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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미술사 - ‘정설’을 깨뜨리고 다시 읽는 그림 이야기
박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평점 :

'…미술사?'라는 단어를 보고 최근 개인적인 유튜브 알고리즘에서 미술 작품을 소재로 작품에 숨겨진 서사를 해설해 주는 쇼츠를 재미나게 본 기억이 났다. 작품에 그려진 인물의 미묘한 손짓, 그들의 눈길이 머무는 곳, 무심하게 서있는 것 같지만 의도된 배치 등에서 채 읽히지 못하고 숨겨져 있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다. 《두 번째 미술사》도 읽는 내내 화가와 작품을 비롯해 관련한 것들에 대한, 미처 읽히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흥미롭게 들려준다. 마치 난해한 그림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서있는 내게 슬쩍 다가와 '있잖아, 그거 알아? <마들렌의 초상>이라는 제목이 200년 후에나 제 이름을 찾게 됐다는 사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야…'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누가 역사에 남고 누가 사라지는가는 단순히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와 사회가 어떤 이야기를 선택해 기억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 선택과 망각, 복원의 과정을 따라가며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의 이야기'들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p.6 프롤로그
절절한 서사의 고흐, 사과 정물화로 기억하는 폴 세잔, 세기의 라이벌 피카소와 마티스, 타히티의 고갱…. 어설프지만 익히 알고 있었던 정설들에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과연 그럴까? 평생 그림을 한 점도 못 팔았다던 고흐. 그러나 사실 그의 작품은 생전에 여러 점이 팔렸었고,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생의 말미에서는 그 작품성을 다소 인정받기도 했다고 한다. 피카소와 마티스는 서로를 존중하던 발전적인 라이벌 관계였으며 고갱이 묘사하던 타히티의 낭만성은 현실과는 괴리감이 있었던 뒤틀린 이상이었다. 역사가 그러하듯 그들의 신화적인 서사는 당대의 사회문화적인 요소들과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취사선택을 거쳐, 하나의 정설이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 미술사》는 7장에 걸쳐 다양한 주제로 묶여있지만 이를 관통하는 미술사의 특성들은 미술사의 세계가 얼마나 역동적이고 유연하게 생동하는지 잘 보여준다. 해석과 맥락은 시대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요소들에 따라 상대적으로 평가되어왔고, 이런 생동적인 흐름 속에서 화가에 대한 평가와 그림에 대한 해설은 풍부하고 다양한 층위를 갖추며 입체적으로 변모한다. 무엇보다 작품에 해석과 평가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굉장히 가변적이고 선택적인 서사라는 점에서 미술사의 다층적인인 감상을 가능하게 만든다. 조르주 드 라 투르나 보티첼리, 밀레의 예시처럼 작품에 대한 평가나 의의가 작품 자체의 예술적인 완성도가 아닌 시대적인 요구나 당대의 철학, 사회문화적인 요소들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은 새삼 놀랍게 느껴진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사실은 <마들렌의 초상>이라는 제목에 얽힌 서사였다. 원래 제목은 '흑인 여인negress의 초상'으로 프랑스의 여성 화가 마리 기유민 브누아의 1800년 작으로 흑인 여성을 단독 모델로 한 그림이라 당시에는 꽤나 파격적인 그림이었다고 한다. 당시 꽤나 호평을 받았음에도 오랫동안 루브르 박물관 소장되었다가 20세기 후반에서야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고, 연구를 통해 모델의 이름이 '마들렌'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렇게 이 작품은 흑인 여성을 지칭하는 negress라는 인종차별적 멸칭에서 black woman을 거쳐 비로소 Madeleine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이름'이 상징하는 존재의 정체성이 '마들렌'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면서 작품은 그제야 진정한 의의로 생동하기 시작한다. 간과하기 쉬운 제목에서 들인 수고로운 노력에서 의외의 감동을 느꼈다. 이름을 부르고서야 꽃이 되었다던 어느 시처럼….
(…) 이는 과거 제목이 부여했던 익명성, 나아가 객체화된 시선을 거두어내는 효과가 있다. 예전 제목을 통해 '한 흑인 여성의 이미지'로 소비되었다면, 이제는 '마들렌'이라는 삶을 가진 인물의 개성 표현이 제대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또한 제목에서 인종 지칭어를 제거함으로써 관람자는 그녀의 피부색보다 표정과 자태에서 오는 인간적 품위를 먼저 보게 된다. p.221
이러한 맥락에서 다른 이로 오명 된 작품과 명예가 진정한 주인을 찾아가는 과정도 새롭게 보인다. 단순히 오명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가진 전체적인 맥락과 의미도 새롭게 재창조 되는 것이다. 아버지나 남편의 그늘이라는 편견으로 오명 된 여성 화가들의 작품이나 유명세를 기준으로 소거된 무명 화가들의 작품들은 여러 사료들과 연구들을 통해 비로소 제 이름을 찾고, 마침내 잃어버렸던 새로운 의의를 부여받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제가 유기적으로 얽히면서도 시대를 초월하여 새로이 호명 되기도 하는 것이다.

화가나 그림이 아닌 전시 공간인 '미술관'을 다루는 마지막 장도 흥미로웠다. 특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고 떠올리는 하얀 전시 공간인 '화이트 큐브'는 비교적 현대에 이르러서야 개념화되었다고 한다. 하얀색 배경이 당연히 작품을 더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최선의 배경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를 두고 다루는 비판적인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새하얗고, 조용한 조명 아래 잘 정돈된 '화이트 큐브'가 자아내는 권위적인 분위기는 예술을 고차원으로 격상시켜 되려 감상자를 유리시킨다. 하얀 진공 같은 그 공간에 들어서면 무의식적으로 숨죽이게 되는, 원인 모를 긴장감이 떠올랐다. 이런 것이 일종의 프레임이었다니.
이런 맥락에서 화이트 큐브는 단순히 미술을 보여주는 장소가 아니라 미술의 의미를 규정하는 프레임이기도 하다. '중립성'이라는 명목 아래 화이트 큐브는 특정한 형식의 미술만을 이상적으로 만든다. (…) 어떤 공간이 무엇을 이상적인 예술로 간주하느냐는 기준은 결국 그 공간의 미학과 정치가 결정한다. p.255

후딱 읽혔다. '오, 오?, 오!'를 내적으로 연발하며. 정설을 절대적인 진리쯤으로 생각했던 편협한 고정관념이 기분 좋게 부서졌다. 수많은 세월을 거쳐,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해석한 의의와 평가들에 앞으로 더할 것이 있을까 하는 안이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미술사》에서 다루는 개별적인 사실들과 미술사의 전체적인 맥락들이 얼마나 가변적이고 유동적인지, 그러한 흐름 속에서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해석의 여지가 얼마나 다양하게 변모할 수 있는지 새로운 감상이었다. 흥미로운 사실들을 파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질문들과 그림들, 화가들, 삽화들이 지루한 것 없이 후룩후룩 읽게 만든다. 각자의 '첫 번째 미술사'가 무엇이었든, 《두 번째 미술사》는 분명 더 흥미로울 것이다.
4장에서 페르메이르의 북향 작업실을 다루면서 '북유럽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 얽힌 개인적인 경험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화가 페르메이르와 관련된 사료가 별로 없기 때문에 이 소녀의 정체와 복장과 진주 귀걸이의 정체는 밝혀진 것이 없이 미스터리하다고. 이런 미스터리가 신비롭게 느껴진 까닭인지 그림에 매료되어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를 탐독하기도 했고, 그 후에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며 스칼렛 요한슨이 정말 그 소녀와 닮았다며 감탄하기도 했다. 페르메이르의 작업실이 북향이어서 남향으로 비춰드는 빛 보다 오히려 균질한 빛을 이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이 그림에 관한 나의 개인적인 서사에 한 겹 쌓아본다. 조만간 다시 봐 볼까나….
*하니포터 11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