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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내가 원한 것
서한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평점 :

오늘도 덥다고 찡찡대는 나에게 친구는 일갈을 날린다. 남은 생의 여름들 중에서 이번 여름이 그나마 가장 시원할 것이라고. 갈수록 더워질 여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난다. 쏟아지는 햇볕 아래 빈틈없이 꽉꽉 들어찬 밀도 높은 습기가 온몸을 옥죄어온다. 예상보다 오래 야외에 머물기라도 하면, 한여름의 펄펄 끓어오르는 열기에 경미한 현기증과 함께 구역감이 올라오고야 만다. 이렇게 내가 감각하는 여름은 대체로 따갑고 종종 축축하며 내내 끈적거린다. 아지랑이처럼 울렁거리는 정신머리를 겨우 붙잡는다. 그리고 조용히 숨죽이며 하루빨리 여름이 끝나기를 무기력하게 기다린다. 여름에 내가 원한 것이라고는 고작 이 여름의 찬란한 종말뿐이었다.

에어컨과 선풍기의 비호 아래 배를 깔고 엎드려 누워 한 손에는 메로나를, 한 손에는 《여름에 내가 원한 것》을 들고 읽기 시작한다. 서한나가 써 내려간 글들은 '연인들, 감각들, 장소들'로 나뉘어 있지만 그녀가 감각하는 여름의 공간 속, 곳곳에는 연인들이 있다. 달뜬 밤, 분위기 좋은 바, 소나기 속…. 프롤로그에서 밝혔듯이 권태와 매혹이 가득한 여름의 상태는 계절이라는 여름의 경계를 허물고 뛰어넘는다. 묘사하는 장면의 면면들은 이름 모를 어느 영화의 감성적인 스틸컷을 닮아있다. 구간과 구간 사이를 반복해서 재생하게 만들고 싶어지는, 그것이 비디오테이프라면 필시 필름이 닳고 닳아 늘어지고야 말 것이다.
권태와 매혹이 모두 하루에 있고, 한낮과 한밤중이 그렇게 다를 수 없다. 어느 여름날 행복했던 시간을 묘사하는 것보다도, 어떤 시간을 살든 여름의 상태로 산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p.5 Prologue
선풍기를 틀어놓은 탓에 한 손에 쥔 메로나가 금세 녹아 흘러내린다. 다급하게 책을 놓고 메로나를 핥아보지만 손은 이미 끈적거리기 시작한다. 끈적거리는 손으로 녹아내린 메로나를 마저 먹으며 생각한다. 《여름에 내가 원한 것》과 닮아 있다고, 그것을 읽고 있는 감정과도 닮아 있다고. 시원하고 달콤한 메로나가 달짝지근한 향을 풍기며 흘러내린다. 지나간 자국은 여름의 습기처럼 끈적하다. 연인, 사랑, 질투, 짝사랑, 순애, 회한 등의 감정은 마치 사랑이 녹아흘러 남긴 끈적한 자국 같다. 여전히 달큼한 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여름은 좋든 싫든 감각을 건드린다. 너무 덥고, 너무 따갑고, 너무 차갑다. p.51 사랑에 빠진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것
나른하고 권태로운 혹서는 오히려 몇 가지 감각들을 섬세하게 추려주기도 한다. 얼음을 가득 넣은 루피시아의 피콜로라는 차, 해수욕 후에 즐기는 고생스러운 독서의 권태와 낭만, 아이리시 카밤을 즐기는 정석, 판촉용 티셔츠의 가벼운 즐거움 등을 비롯해 여름에 맛보는 오이와 양파, 수박, 맥도날드 아이스크림 외에도 플레이 리스트와 책, 영화 등에 얽힌 감각들의 서사에서 여름의 발향을 들이쉬어본다. 높은 온도에서 향의 휘발성이 강렬해지는 것처럼, 여름 안에서 감각하는 것들이 뿜어내는 서사 또한 한껏 짙어지는 것이다.
근처에 오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고, 메세지를 보낼까 하다 불러내면 뭐해, 술이나 먹겠지 싶어 그냥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솔직히 말해 안 나온다고 하면 외로워질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집에 왔다. 이제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밤도 그런대로 견딜 수 있고, 마음에 드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 정도로도 그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외로움은 해결하려고 들지만 않으면 괴롭지 않다. p.159 여름 바람
서한나의 감각들은 오감을 가로지른다. 오감의 감각들이 야기하는 정서를 따라 서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감각의 길을 따라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나는 나의 여름 속을 헤매고 있다. 서한나가 이끄는 여름의 권태와 매혹이라는 끈적이는 속성을 만지작거리며 기어코 들여다본다. 기원을 알 수 없는 달뜬 마음으로, 장대비 속에 대책 없이 뛰어드는 무모한 용기를, 눈물이 땀처럼 흐르던 숲속에서, 끈적이는 얼굴에 달라붙던 성가신 날벌레를 함께 쫓던 밤에, 불안과 설렘을 착각하곤 했던 계절의 여름을…. 서한나가 여름을 감각하는 방식으로 들여다보는 나의 여름도 제법이었다.

슬슬 더워지려는 체온을 달래고자 얼음을 콰득콰득 씹는다. 달뜬 나의 여름을 진정시키며 책장을 넘겨 장소들을 옮겨간다. 운동장의 정글짐과 지하실 같은 공간에서부터 부여, 남해, 치앙마이, 오키나와, 가고시마 같은 멀리 떨어진 지역의 장소들까지. 옮겨 간 그곳에도 어김없이 여름의 그것들이 있다. 시간과 시절을 넘나들며 쌓인 서사, 그 지역과 장소만이 가진 고유한 정서. 같은 계절,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존재하더라도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유일한 것들이 박제되어 있다. 여름만이 발현하는 생동력, 꼼짝없이 목도하는 권태감, 사사로이 거니는 평온함 등이 또다시 나를 어지러이 나의 장소들로 옮겨 다니게 만든다.

서한나는 여름의 장막을 걷어 독자의 손을 잡고 '여름' 안으로 이끈다. 일차원적으로 감각했던 여름의 외피를 걷어내고 여름이 가진 내밀한 속성의 내피를 들춰본다. 감각적인 문장들이 많다. 에필로그 속 지인의 말이 옅은 각인을 남긴다. 좋아하는 사람 없는 선선한 가을 같은 마음은 누군가를 절절하게 좋아하는 바람에 마음이 아주 뜨거웠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것을 짐작해 보며, 이것 또한 여름의 산물이겠거니…. 이내 곧 끄덕이며 여러 문장들을 갈무리해 본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고 싶을 때 내가 나라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나에게 나의 틀과 에고가 있다는 것이, 그래서 그것 때문에 진짜 그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그런 식으로 알도록, 사랑을 경유해서만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알도록 한다는 뜻이다. p.13 나는 도울 거야 당신의 지옥을
그와 헤어지고 나서는 표지가 하늘색인 시집을 샀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하는 일 중 하나는 서점을 배회하고 자신과 가장 멀어 보이는 것을 사서 집에 오는 것이다. p.86 더워지고 싶어서 그 시집을 샀다
이 세상 것이 아닌 정신이야말로 이 세상을 놀라게 할 말을 한다. 그리고 사랑은 우리의 정신을 저세상으로 보낸다. 정확히 그 에너지만큼 우리를 이 세상에 달라붙게 한다. 내가 궁금해하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있으니까, 그가 우리의 언어로 말하고, 우리의 언어로 생각하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쓴 논문을 읽는 것만큼 변태적이고 쓸데없는 일은 없다. 너의 정신의 산물을 사랑하고 네 삶의 지향점을 사랑한다는 것보다 더 근사한 사랑의 형태를 아직 나는 모르겠다. p.98 모든 걸 저에게 알려주세요
살면서 알게 된 것은, 감정에 따라 사는 것은 미지를 감수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모험의 원형이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나 장소에 그냥 가버리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주는 상처를 직격으로 맞는 것이다. 아주 길고 느린 변화가 수반된다. 지금까지 쌓아온 나에 대한 생각은 해체돼 버리고, 우리는 깊은 무력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감정과 행복의 주도권을 이미 상대에게 넘겨버렸으니. p.203 여름에 감행한 것
찻집 앞에서 세 번째 담배를 꺼내며 지인이 말했다. "아, 요즘 좋아하는 사람 없어서 좋아요. 마음이 선선해, 가을 같아." 그는 1500원 더 비싼 담배를 태운다. p.261 Epilogue 그때 내가 원한 것
*하니포터 11기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