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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주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평점 :

파사주(破四柱). 제목부터 단박에 호기심이 인다. 일단 검색부터 하고 보면 'passage, 통로'라는 영어 단어의 결과가 주로 나온다. 그러나 제목에 붙은 한자를 해석하면 '깨뜨릴 파破, 넉 사四, 기둥 주柱'로 '사주를 깨뜨린다'는 의미가 된다. 운명을 파괴하다니? 다소 불온하게 느껴진다. 거스를 수 없는 무엇을 거스르며 파생되는 예측불허에서 오는 불안한 뉘앙스가 어쩐지 뭉근하게 풍기는 느낌. 제목이 주는 분위기에서 비롯한 개인적인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서사 사이에서 오는 감상의 격차를 흥미로워하며 읽어나갔다.

'가인의 땅'이라 불리는 곳으로 목적 없이 걷기 시작하는 해수와 유림을 따라서 이야기는 다소 다짜고짜 시작한다. 그들이 걷는 길의 목적지가 뚜렷하지 않은 까닭에 읽는 나 또한 갈피를 어디에 두고 쫓아가야 할지 몰라 버둥거렸다. 자박자박 느리게 따라 걸어가며 해수와 유림의 과거 서사를 목도하며 걷고 있는 읽는 이의 행간은 끝내 서늘하고 숙연해진다. 해수와 유림은 '하나의말씀'이라는 사이비 종교 집단의 '하나원'이라는 보육원 출신으로 이제 막 그곳을 탈출하여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정신과 신체 모두를 끔찍하게 유린당한, 그 부조리한 집단에서 탈출한 그들의 자유는 과연 어디로, 또 어떻게 흘러갈까. 길의 시작에서 물었던 이 물음은 길의 끝에서도 다시 묻게 되었다.
해수와 유림의 하나원 생활은 필연적으로 현실에서 일어났던 사회적인 사건들, 이를테면 '부산 형제 복지원 사건', '장항 수심원 사건', 소설 《도가니》로 알려진 '광주 인화학교 사건' 등을 떠올리게 만든다. 특히 최근에 시청한 넷플릭스의 〈나는 생존자다〉에서 '부산 형제 복지원'과 'JMS' 사건을 다룬 회차들 속 생존자들의 한은 아직도 해소되지 못한 채, 현실에서 현현한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기에 '생존자'들은 해수와 유림과 교차한다. 고통스럽게 살아있는 생생한 증언. 그렇게 해수와 유림은 더 이상 그저 활자로만 읽히지 않는다. 〈나는 생존자다〉가 생존의 증언으로 고통을 서술한다면, 《파사주》는 문학의 언어로 치유를 은유하는 것이다.

(…) 해수의 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와도 아무도 보지 못한다.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피도, 팔다리가 잘려 나간 마네킹 같은 몸도, 아무도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니 그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으니 그들은 그 자리에 앉아 같은 일을 되풀이한다. 혀 밑에 죄책감을 숨기고, 그 말이 병처럼 번질까 두려운 듯 어떤 문장을 발음하지 않으려 애쓴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p.250-251
아리송하게 느껴졌던 여정은 '물, 길, 들, 뫼, 숲, 늪'이라는 자연의 순서를 따라 흘러가며 그와 동시에 과거를 함께 훑어간다. 하나원이 전부였던 부조리한 세계에서 해수는 집단의 조직적인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진다. 마치 골리앗 앞에 다윗처럼. 자신의 믿음과 세계를 부정하는 해수 곁에서 견고했던 유림의 세계는 갈등한다. 그리고 그 갈등의 틈새에서 유림이 애써 외면했던 진실과 도리 없이 스러져간 생명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새어 나오며 유림을 추동하기 시작한다. 해수와 유림이 지나온 과거의 조각들이 선명해질수록, 나는 부디 이들의 여정이 터널 끝에서 반짝이는 빛처럼 희망으로 향하는 것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너-넌 믿음 없이 구-구-구원받을 수 있어?
―이건 믿음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얘기야. 그리고 구원이란 건 누가 해주는 게 아니거든. 우리 스스로 해야 하는 거지. p.95

그러나 내가 바라던 희망은 요원해진다. '차례'에서 느껴지던 불온한 위화감. 황천(黃泉), 명도(冥途), 묘지(墓地), 망산(邙山), 신림(神林), 윤해(輪海). 모든 단어가 '죽음'과 상통하는 순서는 해수와 유림이 걷고 있는 그 여로였다는 것이다. 망망대해에 고요하게 떠있는 유림의 모습은 쿠바 맨션에서 만난 묘한 중년 여자의 사주풀이를 다시 떠오르게 만든다. 불이 붙은 나무 사주에는 물을 잘 써야 한다고, 운명을 깨고 나아가야 한다고. 나는 그제야 허망하게 되묻는다. '해수'의 해수가 그 해수(海水)였냐고. 운명을 깬다는 것이 결국 그런 것이었냐고…. 그렇다면 윤회(輪廻)의 '윤'과 같은 한자를 쓰는 윤해(輪海)의 의미야말로 희망으로 읽혀야 한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켜본다.
―중요한 건 어떤 그릇을 가졌느냐가 아니야. 그 그릇이 완전히 깨졌느냐지. 인간은 제 그릇에 금이 가면 뭔 수를 부려서든 그걸 붙이고 살려 하거든. 다신 붙이지 못하게 완전히 박살을 내야, 그래야 새로 지을 수도 있는 건데 말이야! p.199

유림에게 해수는 파사주, 그 자체였다. 해수라는 파사주passage를 통해서 유림은 자신의 운명을 파사주破四柱했다. 유림에게 해수는 단단하고도 견고한 추악의 세계를 깨부수게 만든 동기이자 삶의 목적이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그 길이, 그런 해수를 온전히 애도하기 위한 여정이었다는 것을 결말에 이르러서야 깨달았을 때 속절없이 먹먹해지는 기분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감내해야만 했던 그간의 고통과 스러져간 이들에 대한 죄책감이 '신림(神林)'에서 연대로 발휘되는 신당에서의 환상적인 장면을 꺼내들어 안개처럼 뿌예진 감상을 조금 환기시켜본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
―그냥 우리 삶을 살면 돼.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어? 죗값은 죄지은 놈들이 치르면 되지. p.278
모든 장면과 소설적 장치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은유 같다. 책의 말미에 우연히 만난 박혜진 평론가의 발문이 반갑다. 발문에서 '인생은 미로고, 미로를 통로로 만드는 건 우리 자신의 선택과 의지(p.287)'라는 《파사주》의 진실을 귀띔해 준다. 은유의 세계에서 진실과 고통과 치유가 현실과 환상이 혼재된 세상을 오가며 결국엔 가장 인간적인 본질에 다다른다. 이것은 《파사주》를 읽는 이의 또 다른 여정이었다.
*하니포터 11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