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미에르 피플 -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강명 작가의 명성(?)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지만 처음 읽게 될 책이 《뤼미에르 피플》일 줄은 몰랐다. 어떤 잡지에서 《재수사》에 관한 서평을 읽은 것이 '장강명'이라는 작가를 알게 된 최초의 기억이었고 그 뒤로도 '추천'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자주 마주치는 이름의 작가였다. 어쨌든 첫 책은 《재수사》가 될 줄 알았다. 어떤 작가의 유니버스에 진입하긴 위한 첫 책은 탐험 여부를 결정하는 기로가 될 테니까 신중해야 하는 법. 결론은 매우 사사롭고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게으른 독서 행태가 야속해지며 《재수사》뿐이 아니라 다른 작품들도 몹시 읽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신촌 뤼미에르 빌딩 8층 오피스텔, 801호부터 810호로 느슨하게 연결된 세계에서 마주치는 열 편의 이야기. 그들에게 제공된 공간은 지극히 현실적인데 공간을 빌린 존재들의 이야기는 마치 차원을 넘나들며 꿈을 꾸는 것 같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종의 존재들과 현실에서도 일어날 법한 이야기들이 한데 섞여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용하게 만든다. 박쥐 인간, 반인반서(半人半鼠), 무당을 비롯해서 때론 이종보다 더 한 인간들까지. 설정과 전개는 좀처럼 예상할 수 없이 흘러간다. 대체로 씁쓸하지만 그 속에서도 간혹 희망을 읽어내며 기원을 알 수 없는 연민을 남긴다.

​

 "그러진 않을 겁니다. 《뤼미에르 피플》에 나오는 단편의 구조는 어떤 두 세계를 계속 대립시키는 것이거든요. 아이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 부자가 사는 세상과 가난한 자가 사는 세상, 몸이 갇힌 사람과 마음이 갇힌 사람, 언어가 있는 세계와 없는 세계……."

 "그리고 《뤼미에르 피플》에서 그 대립이 의미하는 바는 정작 아무것도 없죠. 다 공허한 말장난일 뿐이에요." p.139 <804호 마법매미>






 801호부터 810호까지, 사건이고 인물이고, 저마다의 개성이 뚜렷한 터라 몇 가지를 콕 집어 인상 깊었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801호의 박쥐 인간과 802호의 워커 홀릭, 803호의 청각 장애인 재홍과 왜소증 여성, 805호의 두 명의 정민, 806호의 삶어녀 사건에 얽힌 인물들과 사건들은 여전히 현재의 시간에서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은둔 청년, 성과 중심의 경쟁 사회, 사회적 약자 차별, 빈부 격차, 사이버 불링…. 책이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현재의 간극이나 시대적인 위화감은 전혀 느낄 수가 없다. 도시를 떠도는 흉흉한 도시 괴담처럼 읽히는 이야기들은 쓸데없이 뼈와 살을 더해 이 세대에서 저 세대로 전승되고 있는 것만 같다.

​





 햇살 아래에서 생기를 뿜어내는 인간의 생(生)의 의지에 숨 막혀 하는 박쥐 인간. 타인의 비애를 양분 삼아 생을 연명해 나가는 박쥐 인간. 박쥐 인간에서 비로소 인간이 되어 '미래'라는 가늠자가 생기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던 박쥐 인간. 뤼미에르 빌딩의 801호부터 810호까지, 모든 호실을 부지런히 노크하며 들여다보고 난 후에도 어쩐지 다시 박쥐 인간이 생각난다. 다분히 우울증의 증세를 떠올리게 만드는 박쥐 인간의 습성들, 스스로를 세계와 고립시키는 박쥐 인간으로 대변되는 존재는 결코 낯설지 않다. 히키코모리라 불리는 고립·은둔 청년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삶의 어느 시절에 저항 없이 좌초되어 어두운 밤 속으로 침잠하는 인생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

 "슬픔을 없애는 건 기쁨이 아냐. 슬픔은 분해되어서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마음의 양식으로 돌아가는 거야. 잘 썩지 않는 동물의 똥을 쇠똥구리가 분해해 양분으로 만드는 것처럼 박쥐 인간들은 인간의 슬픔을 분해하지. 박쥐 인간이 없으면 이 별은 사라지지 않는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될 거야." p.41 <801호 박쥐 인간>

​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금두꺼비는 슬픔을 양분이라 말하며 슬픔의 쓸모로 박쥐 인간을 위로한다. 현실과 환상이 혼재하는 혼란스럽고 기묘한 세계 속에서 황금두꺼비 같은 존재는 여지없이 반짝거린다. 이웃의 그녀에게 책임감을 느끼는 재홍처럼, 밤섬과 조응하는 당주처럼. 읽는 도중에는 그 기괴함 때문에 이해가 잘 가지 않았던, 작가가 사랑하는 한 줌의 캐릭터가 《뤼미에르 피플》에 있다는 말이 다 읽고 나니 그제야 납득이 간다. 프랑스어로 '빛'을 뜻하는 '뤼미에르(Lumière)'라는 뜻도 비슷한 맥락에서 어렴풋이 짐작해 보게 되는 것이다.

​

 나는 재홍에게 왜 그렇게 그녀의 삶에 간여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책임감 때문이야.

 "책임감?"

 ━그녀가 내 근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책임감을 느껴. p. 104 <803호 명견 패스>




 《뤼미에르 피플》은 작가가 실제로 존재하는 르메이에르 3차 빌딩 오피스텔에서 자취를 하며 겪은 신촌 일대를 배경으로 창작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기자 출신이었던 작가의 이력 덕분인지, 현실 사회 문제를 소설이라는 허구 세계로 가져와 다양하게 변주시켜 요령 있게 '뤼미에르 8층 오피스텔'이라는 세계관을 탄생시킨다. 각 호실을 열어젖힐 때마다 아득한 차원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면서도 영 낯설지 않은 기시감을 동시에 느끼는 까닭이 그러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그곳, 세계관에 동화되고 만다. 빌딩 구석에서 구정물을 마시고 있는 고양이 리타를 본 것 같기도 하고, 빌딩 창문을 타고 하릴없이 추락하는 박쥐 인간을 본 것 같기도 하고, 뒷골목 곳곳 그림자마다 지하 왕국에서 올라온 쥐들을 본 것 같기도 한 이 기분.







 "왜요? 종교인들이 너무 가식적이어서요?"

 "아니요. 그것보다는…… 저는 세상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절대 선(善)이나 구원자 같은 게 있을까 의구심이 듭니다. 그보다는 체계는 없더라도 사람 사이의 인정이나 연민 같은 게 오히려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죄송합니다, 제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p.359 <810호 되살아나는 섬>

​

 그리고 있는 세계와 인물이 추하거나 선하거나, 좌우지간 그것을 그리고자 한다면 필히 깊게 관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들인 눈길에서 자연스럽게 정情이 생기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보다. 그저 훑어 읽기만 했던 나조차도 등장인물들의 면면에 연민과 인정이 들기도 했으니…. 훈훈한 훈풍 같았던 810호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새홀리기 당주와 차기 당주가 나누던 대화를 인용하며 '뤼미에르 피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멋대로 힌트를 얻고 간다.


​





*하니포터 11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쓰는 몸으로 살기 - 나를 다듬고 타자와 공명하는 어른의 글쓰기
김진해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쓰기에 관한 책을 읽고 나서 쓰는 감상은 평소보다 괜히 더 머쓱한 기분이 되어 쓰는 것이 망설여진다. 그동안에 썼던 글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느끼는 혼자만의 수치심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쓰기'에 관한 책은 일부러 읽지 않는 고약한 회피 성향이 있다. 매번 글을 쓸 때마다 부침을 느끼면서도 그렇다. 《쓰는 몸으로 살기》를 읽으면서도 종종 지난 나의 글이 떠올라 미간을 찌푸려야 했고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지금 이 첫 문단을 겨우 쓰고 있다. 그러나 두서에 잡스러운 한담을 지양하라는 조언을 어기고 있다는 점을 깨달으며 뒤늦은 각설….

​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기 위해 막막함 속을 헤엄치면서 끝내 문장 하나를 써냅니다. 그렇게 자기 삶을 새롭게 해석한 문장을 바느질하듯이 한 땀씩 이어갑니다. 무적의 글쓰기는 자신을 '쓰는 몸'으로 탈바꿈하여 삶을 이어가 보려는 사람의 글쓰기입니다. p.6

​

 이 책의 부제는 '나를 다듬고 타자와 공명하는 어른의 글쓰기'로 단순히 글을 쓴다는 것을 넘어서 그 글을 매개로 타자와 나의 세계를 공명하는 '쓰기'를 목적으로 한다. 프롤로그에서 밝히듯이 '무적無敵', 즉 '적이 없는' 글쓰기와 '무적無籍', '고정된 것이 없는' 글쓰기를 지향한다. 끝내 함께 하기로 권하는 글, 글을 쓴 후에도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생동하는 글을 권하며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쓰는 몸'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쓰는 몸이란 과연 무엇인지, 어떻게 그런 몸을 추구해야 하는지, 그런 맥락에서 다양한 시각과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

 글을 쓸 때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동시에 '나는 무엇을 선택하지 않았는가'를 검토해 보세요. 무작정 쓰는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은 언제나 선택이다. 감춰진 게 더 없을까?' 하고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가시적인 말을 불신할 때 새로운 말이 튀어 오릅니다. p.25

​

 '타자와 공명하기 위한 쓰는 몸'이란 표현이 다소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저자는 《쓰는 몸으로 살기》를 통해, 그 여정을 친절하게 안내한다. 실제 글을 쓸 때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방법들을 여러 예시 등을 통해 소개하며 말과 글, 언어의 특성을 이해하면서 글을 쓸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 글감과 주제를 다루는 방법 등 실제 글쓰기에 적용해 볼 수 있는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내용들을 제시한다. 특히 문장을 구성하거나 단어를 선택하고, 은유나 비유를 수사법에 국한하지 않고 넓게 해석하는 방법론에 관한 내용들은 보다 구체적이었고, 실제적인 글쓰기에 적용할 수 있는 유용한 부분들이다.


​



 특히 3부를 거쳐 4부에 다다르며 점차 심화되는 '글쓰기'에 관한 주제는 '글을 쓰는 행위'와 그 행위를 둘러싼 총체적인 경험으로 확대된다. 저자는 일상으로 둘러싼 세계를 기민하게 감각해야 한다고 한다. 매일 비슷하게 흘러가는 듯 보이는 일상을 의도적으로 분절시켜 그 사이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보다 더 작은 단위로 잘게 쪼개보며 집요함을 발휘하여 들여다 보기를 요구한다. 결국 '쓰는 몸'이라는 것은 '쓰기'와 '삶'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동기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쓰기와 삶은 삼투 현상처럼 서로의 영역을 무람없이 침범하며 끝내는 서로의 영역에 얼룩처럼 자국을 남기며 스며들고야 마는 것이다. 교집합의 얼룩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며 활자를 하나씩 건져내는 것, 쓴다는 것은 그런 것이 될 수도….





 사실 나에게 글을 잘 쓰는 방법 같은 것은 크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런 방법을 읽고도 잘 체득하지 못하는 저조한 흡수력을 탓해야겠다. 아무렴 중요한 것은 본질.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 쓰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쓰는 행위 기저에는 어떤 기준을 가진 명분을 세워하는가…. 쓰는 몸이 어떻게 타자와 세계를 공명할 수 있는지, 그 모든 총체적인 경험과 감각들이 감응하고 서로 조응하며 '쓰기'라는 행위를 거쳐 하나의 글로 직조될 수 있는지. 내게는 다소 무용한 방법론 보다 《쓰는 몸으로 살기》가 가르쳐 준 이런 통찰들이 쓰기라는 영역의 저변을 넓혀주었다. 이 역시도 체득해야 하는 것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글을 쓴다는 것의 총체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준 계기였다.

​

 저는 인간적인 사람이 글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비인간적인 사람들은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적인 사람은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글 쓰는 사람도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관조하는(바라보기만 하는) 삶이 아니, 행동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사건을 만드세요. 인과관계나 논리가 아닌, 예상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을 행하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능력이니까요. 아무 목적 없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세요. 그런 사람이 글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자기 몸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다가온 계기를 다른 사람과 함께 받아들이는 사람이. p.245

​

 쓰기에 관한 책을 읽었으니 쓰는 것이 조금 수월해지지 않을까 하는 건방진 요행은 버리기로 한다. 끊임없이 관찰하고 반복하며 관용하고 조화하기를 노력해 보는 것으로. 쓰는 것에 관한 글을 읽고 쓰는 것에 관해 쓰고 있지만 어느 순간 사는 것에 관한 글을 읽고 사는 것에 관해 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더 깊고 묵직하게 응시해 보는 버릇을 들여야겠다. 그것이 삶이든, 글감이든. 언젠가 먼 미래에 누군가와 공명하기를 바라며….









*하니포터 11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두 번째 미술사 - ‘정설’을 깨뜨리고 다시 읽는 그림 이야기
박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미술사?'라는 단어를 보고 최근 개인적인 유튜브 알고리즘에서 미술 작품을 소재로 작품에 숨겨진 서사를 해설해 주는 쇼츠를 재미나게 본 기억이 났다. 작품에 그려진 인물의 미묘한 손짓, 그들의 눈길이 머무는 곳, 무심하게 서있는 것 같지만 의도된 배치 등에서 채 읽히지 못하고 숨겨져 있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다. 《두 번째 미술사》도 읽는 내내 화가와 작품을 비롯해 관련한 것들에 대한, 미처 읽히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흥미롭게 들려준다. 마치 난해한 그림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서있는 내게 슬쩍 다가와 '있잖아, 그거 알아? <마들렌의 초상>이라는 제목이 200년 후에나 제 이름을 찾게 됐다는 사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야…'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누가 역사에 남고 누가 사라지는가는 단순히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와 사회가 어떤 이야기를 선택해 기억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 선택과 망각, 복원의 과정을 따라가며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의 이야기'들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p.6 프롤로그


 절절한 서사의 고흐, 사과 정물화로 기억하는 폴 세잔, 세기의 라이벌 피카소와 마티스, 타히티의 고갱…. 어설프지만 익히 알고 있었던 정설들에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과연 그럴까? 평생 그림을 한 점도 못 팔았다던 고흐. 그러나 사실 그의 작품은 생전에 여러 점이 팔렸었고,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생의 말미에서는 그 작품성을 다소 인정받기도 했다고 한다. 피카소와 마티스는 서로를 존중하던 발전적인 라이벌 관계였으며 고갱이 묘사하던 타히티의 낭만성은 현실과는 괴리감이 있었던 뒤틀린 이상이었다. 역사가 그러하듯 그들의 신화적인 서사는 당대의 사회문화적인 요소들과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취사선택을 거쳐, 하나의 정설이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 미술사》는 7장에 걸쳐 다양한 주제로 묶여있지만 이를 관통하는 미술사의 특성들은 미술사의 세계가 얼마나 역동적이고 유연하게 생동하는지 잘 보여준다. 해석과 맥락은 시대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요소들에 따라 상대적으로 평가되어왔고, 이런 생동적인 흐름 속에서 화가에 대한 평가와 그림에 대한 해설은 풍부하고 다양한 층위를 갖추며 입체적으로 변모한다. 무엇보다 작품에 해석과 평가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굉장히 가변적이고 선택적인 서사라는 점에서 미술사의 다층적인인 감상을 가능하게 만든다. 조르주 드 라 투르나 보티첼리, 밀레의 예시처럼 작품에 대한 평가나 의의가 작품 자체의 예술적인 완성도가 아닌 시대적인 요구나 당대의 철학, 사회문화적인 요소들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은 새삼 놀랍게 느껴진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사실은 <마들렌의 초상>이라는 제목에 얽힌 서사였다. 원래 제목은 '흑인 여인negress의 초상'으로 프랑스의 여성 화가 마리 기유민 브누아의 1800년 작으로 흑인 여성을 단독 모델로 한 그림이라 당시에는 꽤나 파격적인 그림이었다고 한다. 당시 꽤나 호평을 받았음에도 오랫동안 루브르 박물관 소장되었다가 20세기 후반에서야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고, 연구를 통해 모델의 이름이 '마들렌'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렇게 이 작품은 흑인 여성을 지칭하는 negress라는 인종차별적 멸칭에서 black woman을 거쳐 비로소 Madeleine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이름'이 상징하는 존재의 정체성이 '마들렌'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면서 작품은 그제야 진정한 의의로 생동하기 시작한다. 간과하기 쉬운 제목에서 들인 수고로운 노력에서 의외의 감동을 느꼈다. 이름을 부르고서야 꽃이 되었다던 어느 시처럼….



 (…) 이는 과거 제목이 부여했던 익명성, 나아가 객체화된 시선을 거두어내는 효과가 있다. 예전 제목을 통해 '한 흑인 여성의 이미지'로 소비되었다면, 이제는 '마들렌'이라는 삶을 가진 인물의 개성 표현이 제대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또한 제목에서 인종 지칭어를 제거함으로써 관람자는 그녀의 피부색보다 표정과 자태에서 오는 인간적 품위를 먼저 보게 된다. p.221

​

 이러한 맥락에서 다른 이로 오명 된 작품과 명예가 진정한 주인을 찾아가는 과정도 새롭게 보인다. 단순히 오명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가진 전체적인 맥락과 의미도 새롭게 재창조 되는 것이다. 아버지나 남편의 그늘이라는 편견으로 오명 된 여성 화가들의 작품이나 유명세를 기준으로 소거된 무명 화가들의 작품들은 여러 사료들과 연구들을 통해 비로소 제 이름을 찾고, 마침내 잃어버렸던 새로운 의의를 부여받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제가 유기적으로 얽히면서도 시대를 초월하여 새로이 호명 되기도 하는 것이다.





 화가나 그림이 아닌 전시 공간인 '미술관'을 다루는 마지막 장도 흥미로웠다. 특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고 떠올리는 하얀 전시 공간인 '화이트 큐브'는 비교적 현대에 이르러서야 개념화되었다고 한다. 하얀색 배경이 당연히 작품을 더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최선의 배경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를 두고 다루는 비판적인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새하얗고, 조용한 조명 아래 잘 정돈된 '화이트 큐브'가 자아내는 권위적인 분위기는 예술을 고차원으로 격상시켜 되려 감상자를 유리시킨다. 하얀 진공 같은 그 공간에 들어서면 무의식적으로 숨죽이게 되는, 원인 모를 긴장감이 떠올랐다. 이런 것이 일종의 프레임이었다니.

​

 이런 맥락에서 화이트 큐브는 단순히 미술을 보여주는 장소가 아니라 미술의 의미를 규정하는 프레임이기도 하다. '중립성'이라는 명목 아래 화이트 큐브는 특정한 형식의 미술만을 이상적으로 만든다. (…) 어떤 공간이 무엇을 이상적인 예술로 간주하느냐는 기준은 결국 그 공간의 미학과 정치가 결정한다. p.255




​

 후딱 읽혔다. '오, 오?, 오!'를 내적으로 연발하며. 정설을 절대적인 진리쯤으로 생각했던 편협한 고정관념이 기분 좋게 부서졌다. 수많은 세월을 거쳐,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해석한 의의와 평가들에 앞으로 더할 것이 있을까 하는 안이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미술사》에서 다루는 개별적인 사실들과 미술사의 전체적인 맥락들이 얼마나 가변적이고 유동적인지, 그러한 흐름 속에서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해석의 여지가 얼마나 다양하게 변모할 수 있는지 새로운 감상이었다. 흥미로운 사실들을 파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질문들과 그림들, 화가들, 삽화들이 지루한 것 없이 후룩후룩 읽게 만든다. 각자의 '첫 번째 미술사'가 무엇이었든, 《두 번째 미술사》는 분명 더 흥미로울 것이다.



 4장에서 페르메이르의 북향 작업실을 다루면서 '북유럽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 얽힌 개인적인 경험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화가 페르메이르와 관련된 사료가 별로 없기 때문에 이 소녀의 정체와 복장과 진주 귀걸이의 정체는 밝혀진 것이 없이 미스터리하다고. 이런 미스터리가 신비롭게 느껴진 까닭인지 그림에 매료되어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를 탐독하기도 했고, 그 후에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며 스칼렛 요한슨이 정말 그 소녀와 닮았다며 감탄하기도 했다. 페르메이르의 작업실이 북향이어서 남향으로 비춰드는 빛 보다 오히려 균질한 빛을 이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이 그림에 관한 나의 개인적인 서사에 한 겹 쌓아본다. 조만간 다시 봐 볼까나….



​


​

*하니포터 11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파사주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파사주(破四柱). 제목부터 단박에 호기심이 인다. 일단 검색부터 하고 보면 'passage, 통로'라는 영어 단어의 결과가 주로 나온다. 그러나 제목에 붙은 한자를 해석하면 '깨뜨릴 파破, 넉 사四, 기둥 주柱'로 '사주를 깨뜨린다'는 의미가 된다. 운명을 파괴하다니? 다소 불온하게 느껴진다. 거스를 수 없는 무엇을 거스르며 파생되는 예측불허에서 오는 불안한 뉘앙스가 어쩐지 뭉근하게 풍기는 느낌. 제목이 주는 분위기에서 비롯한 개인적인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서사 사이에서 오는 감상의 격차를 흥미로워하며 읽어나갔다.





 '가인의 땅'이라 불리는 곳으로 목적 없이 걷기 시작하는 해수와 유림을 따라서 이야기는 다소 다짜고짜 시작한다. 그들이 걷는 길의 목적지가 뚜렷하지 않은 까닭에 읽는 나 또한 갈피를 어디에 두고 쫓아가야 할지 몰라 버둥거렸다. 자박자박 느리게 따라 걸어가며 해수와 유림의 과거 서사를 목도하며 걷고 있는 읽는 이의 행간은 끝내 서늘하고 숙연해진다. 해수와 유림은 '하나의말씀'이라는 사이비 종교 집단의 '하나원'이라는 보육원 출신으로 이제 막 그곳을 탈출하여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정신과 신체 모두를 끔찍하게 유린당한, 그 부조리한 집단에서 탈출한 그들의 자유는 과연 어디로, 또 어떻게 흘러갈까. 길의 시작에서 물었던 이 물음은 길의 끝에서도 다시 묻게 되었다.

​

 해수와 유림의 하나원 생활은 필연적으로 현실에서 일어났던 사회적인 사건들, 이를테면 '부산 형제 복지원 사건', '장항 수심원 사건', 소설 《도가니》로 알려진 '광주 인화학교 사건' 등을 떠올리게 만든다. 특히 최근에 시청한 넷플릭스의 〈나는 생존자다〉에서 '부산 형제 복지원'과 'JMS' 사건을 다룬 회차들 속 생존자들의 한은 아직도 해소되지 못한 채, 현실에서 현현한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기에 '생존자'들은 해수와 유림과 교차한다. 고통스럽게 살아있는 생생한 증언. 그렇게 해수와 유림은 더 이상 그저 활자로만 읽히지 않는다. 〈나는 생존자다〉가 생존의 증언으로 고통을 서술한다면, 《파사주》는 문학의 언어로 치유를 은유하는 것이다.





 (…) 해수의 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와도 아무도 보지 못한다.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피도, 팔다리가 잘려 나간 마네킹 같은 몸도, 아무도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니 그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으니 그들은 그 자리에 앉아 같은 일을 되풀이한다. 혀 밑에 죄책감을 숨기고, 그 말이 병처럼 번질까 두려운 듯 어떤 문장을 발음하지 않으려 애쓴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p.250-251

​

 아리송하게 느껴졌던 여정은 '물, 길, 들, 뫼, 숲, 늪'이라는 자연의 순서를 따라 흘러가며 그와 동시에 과거를 함께 훑어간다. 하나원이 전부였던 부조리한 세계에서 해수는 집단의 조직적인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진다. 마치 골리앗 앞에 다윗처럼. 자신의 믿음과 세계를 부정하는 해수 곁에서 견고했던 유림의 세계는 갈등한다. 그리고 그 갈등의 틈새에서 유림이 애써 외면했던 진실과 도리 없이 스러져간 생명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새어 나오며 유림을 추동하기 시작한다. 해수와 유림이 지나온 과거의 조각들이 선명해질수록, 나는 부디 이들의 여정이 터널 끝에서 반짝이는 빛처럼 희망으로 향하는 것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

 ―너-넌 믿음 없이 구-구-구원받을 수 있어?

 ―이건 믿음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얘기야. 그리고 구원이란 건 누가 해주는 게 아니거든. 우리 스스로 해야 하는 거지. p.95





 그러나 내가 바라던 희망은 요원해진다. '차례'에서 느껴지던 불온한 위화감. 황천(黃泉), 명도(冥途), 묘지(墓地), 망산(邙山), 신림(神林), 윤해(輪海). 모든 단어가 '죽음'과 상통하는 순서는 해수와 유림이 걷고 있는 그 여로였다는 것이다. 망망대해에 고요하게 떠있는 유림의 모습은 쿠바 맨션에서 만난 묘한 중년 여자의 사주풀이를 다시 떠오르게 만든다. 불이 붙은 나무 사주에는 물을 잘 써야 한다고, 운명을 깨고 나아가야 한다고. 나는 그제야 허망하게 되묻는다. '해수'의 해수가 그 해수(海水)였냐고. 운명을 깬다는 것이 결국 그런 것이었냐고…. 그렇다면 윤회(輪廻)의 '윤'과 같은 한자를 쓰는 윤해(輪海)의 의미야말로 희망으로 읽혀야 한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켜본다.

​

 ―중요한 건 어떤 그릇을 가졌느냐가 아니야. 그 그릇이 완전히 깨졌느냐지. 인간은 제 그릇에 금이 가면 뭔 수를 부려서든 그걸 붙이고 살려 하거든. 다신 붙이지 못하게 완전히 박살을 내야, 그래야 새로 지을 수도 있는 건데 말이야! p.199





 유림에게 해수는 파사주, 그 자체였다. 해수라는 파사주passage를 통해서 유림은 자신의 운명을 파사주破四柱했다. 유림에게 해수는 단단하고도 견고한 추악의 세계를 깨부수게 만든 동기이자 삶의 목적이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그 길이, 그런 해수를 온전히 애도하기 위한 여정이었다는 것을 결말에 이르러서야 깨달았을 때 속절없이 먹먹해지는 기분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감내해야만 했던 그간의 고통과 스러져간 이들에 대한 죄책감이 '신림(神林)'에서 연대로 발휘되는 신당에서의 환상적인 장면을 꺼내들어 안개처럼 뿌예진 감상을 조금 환기시켜본다.

​

 ―그럼 우린 어떻게 해?

 ―그냥 우리 삶을 살면 돼.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어? 죗값은 죄지은 놈들이 치르면 되지. p.278

​

 모든 장면과 소설적 장치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은유 같다. 책의 말미에 우연히 만난 박혜진 평론가의 발문이 반갑다. 발문에서 '인생은 미로고, 미로를 통로로 만드는 건 우리 자신의 선택과 의지(p.287)'라는 《파사주》의 진실을 귀띔해 준다. 은유의 세계에서 진실과 고통과 치유가 현실과 환상이 혼재된 세상을 오가며 결국엔 가장 인간적인 본질에 다다른다. 이것은 《파사주》를 읽는 이의 또 다른 여정이었다.




*하니포터 11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검찰의 세계 세계의 검찰 - 23개 질문으로 읽는 검찰 상식과 개혁의 길
박용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2·3 내란 사태 이후로 매일 챙겨 보는 시사·정치 유튜브가 두세 개쯤 생겼다. 자연스럽게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관련한 정치 이슈들이 매일 새롭게 떠오른다. 근래에 가장 뜨거웠던 정치 이슈는 단연 검찰 개혁. 이와 더불어 최근에는 사법 개혁까지.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라는 전체적인 개혁의 방향성에는 이견이 없지만 기소청과 중수청의 소속 기관과 권한, 검찰의 보완수사권 존속 여부, 상대적으로 비대해지는 경찰 수사권의 견제 등 세부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여전히 다루어야 할 논점이 많다. 대통령을 비롯해 법무부 장관, 법안을 주도하는 여당 정치인들과 관련 법조인들까지 논쟁 속으로 휘말리면서 한동안 논란 아닌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일련의 과정들을 목도하며 실패한 과거를 답습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울렁거렸다.

​

  '진범을 상대로 유죄 판결을 받는 건 어느 검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무고한 사람을 상대로 유죄 판결을 받는 건 정말 재능 있는 검사라야 할 수 있는 일이다.' p.24





그런 와중에 시의적절하게 《검찰의 세계 세계의 검찰》을 읽고 울렁거리는 불안한 멀미를 잠시 멈출 수 있게 되었다. 윤석열로 대변되는 이른바 '검찰 공화국'이 그동안 자행해 온 불법적이고도 불온한 행태들은 결국 불법 비상계엄, 12·3 내란 사태에 이르렀고 이는 검찰 스스로 자멸의 길로 들어선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자는 검찰 개혁을 두 가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형사 사법 체계를 바라보는 우물 안 시야를 벗어나자는 것(p.7)과 둘째, 검찰 제도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게 아니라 인간의 발명품이며 계속 변화하는 현재진행형 제도라는 사실(p.8)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현재 우리의 형사 사법 체계의 실태와 문제점을 윤석열 검찰 공화국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동시에 세계 여러 나라의 형사 사법 체계를 들여다보고 비교하며 검찰 개혁의 대안과 방향의 제도적 상상력을 제안한다.

​

​

역시 가장 큰 골자는 수사와 기소의 분리. 현시대에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우리나라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했다. 견제 받지 않는 집중된 권력이 어떻게 한 나라를 도륙하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여러 나라의 과거 형사 사법 체계에서는 이미 그러한 문제점들이 드러났고 여러 제도적인 장치들을 계속해서 도입하고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한계점들을 보완하며 형사 사법 체계를 발전시켜온 역사가 있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예심 판사'는 법원 소속이나 재판에 관여하지 않으며 오로지 수사만을 관장한다. 수사 활동에 필요한 압수수색이나 증인 심문, 통신 감청 등의 권한을 가지며 하나의 독립적인 사법관이다. 이때의 기소 결정 여부는 검사가 가진다. 영국의 경우에는 경찰이 수사와 기소 권한 모두를 가지고 있었는데, 무고한 소년들이 옥살이를 하게 된 '맥스웰 콘페이트'사건을 계기로 1986년에야 기소권이 독립되어 기소청이 설립되었다.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는 것만으로 끝일까? 아니다. 기소권은 여전히 막대한 권력이었고 기소권을 가진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제도들도 각국마다 다양했다. 미국의 대배심 제도는 무작위로 선정된 일반 시민들이 검사가 제시하는 근거를 바탕으로 기소 여부를 결정하게 되어있고, 일본의 검찰심사회는 역시 무작위로 선정된 시민들이 검찰이 내린 불기소 처분의 타당성을 심사한다. 특히 이 제도는 기소의 영역이 아닌 불기소의 영역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검찰이 고의로 누락할 수 있는 사건의 사각지대까지 보완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외에도 독일에서는 법왜곡죄를 통해서 특정인에게 부당한 이익 혹은 불이익을 고의적으로 행한 법관을 처벌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고 있다.

​




 사법 독재는 법치라는 미명 아래 고개를 듭니다. 하지만 법치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 민주주의를 초월하는 이념이 아닙니다. 헌법이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 국회의원의 불체포 특권 등 법치의 예외를 둔 것은 판검사가 법을 악용해 선출직 공직자를 탄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p.263

​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의미가 두드러졌던 부분은 바로 법치에 작용하는 민주주의. 국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으로 검찰을 비롯한 사법의 권력을 견제하는 예시는 시민들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미국의 대배심이나 일본의 검찰심사회 외에도 미국에서 전개된 진보적 검사 운동이나 검사 선거 제도에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이나 국회의원의 불체포 특권은 신성하게 부여된 절대 권력이 아니라 국민이 검찰과 사법을 견제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인 것이다. 국민이 국민의 대표인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를 제거하고자 대선 결과에 개입하려 시도했던 조희대의 사법 쿠데타는 법치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를 무시한 아주 오만하고도 적절한 예시라고 볼 수 있겠다.

​

 불소추 특권은 대통령이 된 '어느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게 아니라, 그를 대통령으로 뽑고 그의 원활한 대통령직 수행에 이해관계를 갖는 '국민 전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마르 교수는 이 점을 더 선명한 비유로 강조합니다.

 "미국 헌법은 (대통령보다) 국민 대표성이 떨어지는 이들(판검사)이 나라 전체를 인질로 잡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p.190





​나를 비롯해 여러 방송에서 떠들어대는 검찰 개혁이 다소 피상적으로 느껴졌던 사람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봤으면 좋겠다. 《검찰의 세계 세계의 검찰》를 읽으면서 피상적으로 느껴졌던 많은 부분들이 해갈되었기 때문이다. 이건 아닌 것 같은 막연한 물음표에 쉽고 친절한 톤의 느낌표를 달아주는 것이다. 특히 나는 그들의 권력이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러한 까닭에 마치 신성불가침인 것인 양 휘둘러댔던 그 권력을 이제는 대대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을 이룰 수 있었다. 민주주의를 채택한 나라에서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국민주권이라는 것을 천명해야 한다. 법이라는 권력으로 헌법의 근간을 뒤흔들었던 그 모든 비뚤어진 권력을 견제하고 다시 재건해야 하는 것이다.

​

 수사기소 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말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믿어 달라고 해서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권한의 오남용을 견제할 충분한 장치가 갖춰져 있어야 그 제도를 통과해 나온 결과를 신뢰할 근거가 생깁니다. 그런 제도 개혁 노력은 오랜 민주주의 전통을 지닌 영국 같은 나라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첫발도 떼지 못했습니다. p.76

​

제도라는 것은 언제든 수정이 가능하다는 것, 민주주의라는 정당성의 토대 위에서 수정과 보완, 견제와 감시가 항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나라의 개선된 법과 제도들도 완벽하지 않다. 여전히 한계가 존재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효율성이 저하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유연성을 가지고 제도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끊임없이 논의할 수 있어야 하고 수정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민주주의를 초월할 수 없다. 그 권력에 더 이상 신성불가침의 영역은 없다.




 독재자들이 지배하는 체제에 맞서야 한다. 그들에게 선량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체제를 요구함으로써.

_<'진보적 검찰'의 역설 The Paradox of "Progressive Prosecution"> p.211








*하니포터 11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