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시대 - 독립을 넘어 쇄신을 꿈꾼 식민지 조선 사회주의 유토피아
박노자 지음, 원영수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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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붉다. 이름부터 대놓고 붉다. 한겨레출판이라서 가능한 출간이 아니었을까, 라는 잠깐의 우스갯소리. 이 짤막한 농담에서 내가 인식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이미지가 함축되어 있다. 다소 불온한,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는, 정치적 이념으로 공격의 대상이 되는, 빨갱이, 레드 콤플렉스 등 우리 사회가 이 사상을 다루는 방식은 이토록 경멸적이다. 불과 몇 달 전에 서울대는 수요 부족을 이유로 들어 마르크스 경제학 수업을 35년 만에 중단하고, 강사 채용 공고에도 주류경제학 전공자만을 선발하면서 사실상의 폐강을 선언했다. 이에 반발한 서울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0학점 공개강의' 형태의 마르크스 경제학 수업을 부활시켰고 이에 호응한 많은 시민들의 자발적 후원과 서울대 주변의 서점들을 비롯한 전국 서점들의 가맹 연대로 그 규모가 커진 것이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40841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공고해진 현시대에 이르러서까지도 공산주의와 관련한 사상과 이념들이 배격당하는 이런 사회적인 기조 속에서 개인적으로도 결코 완전하게 자유롭지 못하다. 어딘가 뒤틀린 반공 정서에 대한 불편한 인식과 그것을 선명하게 설명할 수 없는 무지에서 비롯한 답답한 마음에 붉은 시대를 읽기 시작한 것이다.






박노자의 붉은 시대는 1919년에서 1930년대 후반 양차 대전의 사이에, 전간기 식민지 조선에서 일어났던 사회주의 운동의 흥망성쇠를 망라하며 당시 전 세계사적으로 큰 흐름이었던 사회주의 운동의 한 줄기가 당시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어떻게 작용하였는지, 사회주의 운동이 식민지 조선사에서 가졌던 한계와 의미, 주요 인물들의 활동과 다양한 분파 간의 충돌 등을 촘촘하게 톺아본다. 특히 세계사적인 맥락에서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을 주체성을 지닌 하나의 세계사적 흐름으로 정의하는 것이고 그 흐름에서 더 나아가 그것이 가진 의미를 정제하여 현시대적 담론으로 끌어오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붉은 시대에서 다루는 시기, 즉 식민지 시대 조선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가당키나 했을까?라는 의문이 먼저 든다. 이런 열악한 시대적인 상황 때문에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의 주체들은 주로 외부로부터 유입이 많았다. 디아스포라 조선인, 재외 조선인 2세, 해외 망명자, 일본과 러시아 코민테른의 유학생 등 주로 식자층을 주축으로 하여 조선 각지에 지하 공산당을 구축하고, 노동 파업을 주도하며 그들의 사상을 전파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이 생각하는 사회주의 운동의 이상은 노동자가 중심이 되었던 독일 공산당의 예시처럼 '프롤레타리아트' 중심의 변혁이었던 만큼, 지식인 혹은 중간 계급이 주도했던 조선 사회주의 운동은 명백하게 그 한계가 존재했다. 물론 식민지 시대라는 시대적 고립과 대중의 문맹률, 저조한 산업화에 따른 적은 수의 공장 노동자와 같은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층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전체적인 구성원은 고도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의 전업 혁명가들부터 노동조합의 일반 조합원과 파업에 참여한 구성원까지를 폭넓게 아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부재라는 한계는 조선 공산주의 운동 내부에서 분파주의라는 문제를 야기했다. 코민테른은 조선 공산주의 운동 내의 분파주의의 원인으로 프티 부르주아지 출신이 주가 되는 지도자층과 신생 노동 계급의 유기적인 결속의 부재를 지적했다. 이러한 원인에서 발생한 분열은 정통파, 민족주의파, 신간회, 정우회 등을 비롯한 여러 계열의 분파들을 만들어냈고 이는 계속해서 충돌하고 때로는 타협하며 자연스럽게 사회적 담론의 장을 형성했다. 그러한 결과로 조선 사회주의 운동은 비판적으로 성장하며 점점 더 성숙해졌다.




세계적 시류 속에서 전운이 감돌고 유럽에서 파시즘이 횡행하고 일본이 중국 동북 지역인 만주를 침략하기 시작하며 1930년 대의 사회주의 운동도 급진적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기조 아래 2부 4장에서는 박치우라는 철학자의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그의 삶을 전면으로 다룬다. 박치우는 경성제대 철학과 출신으로 1930년대의 고조되는 시대적 위기를 감지하고 이를 타파할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채택했다. 장로교 학교의 교사, 조선일보의 기자와 현대일보의 편집자를 거치며 좌파의 지도적 인물로 성장하며 미군정으로부터 수배자 명단에 오르고, 극우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한다. 평생을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살아온 그의 종말이 공산주의 게릴라 부대원이었다는 점은 혼란스러운 시대적 시류에 휩쓸리고만, 안타깝고도 아이러니한 지점이 아닐 수 없다.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6장과 7장은 공산주의 사회의 이상이 현신한 중국 해방구와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다루는데, 공산주의에서 주창하는 강령들이 눈앞에서 현현하고 있는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바라보던 조선인들의 시선이 흥미롭다. 디아스포라 조선인 작가 중에 하나였던 김사량은 중국 여행 일지 노마만리를 통해 중국 해방구에서 그가 목격한 문맹률을 낮추기 위한 사회 개혁 프로그램, 여성의 인권 상승, 타협적인 토지 분배 등이 실현된 사회를 기록한다. 또한 여러 조선 지식인들이 '붉은 수도' 모스크바를 여행하며 기록한 모습들, 이를테면 잘 닦인 길바닥, 고급 진 의복, 상류 문화의 대중화 등 전반적으로 상향 평준화된 일상적 모습을 보며 조선 개혁을 꿈꾸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시선의 한계로 인물들의 정치적인 배경과 각 사회의 내재적인 문제점이 소거된, 가시적이고 다소 편파적인 시점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 자신의 신성한 세계 축(소련)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지만, 조선 사회주의는 결국 20세기 한국에서 대중에 기반한 자기반성적이고 비판적인 문화가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그것이 바로 조선의 '사회주의 세계'를 언급하는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닌 이유다(<후기>를 보라). 1920~30년대 조선의 좌파는 유토피아적 세계에 살았지만, 중앙 유럽의 동시대인 칼 만하임이 대공황이 조선 사회주의의 고양을 촉발했던 그 해에 암시했던 것처럼, 질적으로 다른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사회에 유토피아가 불가피하게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1945년 이후 북조선과 남한의 궤적은 식민지 조선의 불꽃 같았던 '붉은 20년'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p.329 결론 조선의 붉은 시대





“전간기는 현재와 닮은 점이 많아요. 자본주의의 위기적 상황이 감지된다는 게 그렇죠. 대중들의 상대적 빈곤화와 권위주의 정치의 귀환, 그리고 글로벌 패권의 위기와 기존 패권에 도전하는 열강들의 각축 등 현재 상황을 보면서 가끔 ‘1930년대가 돌아오고 있나?’ 자문할 정도이죠. 그 때문에 ‘대안’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요. 한국에서는 아직도 ‘성장’이나 ‘시장’에 대한 환상이 많지만, 한국보다 신자유주의를 15년 먼저 도입한 미국, 영국에서는 지금 많은 젊은이들의 시대적 화두는 ‘21세기의 사회주의’입니다. 그들에게 조선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반성할 점과 배우거나 계승할 점을 알려주고 싶었죠.”_한겨레 인터뷰 중에서




https://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1122036.html



23년도에 저자가 한겨레와 인터뷰한 내용을 읽어보면 이 책이 주는 의의를 보다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 100년을 뛰어넘어 과거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을 현시대에 읽어보아야 할 이유가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붉은 시대'를 호명하고 있다. 그들이 이룩하고자 했던 실천적인 노력들, 8시간의 노동 시간, 파업할 권리, 노동 현장의 민주주의, 여성 인권 신장 등은 복지국가의 초석이 되어 현재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이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사회적·문화적·경제적 관점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를 톺아보며 현재를 계승하고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보는 것, 의도적으로 소거된 붉은 시대를 먼저 소환해야 할 시점이다.






내가 알고 있었던, 내가 배웠던, 내가 인식하고 있었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확실히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각인되었던, 대체적으로 '빨갱이'로 압축되어버린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무엇이었다. 공산주의 운동들이 추동한 한국 근·현대사의 발전 동력의 맹아가 그 시절에 움트기 시작했다는 것은 정말 놀랍다. 국내외를 넘나들며 조선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조선인들이 당시 시대적 맥락과 함께하고 있었다는 것과 이들이 조선의 독립을 넘어 쇄신의 개혁을 꿈꾸었다는 것도 미처 알지 못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이곳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어려웠다. 그간의 논문들을 취합하고 그에 더해진 글들이라 뒤에 첨부된 주석과 참고문헌들만 떼어보아도 책 한 권 정도의 분량이었다. 가장 느리게, 또 오래 읽었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가장 많은 책이었달까. 느리고도 지난한 과정의 독서였다. 그러나 어떤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그만한 도약이 필요한 법이리라…. 아마도 이 책은 올해 읽은 책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을 책이 되고야 말 것 같다.




*하니포터 11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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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내가 원한 것
서한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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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덥다고 찡찡대는 나에게 친구는 일갈을 날린다. 남은 생의 여름들 중에서 이번 여름이 그나마 가장 시원할 것이라고. 갈수록 더워질 여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난다. 쏟아지는 햇볕 아래 빈틈없이 꽉꽉 들어찬 밀도 높은 습기가 온몸을 옥죄어온다. 예상보다 오래 야외에 머물기라도 하면, 한여름의 펄펄 끓어오르는 열기에 경미한 현기증과 함께 구역감이 올라오고야 만다. 이렇게 내가 감각하는 여름은 대체로 따갑고 종종 축축하며 내내 끈적거린다. 아지랑이처럼 울렁거리는 정신머리를 겨우 붙잡는다. 그리고 조용히 숨죽이며 하루빨리 여름이 끝나기를 무기력하게 기다린다. 여름에 내가 원한 것이라고는 고작 이 여름의 찬란한 종말뿐이었다.





에어컨과 선풍기의 비호 아래 배를 깔고 엎드려 누워 한 손에는 메로나를, 한 손에는 《여름에 내가 원한 것》을 들고 읽기 시작한다. 서한나가 써 내려간 글들은 '연인들, 감각들, 장소들'로 나뉘어 있지만 그녀가 감각하는 여름의 공간 속, 곳곳에는 연인들이 있다. 달뜬 밤, 분위기 좋은 바, 소나기 속…. 프롤로그에서 밝혔듯이 권태와 매혹이 가득한 여름의 상태는 계절이라는 여름의 경계를 허물고 뛰어넘는다. 묘사하는 장면의 면면들은 이름 모를 어느 영화의 감성적인 스틸컷을 닮아있다. 구간과 구간 사이를 반복해서 재생하게 만들고 싶어지는, 그것이 비디오테이프라면 필시 필름이 닳고 닳아 늘어지고야 말 것이다.


권태와 매혹이 모두 하루에 있고, 한낮과 한밤중이 그렇게 다를 수 없다. 어느 여름날 행복했던 시간을 묘사하는 것보다도, 어떤 시간을 살든 여름의 상태로 산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p.5 Prologue


선풍기를 틀어놓은 탓에 한 손에 쥔 메로나가 금세 녹아 흘러내린다. 다급하게 책을 놓고 메로나를 핥아보지만 손은 이미 끈적거리기 시작한다. 끈적거리는 손으로 녹아내린 메로나를 마저 먹으며 생각한다. 《여름에 내가 원한 것》과 닮아 있다고, 그것을 읽고 있는 감정과도 닮아 있다고. 시원하고 달콤한 메로나가 달짝지근한 향을 풍기며 흘러내린다. 지나간 자국은 여름의 습기처럼 끈적하다. 연인, 사랑, 질투, 짝사랑, 순애, 회한 등의 감정은 마치 사랑이 녹아흘러 남긴 끈적한 자국 같다. 여전히 달큼한 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여름은 좋든 싫든 감각을 건드린다. 너무 덥고, 너무 따갑고, 너무 차갑다. p.51 사랑에 빠진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것


나른하고 권태로운 혹서는 오히려 몇 가지 감각들을 섬세하게 추려주기도 한다. 얼음을 가득 넣은 루피시아의 피콜로라는 차, 해수욕 후에 즐기는 고생스러운 독서의 권태와 낭만, 아이리시 카밤을 즐기는 정석, 판촉용 티셔츠의 가벼운 즐거움 등을 비롯해 여름에 맛보는 오이와 양파, 수박, 맥도날드 아이스크림 외에도 플레이 리스트와 책, 영화 등에 얽힌 감각들의 서사에서 여름의 발향을 들이쉬어본다. 높은 온도에서 향의 휘발성이 강렬해지는 것처럼, 여름 안에서 감각하는 것들이 뿜어내는 서사 또한 한껏 짙어지는 것이다.


근처에 오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고, 메세지를 보낼까 하다 불러내면 뭐해, 술이나 먹겠지 싶어 그냥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솔직히 말해 안 나온다고 하면 외로워질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집에 왔다. 이제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밤도 그런대로 견딜 수 있고, 마음에 드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 정도로도 그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외로움은 해결하려고 들지만 않으면 괴롭지 않다. p.159 여름 바람


서한나의 감각들은 오감을 가로지른다. 오감의 감각들이 야기하는 정서를 따라 서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감각의 길을 따라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나는 나의 여름 속을 헤매고 있다. 서한나가 이끄는 여름의 권태와 매혹이라는 끈적이는 속성을 만지작거리며 기어코 들여다본다. 기원을 알 수 없는 달뜬 마음으로, 장대비 속에 대책 없이 뛰어드는 무모한 용기를, 눈물이 땀처럼 흐르던 숲속에서, 끈적이는 얼굴에 달라붙던 성가신 날벌레를 함께 쫓던 밤에, 불안과 설렘을 착각하곤 했던 계절의 여름을…. 서한나가 여름을 감각하는 방식으로 들여다보는 나의 여름도 제법이었다.




슬슬 더워지려는 체온을 달래고자 얼음을 콰득콰득 씹는다. 달뜬 나의 여름을 진정시키며 책장을 넘겨 장소들을 옮겨간다. 운동장의 정글짐과 지하실 같은 공간에서부터 부여, 남해, 치앙마이, 오키나와, 가고시마 같은 멀리 떨어진 지역의 장소들까지. 옮겨 간 그곳에도 어김없이 여름의 그것들이 있다. 시간과 시절을 넘나들며 쌓인 서사, 그 지역과 장소만이 가진 고유한 정서. 같은 계절,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존재하더라도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유일한 것들이 박제되어 있다. 여름만이 발현하는 생동력, 꼼짝없이 목도하는 권태감, 사사로이 거니는 평온함 등이 또다시 나를 어지러이 나의 장소들로 옮겨 다니게 만든다.




서한나는 여름의 장막을 걷어 독자의 손을 잡고 '여름' 안으로 이끈다. 일차원적으로 감각했던 여름의 외피를 걷어내고 여름이 가진 내밀한 속성의 내피를 들춰본다. 감각적인 문장들이 많다. 에필로그 속 지인의 말이 옅은 각인을 남긴다. 좋아하는 사람 없는 선선한 가을 같은 마음은 누군가를 절절하게 좋아하는 바람에 마음이 아주 뜨거웠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것을 짐작해 보며, 이것 또한 여름의 산물이겠거니…. 이내 곧 끄덕이며 여러 문장들을 갈무리해 본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고 싶을 때 내가 나라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나에게 나의 틀과 에고가 있다는 것이, 그래서 그것 때문에 진짜 그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그런 식으로 알도록, 사랑을 경유해서만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알도록 한다는 뜻이다. p.13 나는 도울 거야 당신의 지옥을


그와 헤어지고 나서는 표지가 하늘색인 시집을 샀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하는 일 중 하나는 서점을 배회하고 자신과 가장 멀어 보이는 것을 사서 집에 오는 것이다. p.86 더워지고 싶어서 그 시집을 샀다


이 세상 것이 아닌 정신이야말로 이 세상을 놀라게 할 말을 한다. 그리고 사랑은 우리의 정신을 저세상으로 보낸다. 정확히 그 에너지만큼 우리를 이 세상에 달라붙게 한다. 내가 궁금해하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있으니까, 그가 우리의 언어로 말하고, 우리의 언어로 생각하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쓴 논문을 읽는 것만큼 변태적이고 쓸데없는 일은 없다. 너의 정신의 산물을 사랑하고 네 삶의 지향점을 사랑한다는 것보다 더 근사한 사랑의 형태를 아직 나는 모르겠다. p.98 모든 걸 저에게 알려주세요


살면서 알게 된 것은, 감정에 따라 사는 것은 미지를 감수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모험의 원형이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나 장소에 그냥 가버리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주는 상처를 직격으로 맞는 것이다. 아주 길고 느린 변화가 수반된다. 지금까지 쌓아온 나에 대한 생각은 해체돼 버리고, 우리는 깊은 무력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감정과 행복의 주도권을 이미 상대에게 넘겨버렸으니. p.203 여름에 감행한 것


찻집 앞에서 세 번째 담배를 꺼내며 지인이 말했다. "아, 요즘 좋아하는 사람 없어서 좋아요. 마음이 선선해, 가을 같아." 그는 1500원 더 비싼 담배를 태운다. p.261 Epilogue 그때 내가 원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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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책 - 괴테에서 톨킨까지, 26편의 문학이 그린 세상의 정원들
황주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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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 대한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기억을 떠올려보자면…? 몇 년 전, 일본 여행에서 정원이 유명하다고 하는 어떤 사찰을 방문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꽃과 나무를 비롯한 온갖 식물들이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공간일 것이라는 예상은 어긋났다. 인위적으로 배치한 나무나 바위, 돌 그리고 모래와 자갈로 표현한 결들은 절제적으로 느껴졌다. 나에게는 조금 강박적으로 보였던 일본의 그 정원은, 나중에 검색을 해본 후에야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정원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의미는 나에게 평면적이고도 피상적이었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정원의 책》은 문학 속에서 등장하는 정원이라는 공간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상징적 의미로 기능하는지, '정원'이라는 의미를 보다 확장시키며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그중에서 문학 작품 속 정원을 가장 많이 또 오래 들여다보았다. 정원이 등장하는 문학은 많다. 그저 배경일 때도 있지만 정원이 없으면 안 되는 작품도 있고, 정원이 숨은 주인공이기도 하다. 실제로 있는 정원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은유적으로 정원이라 부르는 곳도 있다. 이토록 많은 정원들이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지를 알아보고 또 알리고 싶었다. p.8-9 프롤로그, 가든 라이팅으로 만든 꽃다발




불어불문학과 영어영문학, 미술사학과 조경학에 이르는 저자의 폭넓은 학문의 스펙트럼은 책이 다루는 '문학 속의 정원'이라는 키워드에 더할 나위 없이 꼭 들어맞는다. '치유, 사랑, 욕망, 생태'라는 네 가지의 범주로 다루는 정원의 이야기는 괴테나 루소, 톨킨부터 마거릿 애트우드, 김초엽까지 시대와 장르를 넘나든다. 이들 속에서 정원은 배경으로써만 존재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상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정원이라는 존재를 한정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넓게는 공공의 정원이라는 의미로써 공원이나 숲 혹은 정원을 구성하는 요소들인 나무나 꽃에 방점을 두고 느슨하게 그들이 문학 속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톺아보는 것이다.


정원을 만드는 까닭을 말할 때면 으레 '이상향'이라는 말이 나온다. 지금 여기에는 없지만 어딘가에는 있을 것 같은, 그리고 언젠가는 가게 되리라고 믿는 곳에 대한 상상은 삶을 견디게 해주니까. 정원은 이런 꿈의 한 조각이다. 이를 얼마나 아름답게, 크게, 정교하게, 혹은 비싸게 만들었는지, 어떤 메시지를 담았는지 아니면 의미 대신 형태로 표현했는지, 아니면 종교적인 상징 같은 것을 담았는지 등이 정원을 읽는 실마리가 된다. 그런데 어떤 정원을 만들든 조심해야 할 점이 있는데, 마지막에 딱 하나만 더 얹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야 한다. 식물이 과하면 금세 뒤죽박죽이 되고, 감성이 과하면 의미가 오히려 흐려진다. p.140


《정원의 책》에는 다양한 문학 작품들이 등장한다. 《데카메론》이나 《길가메시 서사시》를 비롯한 위대한 고전들이나 영화로도 흥행한 《반지의 제왕》같은 판타지, 애니메이션으로 기억하는 《캔디 캔디》〈레겐트루데〉같은 동화도 있다. 비교적 현대적인 작품으로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미친 아담 3부작 시리즈〉나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같은 SF 작품들까지 시대와 장르를 넘나든다. 특히 잘 알지 못했던 작품들의 줄거리를 읊어주는 부분에서는 종종 꼭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그보다 더 신선했던 것은 그 작품 안에서 기어코 '정원적인' 요소들을 찾아내어 그 의미를 정의하고 확정시켜 나가는 시선이었다. 인간의 욕망이 다분히 투영된 정원, 밀애의 장소로서의 정원, 인물들의 어느 시절을 대변하는 정원, 권력과 부의 상징으로 기능하는 정원 등등 그 의미 또한 다채롭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윤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정원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담장을 맞댄 회스 일가의 정원은 갖가지 채소들과 다양하고 화려한 꽃들, 아이들을 위한 모래 놀이터와 미끄럼틀 및 풀장에 더하여 개를 비롯한 온갖 동물들이 즐비하다. 낙원처럼 보이는 이 정원은 기능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풍족하다. 수용소의 유대인들로부터 착취한 것들로 말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담장을 맞댄 이 정원은 불쾌하고 기괴하기 짝이 없다. 수용소에 나온 재를 비료로 사용하기까지 하는 몰인간성의 유독한 악취를 뿜는 정원을 두고, 우리는 그 정원은 유해하다고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정원 자체는 죄가 없다. 언제나 죄는 인간의 몫일 뿐이다. 저자는 아래와 같이 결론을 맺는다.


…아무리 정원과 조성자, 만들어진 과정의 윤리적 문제는 상황적 맥락을 통해 보아야 한다고 하지만 이 정원만큼은 영영 넘어설 수 없을 것 같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나(헤트비치)는 이 시절을 회고하며 "그 장소에서 무언가 좋은 것이 나온다면 얼마나 역겨울지 상상해 보세요. 그곳에서요"라고 한다. 이 정원을 설명할 새로운 언어가 필요한데 나는 아직 이를 찾지 못했다. p.183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들에서는 끊임없이 묵묵하게 나무를 심는 목자가 나온다. 그가 심은 씨앗의 태반은 스러져갔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저 심을 뿐이다. 시간을 흐르고 흘러 어느새 그가 심은 씨앗들이 이내 숲을 이룬다. 숲을 기반으로 물이 돌고, 거센 바람의 결이 온순해지며, 인간을 비롯한 다양한 생물종들이 모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씨앗을 심는 개인의 소소한 행위가 점차 확장되어가며 숲이라는 공공의 정원을 이룩하는 과정은, 그 모든 과정은 일면 거룩하고 고결하게 느껴진다.


이런 '공공의 정원'의 맥락으로 읽은 뉴욕의 센트럴 파크를 설계하고 조경한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의 《미국 농부의 영국 도보여행과 이야기》를 다룬 편도 인상 깊다. 버컨헤드의 빵집 주인으로부터 '우리의 새 공원'을 꼭 둘러보라는 친절한 당부에 그곳을 둘려보며 일종의 센세이션을 느끼며 '민중의 정원'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힌다. 버컨헤드의 이 공원은 세계 최초로 시민들의 힘(돈)을 모아 조성한 공원(p.65)인 것이다. 이것이 의미 있는 까닭은 19세기 전까지 정원이나 공원 같은 녹지를 소유하는 것은 일부 특권계층만의 혜택이자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옴스테드가 버컨헤드의 공원에서 얻은 영감은 훗날 뉴욕 센트럴 파크를 즐기는 여러 군상의 모습으로 정원의 공유화가 대중에게 어떻게 이로움을 선사했는지 대변한다. 더불어 에밀 졸라의 《쟁탈전》을 다루면서 특권 계층이 투기로 축적한 부로 조성한 정원이 당시의 부조리를 상징하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도시 문제, 공공 보건은 물론이거니와 계층 간의 교류와 사회 통합을 목표로 조성된 공공 공간이 실제로는 기득권 계층의 권태로운 유희 공간으로 전유 된 것은 역설적이다.

 19세기 후반 등장한 도시의 공공 공간은 이 시대가 우리에게 물려준 중요한 도시의 자원 중 하나다. 그리고 이 공간을 둘러싼 이야기 또한 여전히 살아 있다. p.139




사실 일상에서 정원을 마주하는 일은 흔치 않다. 일단 대부분의 주거 형태에서 정원을 조성하기 위한 물리적 공간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겠지. 철이 덜든 시절에는 근사한 중정을 품은 단독 주택을 꿈꾸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 어설픈 소망마저 요원하다. 그러나 〈지구 정원사〉라는 다큐처럼 '정원'의 의미를 느슨하고도 넓게 확장시켜 생각해 보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양해진다. 《정원의 책》은 그런 맥락의 줄기 중 하나로, 문학 속에서 발굴해 낸 여러 차원의 정원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정원은 문학 속에 밀애와 사랑의 도구적 장치로 기능하는 것 외에도 정원에 담긴 서사는 더 농밀하다. 사회·역사적인 기록의 증거로 존재하기도 하며, 정원이라는 존재 자체로 생생하게 현현하기도 한다. 시비를 떠난 인간의 욕망을 오롯이 투영하는 정원도 여러 의미로 매력적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여러 문학 작품 속의 정원에서 저자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무람없이 정원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거닐다 온 기분이 든다.




*한겨레 서평단 하니포터 10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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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아무것도
최제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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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한기가 소름처럼 오소소 돋아 수증기 어린 창문에 맺힌 물방울 같은, 혹은 한여름의 한기에도 저항할 수 없는 무엇 때문에 그저 흘리고만 있는 식은땀 같은 모습은 어느 모로 보아도 기묘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수증기나 식은땀이나 이것은 외부와 내부, 그것이 환경적인 요소이든, 정서적인 요소이든, 현격한 온도 차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 간극에서 오는 이상하고 야릇한 재미를 기대하며 책을 펼쳤다. 《아뇨, 아무것도》는 작가의 미발표작 15편을 모은 짧은 소설집이다. 판형도 작아서 한두 장 정도로 끝나는 소설은 더욱 짧게 느껴지고 길어도 열 장 정도를 조금 넘는 수준의 짧은 소설들이다. 여름의 끈적한 습기 속에서 집중력을 잃고 허우적대는 요즘의 나에게 《아뇨, 아무것도》는 적절한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면서도 소설 속 후일의 많은 부분을 상상의 영역으로 남겨주었다.



역시 작은 고추가 맵다고 해야 하나. 작고 짧은 소설집 안에서 펼쳐지는 세계들의 장르가 다채롭다. 우화도 있고, 드라마도 있고, SF도 있고, 호러도 있다. 그저 웃기기도 하고, 아쉽고 짠하기도 하고, 뭉근하게 섬뜩해지기도 하고, 찝찌름한 뒷맛을 남기기도 한다. 어찌 보면 질서 없이 파편적으로 흩어진 이야기들은 되려 일상 속에서 우리가 종종 마주할 수도 있는 가능성의 영역으로 초대하는 것만 같다. 오피스텔 지하의 수영장, 24시간 편의점, 분위기가 독특한 어느 바, 어느 나라의 동물원에서 일어나는… 혹은 친구, 직장 동료, 소개팅 상대, 유명 스포츠 선수 또는 생경하고도 미지한 존재로부터 일어나는…. 일상의 주파수들이 다른 종류의 파동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것이다.





책을 덮고 나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물과 숨》이었다. 오피스텔 지하에 위치한 임시 폐쇄 중이었던 수영장에 몰래 침입한 재희. 그날 이후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수영장에 대한 끌림이 점차 강렬해진다. 늦은 밤 혼자 수영을 터득하기 시작하고 완벽한 수영을 위한 열정은 시간이 갈수록 은은한 광기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재희와 '물'이 조화하는 방식이 서서히 뒤틀린다. 손으로 물을 가르는 일체감에서 점차 물에게 잠식 되어가는 공포. 아주 깊은 물의 한곳을 오래 응시하다 보면, 가늠할 수 없는 그 깊이에 아찔함을 느끼며 경험하는 경미한 현기증 같은 공포가 인다. 여기에 소소하게 가미된 나폴리탄 괴담적 요소가 별첨 같은 공포와 재미를 더해준다.


 이제 왔어요?

 저를 아세요?

 그럼요. 당신의 부피를 기억해요.

 물에 몸을 담근 적이 거의 없는데.

 왜요, 아기 때는 매일 조그만 욕조에서 첨벙거리며 놀았잖아요. 언제나 당신의 부피만큼 흘러넘친 물이 흐르고 흘러 구름이 되고 비가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어 끊임없이 만나거든요. 우리는 절대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것참, 든든한 말씀이군요. p.40-41 <물과 숨>




이어서 이 책의 제목인 《아뇨, 아무것도》도 부랴부랴 떠오른다. 우연한 상황에서 평소에 데면데면한 직장 동료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고백을 한다. 아주 근미래, 그것도 아주 짧은 초 단위 정도가 보인다는 고백. 그리고 동료는 그에게 자신이 본 그의 근미래에 관한 짧은 예언을 건네고, 그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지 주변을 주의 깊게 살핀다. 어느덧 그가 방심하는 사이, 기묘한 방식으로 상황이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결국은 "아뇨, 아무것도."라는 말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사였다. 그저 외면하는 것 밖에 어쩔 도리가 없는 불가해한 상황에 대한 무기력한 공포는 마침표로도 끝내 그 상황을 마칠 수가 없는 것이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선미 씨는 내 사소한 미래로 어떤 콩트를 썼을까? 보고 싶다. 어떻게든 여길 무사히 빠져나가 기필코 읽어보고 싶다. 이런 건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아뇨, 아무것도." p. 81 <아뇨, 아무것도>


본격적으로 공포스럽지는 않았지만 《48시 편의점》도 그 기묘한 전개에 흥미진진해하며 몹시 재미있게 읽었다. 일상적으로 들리던 24시간 편의점에서 24시간 내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점장을 자각하면서 두 인물은 나름의 가설과 추리를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용감하게도 직접 점장에게 그 까닭을 묻고 아리송한 대답을 얻는다. 일상의 배경으로만 등장하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순간에서 탁하고 켜지는 기묘한 호기심이 미로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그들과 함께 나도 가설을 세워보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우리 주위엔 그런 불투명한 틈새들이 있다. 별거 아니긴 한데 생각해 보면 이상한, 그렇다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는, 그 기분이란 게 일상을 둘러싼 제방에 구멍을 내지 않으려는 의도적인 무시가 아닐까 미심쩍은, 그래봤자 생각해 보면 별거 아닌…… 예를 들면 우리 동네에 새로 생긴 24시 편의점이 그렇다. p.207 <48시 편의점>





그리고 '엄격한 질서에 의해 조성된 혼돈에 오점을'(p.114)을 남기기 위해 가나다순에서 배제된 작품인 《마트료시카를 읽으면서는 기시감을 느낀다. 작품 속에 피조물과 작가의 존재가 마치 마트료시카처럼 반복되는 것이다. '분방하게 태어난 글들 사이에 인위적인 감상 순서를 정하고 싶지 않아'서(p.114) 가나다순으로 목차를 정했다는 〈작가의 말〉을 곱씹는다. 유일하게 배제된 이 작품을 추미스라는 장르의 애독자로써 의심의 눈초리를 계속 보냈지만, 내가 찾아낸 것이라고는 〈작가의 말〉이 오점인 《마트료시카를 제외한 14편의 작품들을 기준으로 정중앙에 배치되었다는 것뿐이다. 마치 마트료시카의 마지막 인형처럼. 정중앙에 있는 〈작가의 말〉도 작품 중 하나인가? 이것을 가운데 두고 각 작품이 대칭을 이루나? 비교하며 읽어보았지만 영 소득이 없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흥미로웠으니 그것으로 만족이랄까.


"언젠가는 우리 모두를 품고 있는 첫 번째 인형에 닿겠죠.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 p.249 <마트료시카>


공포/호러/스릴러를 좋아하는 나는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들을 애정하는 편파적인 마음이 크지만 이 책에서는 앞서 말했듯이 다양한 종류의 이야기가 많다. 여기는 게이바가 아닙니다》, 《친구의 연인의 친구들》, 《테니스를 쳐야 하는 이유》, 《하이델베르크의 동물원》같은 작품들은 여러 인간 군상의 모습들을 그리면서 드라마적인 요소들이 다분하다. 각각 문화·예술의 장을 만들고자 했던 칵테일 바가 게이바가 되어버린 이유, 죽은 친구의 불륜을 파헤치며 얻은 진실, 돌연 삶에 대한 의미를 찾아 떠난 이의 아이러니한 결말, 다소 낭만적인 인연과 운명에 관한 의아한 역학 등을 읽어낸다. 전체적인 작품에 전반적으로 작가 특유의 위트가 스며들어 있다. 몇몇 작품은 그 특징이 두드러져서 읽으면서 피식,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






청탁없이 마감없이 분량 제한 없이 그냥 썼다는 작가의 말에서 밝힌 언급이 반갑다. 그냥 쓰고 싶어서 쓴 이야기들이야말로 독자도 아무런 사심없이 읽고 싶은대로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즐겁게만 읽었다. 본격적인 여름의 초입이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덥지만 어쩌다 가끔, 그 기세가 한풀 꺽인 선선한 바람처럼 반가웠다. 이상하고 야릇한 재미를 추구하다가 일상에서 불현듯 만나는 기묘함을 기대해본다. 그렇다면 나는 그것의 질문에 무엇이라 답할 수 있을까? 나도 어쩔 수 없이 눙치듯 "아뇨,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게 될까?


 프로페셔널리즘이 삶을 풍족하게 만들어준다면 아마추어리즘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든 시작할 수 있고,

 대가 없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끝까지 추구할 수 있으며,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그런 글쓰기를 하고 싶었다.

 지금도 하고 싶다.

 아마추어의 어원인 라틴어 아마토렘의 뜻은 lover,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p.113-114 <작가의 말>





*한겨레 서평단 하니포터 10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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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로 마음먹은 당신에게 - 나를 활자에 옮기는 가장 사적인 글방
양다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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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것'에 관한 글을 열심히 읽어 놓고는, 화면에 깜빡이는 커서를 초점도 없이 멍하게 쳐다보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다. 괜히 사진 편집을 먼저 만지작거리고 레이아웃을 요리조리 구성해 본다. 글을 쓰는 것은 원래 힘든 일이라고, 그것은 위대한 작가나 처음 글을 쓰는 사람이나 똑같은 것이라는 《쓰기로 마음먹은 당신에게》 속의 어느 글귀를 떠올리며 안도한다. 일단은 뭐라도 끼적이고 작가가 강조했던 퇴고를 할 나중의 자신에게 일정분의 책임을 떠넘겨본다. 책에서 예로 들었던 '사랑한다는 말없이 사랑한다고 표현해 보기'를 떠올리며 '이 책이 참 좋았다는 말없이 좋다고 표현해 보기'를 실천해 보도록 노력할 예정이다. 이렇게 책을 읽고 실천해보는 것부터가 이미 이 책이 남다르다는것의 방증이라는 점을 미리 깔아놓고 시작해본다. 



새로 받아든 책을 처음으로 펼치는 순간은 대체적으로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하다. 특히나 판형의 크기, 책의 표지가 지닌 색감, 서체의 모양 혹은 내지의 질감 그리고 비릿한 잉크 향이 섞인 새 책 특유의 냄새 같은 감각적인 경험들도 내게는 빼놓을 수 없는 독서의 즐거움이다. 도돌도돌한 표지의 질감을 손가락 끝으로 느끼며 《쓰기로 마음먹은 당신에게》를 펼쳤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지가 얇고 부드럽다는 엉뚱하고 맥락 없는 생각이었다. 최근에 읽은 책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보드라운 질감이 새삼 생경했던지 나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페이지를 쓸어내렸다. 프롤로그를 지나 '여러분, 안녕하세요!'라는 유쾌한 인사로 시작하는 첫 번째 편지를 읽고 나니… 뭐랄까, 보드라우면서도 단단한 내공이 느껴졌달까…? 유려하면서도 튼튼하고 유쾌하면서도 진중하다.


글방의 글을 읽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는 전연 달랐다. 그것은 아직 잉크가 마르지 않은 이야기였다. 한번 쓱 문지르면 번질 듯했다. 휘갈겨 쓴, 섣부른, 꿈틀거리는 문장들. 무언가 되려고 시도하지만 처절하게 실패하는 무엇이었다. 그것은 나와 꼭 닮아서 자꾸만 나를 건드렸다. 글방에서의 시간은 작가가 되기 위한 연습, 책을 쓰는 과정이라기보다 한 주간 맹렬히 삶과 싸운 누군가가 보고 들은 것들을 목격하는 일에 가까웠다. (중략) 그사이 이야기가 무르익고 우리가 자라고 있음을 몰랐다. 서로의 작가가 되고 독자가 되었음을 몰랐다. p.5 프롤로그, 답장을 주세요 중에서





양다솔 작가는 '쓰는 것'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책을 얼마 읽지 않은 시점에서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글방에 다니며 10년 넘게 글을 써온 경험과 그 과정에서 차곡차곡 쌓아 온 자신만의 사유를 정갈하게 적어 독자에게 편지를 부친다. 글을 쓰는 것도 좋지만 타인에게 글을 쓰라 독려하며, 그들의 글을 읽는 것도 좋다는 작가의 고백은 '쓰기로 마음먹은 당신'이라 정의된 모두에게 선명한 응원이 되어준다. 물론 글방 지기답게 다정한 독촉도 잊지 않는다. 일주일마다 보내오는 작가의 편지에는 쓰기의 길라잡이가 되어줄 글감과 함께 그에 대한 고찰의 흔적이 가득하다. 사유의 흐름들이 간결하고 명쾌한 문장으로 흐르듯이 읽히는 까닭은 분명 시간과 정성을 들여 깎아 내고 정제해 낸 노력이 행간을 단단히 지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명랑하고 유쾌하게 흐르는 문장들이지만 결코 가볍거나 쉽게 읽히지 않는다. 작가는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이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하거나, 그럴듯한 방법론을 설파하지도 않는다. 엉덩이를 붙잡고, 아무것이나 써보기를 권유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빈 문서' 앞을 훌쩍 떠나 쓰는 것 따위일랑 홀랑 잊어버리고 바람을 쐬며 무작정 걸어보기를 권유하기도 한다. 퇴고의 중요성을 강요하면서도 완벽한 글 따위는 없고, 그저 전보다 나아진 정도의 글뿐이 존재하는 것임을 기쁘게 축하한다. 쓰기의 방법론보다도 작가가 던져주는 글감에 대한 통찰과 사유와 경험들의 문장이 쓰고자 하여 읽는 이들에게 반짝이는 영감이 되어준다.







쓴다는 것의 인간적인 동기, 배제하지 않는 느슨하고 너른 포용성, 활자와 언어가 제공하는 무궁한 아름다움 등을 이야기한다. 누군가의 글이 내포하고 있는 것, 쓴다는 행위가 다채로운 의미를 표상하고 있다는 것…. 결국은 사람으로, 인생으로, 삶으로 귀결되는 이야기들이었다. 일상의 어느 한순간, 삶의 어느 시절, 어느 인물에 대한 소회 등은 진득한 관찰에서 나온다. 관찰은 필히 세세하게 들여다보아야 하고, 자세한 관찰은 일말의 애정이라도 필요로 하는 법이다. 글감을 던져주며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도 그렇다. 글을 쓰려 노력하는 시간, 그러니까 가산할 수 있는 시간 외에도 일상과 삶의 곳곳은 한 편의 글이 되기를 기다리는 글감들이 가득하다. 그런 글감들은 다시 내면으로 스며들어와 결국 '나'의 이야기가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나를 쓴다는 것으로 정의되고야 마는 것이다. 


저는 사람들의 삶에는 모두 각자의 걱정, 번뇌, 그리고 고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독하지 않은 사람은요, 솔직히 좀 재수 없습니다. 다만 고독은 각자의 삶에서 다른 모양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고독은 작고 귀여운 돌멩이 같고, 어떤 사람의 고독은 문진처럼 조금 묵직하고, 어떤 사람의 고독은 그 사람을 깔고 앉을 만큼 거대하겠죠. p.31 






보드라운 페이지를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페이지에 머물곤 했다. 한 문단을 통째로 반복해서 읽거나 때로는 문장 단위에서 돌림 노래처럼 그 문장을 여러 번 혼자 속삭이기도 했다. 거칠 것이 없이 곳곳에 인덱스를 남겼다. 책을 덮고 책배를 보니 파란 인덱스가 바다에서 물결치기 시작하는 수많은 파도처럼 일렁인다. 모든 곳에 붙이니 인덱스가 결국은 무용해졌다. 작가는 여러 편지에서 곁들여 함께 읽을 책을 소개해주며 자신이 곁에 두고 읽는 책들을 추천해주곤 했다. 나로써는 《쓰기로 마음먹은 당신에게》을 곁에 두고, 쓰기의 권태를 느낄 때마다 무용한 인덱스 사이를 펼쳐들어 읽을 것이다. 에세이가 무릇 저지르는 지나치게 감상적인 정서가 없어서 좋다. 글에서 묻어나는 적정한 온도의 쾌활은 상큼한 시트러스 향 같기도 하고 시원한 피톤치드 향 같기도 하다. 글의 향이 쉽게 휘발되지 않는다. 쓰기에 대한 작가의 무한한 애정과 권유가 부담스럽지 않은 까닭은 그 기저에 쌓인 쓰기에 대한 작가만의 철학이 견고하기 때문일 것이다. 쓰기로 마음먹은 모두에게 작가는 성실한 독자가 되어줄 것이다.







저는 글쓰기가 어떤 결과나 성과에 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일종의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와도 같지 않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몹시도 같은, 내 이야기를 최선을 다해 말해보려는 시도. 그것에 적확한 언어를 쥐여주려는 시도. 내 삶을 주인으로서 바라보는 시도요. 밤을 새우며 입이 마르도록 쓰인 그 종이위의 문장이 당장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지요. 그런데 어쩐지 나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져 있습니다. p.306-307





*한겨레 서평단 하니포터 10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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