 반대되는 성향에 대해서도 굉장히 왜곡되고, 특히나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점을 반성하게 되는 계기였다. 누군가의 정치적인 입장에 동조하거나 반대하면서 명확하게 나의 의견을 개진할 수 없었던 무지에서 오는 답답함이 상쾌하게 해소되는 기분이었달까? 더불어 상대 진영을 지지하는 자들의 주장을 무조건적인 비판으로, 감정적으로 폄하하고 있던 점도 반성적으로 시선을 개선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 지금 '보수'라고 참칭하는 세력은 일부 개신교 세력의 왜곡된 사상과 결탁해서 '극우화'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들이 왜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거리로 나오는지에 대한 서사를 설명해 주며 이해를 돕는다.





이러한 맥락의 연장으로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보수'가 요원한 상태에 대해 우려하면서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라도 보수와 진보가 건강하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 필요성을 피력한다. 특히 4부에서 진정한 보수의 예시로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진정한 진보의 예시로 미국의 버락 오바마를 예시로 든다. 두 인물 모두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훌륭하게 적용한 인물들이었고 무엇보다 그들의 정치적 행보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까닭은 상대 진영을 배타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두고 대화하고 이해하는 합치의 정치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현시점 우리 정치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이로운 보수 의로운 진보》는 정치 교양 입문으로 가장 완벽한 정치 교양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단 구어체처럼 흘러가는 서술 방식이 마치 말을 직접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저자 특유의 해학적이고, 위트 있는 표현들이 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진봉 씨와 봉수 씨라는 인물을 설정하여 각각의 입장이 체화된 상태로 서술되는 점도 일상적인 대화 같은 느낌으로 친숙하다. 정치의 큰 두 축을 이루는 '진보'와 '보수'라는 두 개념을 구체적 상황에 적용하여 정말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서도 세계사적인 흐름에서 탄생한 프랑스 혁명을 시작으로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배경과 결부되어 가지는 우리만의 독특한 보수와 진보의 특성까지 이르며, 앞으로의 방향성까지 제시한다. 그럼에도 결코 위트를 잃지 않는 모멘트들을 갈무리하며….


📌오늘날 우리가 대기업에 들어가려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신성한 성직에 취임했고, 그래서 별로 성스럽지 않았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때의 일입니다. 감히 종교를 개혁하려 하다니 마르틴 루터는 참 용감한 사람이구나 싶지만, 분위기상 다 할 만하니까 한 것입니다. p.40


📌프랑스는 지금도 집회나 시위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활발합니다. 뉴스에서 "이야~ 시위하는데 막 불 지르고 때려 부수네?" 하고 보면 프랑스입니다. "저긴 또 어느 나란데 저렇게 다 때려 부수냐?" 하고 보면 또 프랑스입니다. p.46


📌아이폰을 만드는 세계적인 IT 기업 애플의 CEO 팀 쿡은 2014년 10월 한 경제 주간지 기고문을 통해 커밍아웃했습니다. 그는 "나는 내가 동성애자란 사실이 자랑스러우며, 신이 준 선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라며 "동성애자로 살면서 소수자에 대해 더 이해할 수 있었고 더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라고 썼습니다. 동성애를 죄라고 믿는 목사님들만큼은 진짜 인간적으로 갤럭시 써야 됩니다. p.234





*본 서평은 한겨레 서평단 하니포터 10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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