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미술사 - ‘정설’을 깨뜨리고 다시 읽는 그림 이야기
박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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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사?'라는 단어를 보고 최근 개인적인 유튜브 알고리즘에서 미술 작품을 소재로 작품에 숨겨진 서사를 해설해 주는 쇼츠를 재미나게 본 기억이 났다. 작품에 그려진 인물의 미묘한 손짓, 그들의 눈길이 머무는 곳, 무심하게 서있는 것 같지만 의도된 배치 등에서 채 읽히지 못하고 숨겨져 있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다. 《두 번째 미술사》도 읽는 내내 화가와 작품을 비롯해 관련한 것들에 대한, 미처 읽히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흥미롭게 들려준다. 마치 난해한 그림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서있는 내게 슬쩍 다가와 '있잖아, 그거 알아? <마들렌의 초상>이라는 제목이 200년 후에나 제 이름을 찾게 됐다는 사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야…'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누가 역사에 남고 누가 사라지는가는 단순히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와 사회가 어떤 이야기를 선택해 기억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 선택과 망각, 복원의 과정을 따라가며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의 이야기'들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p.6 프롤로그


 절절한 서사의 고흐, 사과 정물화로 기억하는 폴 세잔, 세기의 라이벌 피카소와 마티스, 타히티의 고갱…. 어설프지만 익히 알고 있었던 정설들에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과연 그럴까? 평생 그림을 한 점도 못 팔았다던 고흐. 그러나 사실 그의 작품은 생전에 여러 점이 팔렸었고,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생의 말미에서는 그 작품성을 다소 인정받기도 했다고 한다. 피카소와 마티스는 서로를 존중하던 발전적인 라이벌 관계였으며 고갱이 묘사하던 타히티의 낭만성은 현실과는 괴리감이 있었던 뒤틀린 이상이었다. 역사가 그러하듯 그들의 신화적인 서사는 당대의 사회문화적인 요소들과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취사선택을 거쳐, 하나의 정설이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 미술사》는 7장에 걸쳐 다양한 주제로 묶여있지만 이를 관통하는 미술사의 특성들은 미술사의 세계가 얼마나 역동적이고 유연하게 생동하는지 잘 보여준다. 해석과 맥락은 시대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요소들에 따라 상대적으로 평가되어왔고, 이런 생동적인 흐름 속에서 화가에 대한 평가와 그림에 대한 해설은 풍부하고 다양한 층위를 갖추며 입체적으로 변모한다. 무엇보다 작품에 해석과 평가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굉장히 가변적이고 선택적인 서사라는 점에서 미술사의 다층적인인 감상을 가능하게 만든다. 조르주 드 라 투르나 보티첼리, 밀레의 예시처럼 작품에 대한 평가나 의의가 작품 자체의 예술적인 완성도가 아닌 시대적인 요구나 당대의 철학, 사회문화적인 요소들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은 새삼 놀랍게 느껴진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사실은 <마들렌의 초상>이라는 제목에 얽힌 서사였다. 원래 제목은 '흑인 여인negress의 초상'으로 프랑스의 여성 화가 마리 기유민 브누아의 1800년 작으로 흑인 여성을 단독 모델로 한 그림이라 당시에는 꽤나 파격적인 그림이었다고 한다. 당시 꽤나 호평을 받았음에도 오랫동안 루브르 박물관 소장되었다가 20세기 후반에서야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고, 연구를 통해 모델의 이름이 '마들렌'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렇게 이 작품은 흑인 여성을 지칭하는 negress라는 인종차별적 멸칭에서 black woman을 거쳐 비로소 Madeleine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이름'이 상징하는 존재의 정체성이 '마들렌'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면서 작품은 그제야 진정한 의의로 생동하기 시작한다. 간과하기 쉬운 제목에서 들인 수고로운 노력에서 의외의 감동을 느꼈다. 이름을 부르고서야 꽃이 되었다던 어느 시처럼….



 (…) 이는 과거 제목이 부여했던 익명성, 나아가 객체화된 시선을 거두어내는 효과가 있다. 예전 제목을 통해 '한 흑인 여성의 이미지'로 소비되었다면, 이제는 '마들렌'이라는 삶을 가진 인물의 개성 표현이 제대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또한 제목에서 인종 지칭어를 제거함으로써 관람자는 그녀의 피부색보다 표정과 자태에서 오는 인간적 품위를 먼저 보게 된다. p.221

 이러한 맥락에서 다른 이로 오명 된 작품과 명예가 진정한 주인을 찾아가는 과정도 새롭게 보인다. 단순히 오명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가진 전체적인 맥락과 의미도 새롭게 재창조 되는 것이다. 아버지나 남편의 그늘이라는 편견으로 오명 된 여성 화가들의 작품이나 유명세를 기준으로 소거된 무명 화가들의 작품들은 여러 사료들과 연구들을 통해 비로소 제 이름을 찾고, 마침내 잃어버렸던 새로운 의의를 부여받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제가 유기적으로 얽히면서도 시대를 초월하여 새로이 호명 되기도 하는 것이다.





 화가나 그림이 아닌 전시 공간인 '미술관'을 다루는 마지막 장도 흥미로웠다. 특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고 떠올리는 하얀 전시 공간인 '화이트 큐브'는 비교적 현대에 이르러서야 개념화되었다고 한다. 하얀색 배경이 당연히 작품을 더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최선의 배경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를 두고 다루는 비판적인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새하얗고, 조용한 조명 아래 잘 정돈된 '화이트 큐브'가 자아내는 권위적인 분위기는 예술을 고차원으로 격상시켜 되려 감상자를 유리시킨다. 하얀 진공 같은 그 공간에 들어서면 무의식적으로 숨죽이게 되는, 원인 모를 긴장감이 떠올랐다. 이런 것이 일종의 프레임이었다니.

 이런 맥락에서 화이트 큐브는 단순히 미술을 보여주는 장소가 아니라 미술의 의미를 규정하는 프레임이기도 하다. '중립성'이라는 명목 아래 화이트 큐브는 특정한 형식의 미술만을 이상적으로 만든다. (…) 어떤 공간이 무엇을 이상적인 예술로 간주하느냐는 기준은 결국 그 공간의 미학과 정치가 결정한다. p.255




 후딱 읽혔다. '오, 오?, 오!'를 내적으로 연발하며. 정설을 절대적인 진리쯤으로 생각했던 편협한 고정관념이 기분 좋게 부서졌다. 수많은 세월을 거쳐,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해석한 의의와 평가들에 앞으로 더할 것이 있을까 하는 안이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미술사》에서 다루는 개별적인 사실들과 미술사의 전체적인 맥락들이 얼마나 가변적이고 유동적인지, 그러한 흐름 속에서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해석의 여지가 얼마나 다양하게 변모할 수 있는지 새로운 감상이었다. 흥미로운 사실들을 파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질문들과 그림들, 화가들, 삽화들이 지루한 것 없이 후룩후룩 읽게 만든다. 각자의 '첫 번째 미술사'가 무엇이었든, 《두 번째 미술사》는 분명 더 흥미로울 것이다.



 4장에서 페르메이르의 북향 작업실을 다루면서 '북유럽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 얽힌 개인적인 경험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화가 페르메이르와 관련된 사료가 별로 없기 때문에 이 소녀의 정체와 복장과 진주 귀걸이의 정체는 밝혀진 것이 없이 미스터리하다고. 이런 미스터리가 신비롭게 느껴진 까닭인지 그림에 매료되어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를 탐독하기도 했고, 그 후에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며 스칼렛 요한슨이 정말 그 소녀와 닮았다며 감탄하기도 했다. 페르메이르의 작업실이 북향이어서 남향으로 비춰드는 빛 보다 오히려 균질한 빛을 이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이 그림에 관한 나의 개인적인 서사에 한 겹 쌓아본다. 조만간 다시 봐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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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주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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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사주(破四柱). 제목부터 단박에 호기심이 인다. 일단 검색부터 하고 보면 'passage, 통로'라는 영어 단어의 결과가 주로 나온다. 그러나 제목에 붙은 한자를 해석하면 '깨뜨릴 파破, 넉 사四, 기둥 주柱'로 '사주를 깨뜨린다'는 의미가 된다. 운명을 파괴하다니? 다소 불온하게 느껴진다. 거스를 수 없는 무엇을 거스르며 파생되는 예측불허에서 오는 불안한 뉘앙스가 어쩐지 뭉근하게 풍기는 느낌. 제목이 주는 분위기에서 비롯한 개인적인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서사 사이에서 오는 감상의 격차를 흥미로워하며 읽어나갔다.





 '가인의 땅'이라 불리는 곳으로 목적 없이 걷기 시작하는 해수와 유림을 따라서 이야기는 다소 다짜고짜 시작한다. 그들이 걷는 길의 목적지가 뚜렷하지 않은 까닭에 읽는 나 또한 갈피를 어디에 두고 쫓아가야 할지 몰라 버둥거렸다. 자박자박 느리게 따라 걸어가며 해수와 유림의 과거 서사를 목도하며 걷고 있는 읽는 이의 행간은 끝내 서늘하고 숙연해진다. 해수와 유림은 '하나의말씀'이라는 사이비 종교 집단의 '하나원'이라는 보육원 출신으로 이제 막 그곳을 탈출하여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정신과 신체 모두를 끔찍하게 유린당한, 그 부조리한 집단에서 탈출한 그들의 자유는 과연 어디로, 또 어떻게 흘러갈까. 길의 시작에서 물었던 이 물음은 길의 끝에서도 다시 묻게 되었다.

 해수와 유림의 하나원 생활은 필연적으로 현실에서 일어났던 사회적인 사건들, 이를테면 '부산 형제 복지원 사건', '장항 수심원 사건', 소설 《도가니》로 알려진 '광주 인화학교 사건' 등을 떠올리게 만든다. 특히 최근에 시청한 넷플릭스의 〈나는 생존자다〉에서 '부산 형제 복지원'과 'JMS' 사건을 다룬 회차들 속 생존자들의 한은 아직도 해소되지 못한 채, 현실에서 현현한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기에 '생존자'들은 해수와 유림과 교차한다. 고통스럽게 살아있는 생생한 증언. 그렇게 해수와 유림은 더 이상 그저 활자로만 읽히지 않는다. 〈나는 생존자다〉가 생존의 증언으로 고통을 서술한다면, 《파사주》는 문학의 언어로 치유를 은유하는 것이다.





 (…) 해수의 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와도 아무도 보지 못한다.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피도, 팔다리가 잘려 나간 마네킹 같은 몸도, 아무도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니 그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으니 그들은 그 자리에 앉아 같은 일을 되풀이한다. 혀 밑에 죄책감을 숨기고, 그 말이 병처럼 번질까 두려운 듯 어떤 문장을 발음하지 않으려 애쓴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p.250-251

 아리송하게 느껴졌던 여정은 '물, 길, 들, 뫼, 숲, 늪'이라는 자연의 순서를 따라 흘러가며 그와 동시에 과거를 함께 훑어간다. 하나원이 전부였던 부조리한 세계에서 해수는 집단의 조직적인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진다. 마치 골리앗 앞에 다윗처럼. 자신의 믿음과 세계를 부정하는 해수 곁에서 견고했던 유림의 세계는 갈등한다. 그리고 그 갈등의 틈새에서 유림이 애써 외면했던 진실과 도리 없이 스러져간 생명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새어 나오며 유림을 추동하기 시작한다. 해수와 유림이 지나온 과거의 조각들이 선명해질수록, 나는 부디 이들의 여정이 터널 끝에서 반짝이는 빛처럼 희망으로 향하는 것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너-넌 믿음 없이 구-구-구원받을 수 있어?

 이건 믿음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얘기야. 그리고 구원이란 건 누가 해주는 게 아니거든. 우리 스스로 해야 하는 거지. p.95





 그러나 내가 바라던 희망은 요원해진다. '차례'에서 느껴지던 불온한 위화감. 황천(黃泉), 명도(冥途), 묘지(墓地), 망산(邙山), 신림(神林), 윤해(輪海). 모든 단어가 '죽음'과 상통하는 순서는 해수와 유림이 걷고 있는 그 여로였다는 것이다. 망망대해에 고요하게 떠있는 유림의 모습은 쿠바 맨션에서 만난 묘한 중년 여자의 사주풀이를 다시 떠오르게 만든다. 불이 붙은 나무 사주에는 물을 잘 써야 한다고, 운명을 깨고 나아가야 한다고. 나는 그제야 허망하게 되묻는다. '해수'의 해수가 그 해수(海水)였냐고. 운명을 깬다는 것이 결국 그런 것이었냐고…. 그렇다면 윤회(輪廻)의 '윤'과 같은 한자를 쓰는 윤해(輪海)의 의미야말로 희망으로 읽혀야 한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켜본다.

 중요한 건 어떤 그릇을 가졌느냐가 아니야. 그 그릇이 완전히 깨졌느냐지. 인간은 제 그릇에 금이 가면 뭔 수를 부려서든 그걸 붙이고 살려 하거든. 다신 붙이지 못하게 완전히 박살을 내야, 그래야 새로 지을 수도 있는 건데 말이야! p.199





 유림에게 해수는 파사주, 그 자체였다. 해수라는 파사주passage를 통해서 유림은 자신의 운명을 파사주破四柱했다. 유림에게 해수는 단단하고도 견고한 추악의 세계를 깨부수게 만든 동기이자 삶의 목적이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그 길이, 그런 해수를 온전히 애도하기 위한 여정이었다는 것을 결말에 이르러서야 깨달았을 때 속절없이 먹먹해지는 기분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감내해야만 했던 그간의 고통과 스러져간 이들에 대한 죄책감이 '신림(神林)'에서 연대로 발휘되는 신당에서의 환상적인 장면을 꺼내들어 안개처럼 뿌예진 감상을 조금 환기시켜본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

 ―그냥 우리 삶을 살면 돼.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어? 죗값은 죄지은 놈들이 치르면 되지. p.278

 모든 장면과 소설적 장치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은유 같다. 책의 말미에 우연히 만난 박혜진 평론가의 발문이 반갑다. 발문에서 '인생은 미로고, 미로를 통로로 만드는 건 우리 자신의 선택과 의지(p.287)'라는 《파사주》의 진실을 귀띔해 준다. 은유의 세계에서 진실과 고통과 치유가 현실과 환상이 혼재된 세상을 오가며 결국엔 가장 인간적인 본질에 다다른다. 이것은 《파사주》를 읽는 이의 또 다른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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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세계 세계의 검찰 - 23개 질문으로 읽는 검찰 상식과 개혁의 길
박용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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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내란 사태 이후로 매일 챙겨 보는 시사·정치 유튜브가 두세 개쯤 생겼다. 자연스럽게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관련한 정치 이슈들이 매일 새롭게 떠오른다. 근래에 가장 뜨거웠던 정치 이슈는 단연 검찰 개혁. 이와 더불어 최근에는 사법 개혁까지.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라는 전체적인 개혁의 방향성에는 이견이 없지만 기소청과 중수청의 소속 기관과 권한, 검찰의 보완수사권 존속 여부, 상대적으로 비대해지는 경찰 수사권의 견제 등 세부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여전히 다루어야 할 논점이 많다. 대통령을 비롯해 법무부 장관, 법안을 주도하는 여당 정치인들과 관련 법조인들까지 논쟁 속으로 휘말리면서 한동안 논란 아닌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일련의 과정들을 목도하며 실패한 과거를 답습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울렁거렸다.

  '진범을 상대로 유죄 판결을 받는 건 어느 검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무고한 사람을 상대로 유죄 판결을 받는 건 정말 재능 있는 검사라야 할 수 있는 일이다.' p.24





그런 와중에 시의적절하게 《검찰의 세계 세계의 검찰》을 읽고 울렁거리는 불안한 멀미를 잠시 멈출 수 있게 되었다. 윤석열로 대변되는 이른바 '검찰 공화국'이 그동안 자행해 온 불법적이고도 불온한 행태들은 결국 불법 비상계엄, 12·3 내란 사태에 이르렀고 이는 검찰 스스로 자멸의 길로 들어선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자는 검찰 개혁을 두 가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형사 사법 체계를 바라보는 우물 안 시야를 벗어나자는 것(p.7)둘째, 검찰 제도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게 아니라 인간의 발명품이며 계속 변화하는 현재진행형 제도라는 사실(p.8)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현재 우리의 형사 사법 체계의 실태와 문제점을 윤석열 검찰 공화국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동시에 세계 여러 나라의 형사 사법 체계를 들여다보고 비교하며 검찰 개혁의 대안과 방향의 제도적 상상력을 제안한다.

역시 가장 큰 골자는 수사와 기소의 분리. 현시대에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우리나라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했다. 견제 받지 않는 집중된 권력이 어떻게 한 나라를 도륙하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여러 나라의 과거 형사 사법 체계에서는 이미 그러한 문제점들이 드러났고 여러 제도적인 장치들을 계속해서 도입하고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한계점들을 보완하며 형사 사법 체계를 발전시켜온 역사가 있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예심 판사'는 법원 소속이나 재판에 관여하지 않으며 오로지 수사만을 관장한다. 수사 활동에 필요한 압수수색이나 증인 심문, 통신 감청 등의 권한을 가지며 하나의 독립적인 사법관이다. 이때의 기소 결정 여부는 검사가 가진다. 영국의 경우에는 경찰이 수사와 기소 권한 모두를 가지고 있었는데, 무고한 소년들이 옥살이를 하게 된 '맥스웰 콘페이트'사건을 계기로 1986년에야 기소권이 독립되어 기소청이 설립되었다.





수사와 기소를 분리하는 것만으로 끝일까? 아니다. 기소권은 여전히 막대한 권력이었고 기소권을 가진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제도들도 각국마다 다양했다. 미국의 대배심 제도는 무작위로 선정된 일반 시민들이 검사가 제시하는 근거를 바탕으로 기소 여부를 결정하게 되어있고, 일본의 검찰심사회는 역시 무작위로 선정된 시민들이 검찰이 내린 불기소 처분의 타당성을 심사한다. 특히 이 제도는 기소의 영역이 아닌 불기소의 영역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검찰이 고의로 누락할 수 있는 사건의 사각지대까지 보완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외에도 독일에서는 법왜곡죄를 통해서 특정인에게 부당한 이익 혹은 불이익을 고의적으로 행한 법관을 처벌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고 있다.




 사법 독재는 법치라는 미명 아래 고개를 듭니다. 하지만 법치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 민주주의를 초월하는 이념이 아닙니다. 헌법이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 국회의원의 불체포 특권 등 법치의 예외를 둔 것은 판검사가 법을 악용해 선출직 공직자를 탄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p.263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의미가 두드러졌던 부분은 바로 법치에 작용하는 민주주의. 국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으로 검찰을 비롯한 사법의 권력을 견제하는 예시는 시민들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미국의 대배심이나 일본의 검찰심사회 외에도 미국에서 전개된 진보적 검사 운동이나 검사 선거 제도에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이나 국회의원의 불체포 특권은 신성하게 부여된 절대 권력이 아니라 국민이 검찰과 사법을 견제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인 것이다. 국민이 국민의 대표인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를 제거하고자 대선 결과에 개입하려 시도했던 조희대의 사법 쿠데타는 법치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를 무시한 아주 오만하고도 적절한 예시라고 볼 수 있겠다.

 불소추 특권은 대통령이 된 '어느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게 아니라, 그를 대통령으로 뽑고 그의 원활한 대통령직 수행에 이해관계를 갖는 '국민 전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마르 교수는 이 점을 더 선명한 비유로 강조합니다.

 "미국 헌법은 (대통령보다) 국민 대표성이 떨어지는 이들(판검사)이 나라 전체를 인질로 잡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p.190





나를 비롯해 여러 방송에서 떠들어대는 검찰 개혁이 다소 피상적으로 느껴졌던 사람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봤으면 좋겠다. 《검찰의 세계 세계의 검찰》를 읽으면서 피상적으로 느껴졌던 많은 부분들이 해갈되었기 때문이다. 이건 아닌 것 같은 막연한 물음표에 쉽고 친절한 톤의 느낌표를 달아주는 것이다. 특히 나는 그들의 권력이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러한 까닭에 마치 신성불가침인 것인 양 휘둘러댔던 그 권력을 이제는 대대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을 이룰 수 있었다. 민주주의를 채택한 나라에서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국민주권이라는 것을 천명해야 한다. 법이라는 권력으로 헌법의 근간을 뒤흔들었던 그 모든 비뚤어진 권력을 견제하고 다시 재건해야 하는 것이다.

 수사기소 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말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믿어 달라고 해서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권한의 오남용을 견제할 충분한 장치가 갖춰져 있어야 그 제도를 통과해 나온 결과를 신뢰할 근거가 생깁니다. 그런 제도 개혁 노력은 오랜 민주주의 전통을 지닌 영국 같은 나라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첫발도 떼지 못했습니다. p.76

제도라는 것은 언제든 수정이 가능하다는 것, 민주주의라는 정당성의 토대 위에서 수정과 보완, 견제와 감시가 항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나라의 개선된 법과 제도들도 완벽하지 않다. 여전히 한계가 존재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효율성이 저하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유연성을 가지고 제도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끊임없이 논의할 수 있어야 하고 수정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민주주의를 초월할 수 없다. 그 권력에 더 이상 신성불가침의 영역은 없다.




 독재자들이 지배하는 체제에 맞서야 한다. 그들에게 선량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체제를 요구함으로써.

_<'진보적 검찰'의 역설 The Paradox of "Progressive Prosecution">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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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전쟁 - 제국주의, 노예무역, 디아스포라로 쓰여진 설탕 잔혹사
최광용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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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고 고운 입자. 무구하게 반짝이는 결정체. 끈적하게 녹아드는 단맛. 눈 설, 엿 탕. 눈처럼 하얀, 설탕. 발음을 굴리기만 해도 혀끝에 단맛이 도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제 현대의 과도한 설탕 섭취는 만병의 근원이 되어버렸다. 주기적으로 트렌드가 변화하는 다이어트 산업에서 인슐린 저항성에 대한 원리를 골자로 하는 온갖 상품과 마케팅이 쏟아져 나온 지는 이미 꽤 되었다. 그로 인해 열풍이었던 '저당' 혹은 '무당' 제품들은 이제는 하나의 옵션이 되어버린 지 오래. 편의점 음료 냉장고 앞에만 서있어도 그 예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대체당을 사용하면서도 설탕의 그 '단 맛'을 결코 잃을 수 없다는 현대인의 욕망. 설탕에 투영된 그러한 욕망은 수 세기 전의 인간들과도 다를 것이 없어서 설탕은 그 자체로 인간의 욕망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설탕의 궤적을 따라 읽는 세계사의 흥망성쇠는 대항해 시대로부터 그 궤적을 뚜렷이 한다. 뉴기니 지역에서 유래한 사탕수수는 고대 인도에서 재배되고 설탕이 제조되면서 이슬람 문화권을 중심으로 중동과 아프리카로 퍼져나간다. 대항해 시대를 맞이하여 비로소 유럽으로 설탕이 전파되기 시작하고 곧이어 설탕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대서양의 섬에서 사탕수수 재배와 설탕 제조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의 경제적 패권을 주도한다. 본격적으로 대규모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도입되며 서구 열강들은 설탕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지독한 《설탕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설탕 플랜테이션이 본격적으로 융성해짐에 따라 비극적으로 발달한 것은 바로 흑인 노예 무역이었다. 사탕수수 재배와 설탕의 제조 공정은 필연적으로 수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가혹한 노동 환경과 유럽인들의 질병 전파로 원주민의 노동력으로도 그 필요가 감당이 되지 않자,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강제로 투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가혹한 노동 착취 환경으로 그들의 기대 수명은 극히 낮았고, 이는 다시 더 많은 흑인 노예를 필요로 하게 되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이렇듯 설탕 산업이 커지면 커질수록 아프리카 흑인 노예 무역의 그림자는 더욱더 짙어져만 갔다.

이런 잔혹한 흑인 노예의 삶을 자세하게 기록한 1만 4000페이지에 달하는 사료는, 아이러니하게도 자메이카에서 플랜테이션 관리자로 근무했던 토머스 티슬우드가 남겼다는 것이다. 책에서 언급하는 짤막한 기록만을 보아도 몸서리가 쳐질 만큼 잔혹하다. 흑인 여성 노예들을 강간한 횟수는 3825회, 그가 유린한 여성 노예의 수는 138명, 도망치려는 노예에게 가차없는 매질, '더비의 약'이라는 고문 내용(p.65) 등…. 자신의 만행을 자각조차 못하고 자랑스레 기록한 토머스 티슬우드의 몰인간성에 기묘한 불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학자들은 그의 학대 내용이 당대와 비교해서 특별할 것 없이 평균적인 수준의 행태였을 거라고 평가한다는 것이 더 끔찍한 지점.





 우사인 볼트, 일레인 톰슨, 세리카 잭슨 등 오늘날 세계 단거리 육상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있는 자메이카 선수들의 경기를 보며, 나는 종종 사탕수수밭에서 혹사당했을 그들의 선조들을 떠올리곤 한다. 해적기를 나부끼며 바다를 누빈 영국의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두 다리로 트랙 위를 질주하는 자메이카의 육상 선수들, 과연 '진짜 영웅'은 누구일까? p.58-59

이러한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노동 환경에서 흑인 노예들은 목숨을 걸고 도망치기도 한다. 운 좋게 탈출한 그들은 산악지대에 모여 군락(Maroons)을 형성하며 자유인으로서 하나의 공동체로 성장하고 세력을 키워 제국군과 대립하기 시작한다. 특히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 생도맹그 지역은 흑인 반란군과 프랑스 제국군의 지난한 전쟁과 서구 열강의 대결 구도 위에서 모순적인 협력 속에 송토나의 노예 해방 선언을 바탕으로 최초의 흑인 공화국인 '아이티 공화국'으로 탄생하게 된다. 독립 승인 대가로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하느라 경제적인 빈곤에 빠지게 되고, 이후 쿠데타, 군부 독재 등의 내부 정치적 갈등으로 혁명의 빛은 바래졌지만 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들이 스스로 쟁취한,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 혁명으로 미래의 노예제 폐지에도 영향을 미친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아이티는 흑인 노예의 '고향'인 아프리카 대륙이 아니라 그들이 유럽인에 의해 강제로 끌려와 뿌리내린 땅에 세운 나라라는 점, 또한 아메리카 전체를 통틀어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탄생한 독립 국가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p.100




이러한 설탕 패권 전쟁의 흐름에서 한국의 출현은 미국으로부터 시작한다. 루이지애나 지역에서 융성했던 미국의 설탕 플랜테이션 역시 흑인 노예의 노동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북 전쟁이 발발하면서 흑인 노예들이 주가 되었던 설탕 산업은 급격히 몰락할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생산지의 필요성으로 하와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와이 설탕 플랜테이션의 초기 이주민은 주로 중국이었고, 뒤를 이어 일본인이 이주하였다. 중국인의 노동력 독점 현상, 일본인의 잦은 파업으로 다른 대체 노동 인력을 물색하던 가운데 102명의 한국인 이민자들이 처음으로 이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와이라고, 한국인이라고, 계약 노동자라고 노예보다 처지가 더 나은 것은 아니었다. 설탕 플랜테이션의 열악한 노동 환경은 여전했다. 그러나 한인 이주민들은 이역만리에서 고국을 향한 그리움에 사무치면서도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독립 자금을 모으기도 하고 미국 본토로 이주해서도 독립운동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기도 하는 등 한국 독립운동 역사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분담했다. 또한 하와이 한인 이주민의 역사적인 맥락에서 '사진 신부'라는 애환의 역사 또한 살펴볼 수 있는데 이는 이민자 이탈 방지의 일환으로 서로의 사진만을 교환하여 결혼을 결정한 후, 하와이로 이주한 여성 한인 이주민을 가리킨다.





'사진 신부'들 또한 새로운 삶을 꿈꾸며 하와이로 이주하였지만 역시나 하와이에서의 삶은 그들에게도 녹록지 않았다. 사진과 다른 외모나 더 많은 나이의 남편을 마주하기도 했고 농장의 일 외에도 살림과 육아를 도맡아야 했다. 그러나 한인 이주 여성들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여성 독립 후원 단체를 결성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하와이 이민 사회의 안정을 공고히 다지는 주축으로써 그들의 후손들을 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출하게 만드는 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하와이 한인 이주민들의 역사는 인천 월미도에 위치한 한국 이민사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예전에 다녀왔던 인천 둘레길 13코스에서 슬쩍 본 기억이 나서 첨부. 다시 가게 되면 한 번 들러봐야겠다.





설탕을 매개로 톺아보는 역사. 역사라고 하면 딱딱하고 지루한 이미지가 떠오르기 십상인데 《설탕 전쟁》은 말랑하고 흥미롭게 읽힌다.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톤으로, 이야기하듯 서술한다. 편안한 해설을 바탕으로 설탕이라는 욕망의 흐름이 어지러이 세계사를 흔들면서 제국주의, 디아스포라, 노예무역 등 역사가 드리운 그림자를 들여다보는데 의의가 있다. 끔찍한 폭력성과 잔혹한 몰인간성을 타고 흐른 설탕의 역사에는 설탕 플랜테이션의 흑인 노예 무역과 그들의 디아스포라라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도륙 한 슬픔이 깔려 있다는 것, 그 이면에 끊임없는 투쟁과 혁명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읽어내야만 할 것이다.




*하니포터 11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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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홍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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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한겨레문학상 30주년 앤솔러지인 《서른 번의 힌트》를 읽고 나서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말뚝들》을 한껏 기대하고 있었다. 현재도 활발하게 활동 중인 걸출한 한겨레문학상 수상 작가들을 떠올리면 그 기대감은 더욱 배가 될 수밖에 없다. 30주년 기념이라 그런지 관련한 마케팅들도 활발해서 책 밖에서의 김홍 작가의 여러 인터뷰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이를 통해 작품의 집필 배경이나 작품에 대한 작가의 해설 등으로 작품을 더 농밀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출판사 인스타그램(@hanibook)에서는 작가에게 당선 소식을 전하는 상황이나 책의 인쇄 과정, 시상식에서 울컥해버리고 마는 김홍 작가의 모습 등도 볼 수 있어서 책의 안과 밖으로 다양한 결의 《말뚝들》을 감상할 수 있다.





《말뚝들》은 '장'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은행에서 대출심사 업무를 담당하는 장은 어느 날 차 트렁크에 실려 납치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어두운 트렁크 속에서 장은 공포와 불안에 떨며 지난날 자신의 과오를 반추하며 불가해한 상황을 이해해 보려 하지만 탈출은 요원할 뿐이다. 어쩔 도리 없이 한 편의 소동극으로 무기력하게 끝나버린 납치극. 범인이 누군지는 물론이고 그 목적마저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버린 납치극은 장에게 트라우마만을 남겨버렸다. 납치 소동과 맞물려 이 세계에서는 갑자기 '말뚝들'이 도시에 출몰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납치에서 비롯된 장의 일상에서의 균열들은 말뚝을 중심으로 어그러지기 시작하고, 불행의 소용돌이 속에서 장은 고군분투한다.

납치극이 시작되면서부터 스릴러처럼 이야기가 흐르려나 하고 장과 함께 범인을 추측하기 시작했다. 은행에서 대출심사 업무를 담당하는 장의 직업이 초래한 누군가의 앙심이었을 것이리라. 그에게 앙심을 품은 누군가로 추측의 저울을 기울였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흐르지 않는다.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전개는 영리하게도 재미있는 경로만을 찾아 질주한다. 이 길이 맞나 싶은 갈림길에서 주저하는 독자의 손목을 이끌고 작가는 확신에 찬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읽는 내내 도통 어디로 어떻게 전개될지 나의 궁핍한 상상력으로는 결코 가늠할 수가 없었다. 재미의 범용성을 가늠해보며 무람없이 재밌다고 할 수 있겠다. 웬만하면 보통 겁부터 먹고 낯부터 가리는 나란 사람도 이런 의외의 전개가 재밌게 느껴지는 까닭은 오로지 작가의 역량 덕분이었다.




일상과 비일상이 혼재하는 세계에서 비일상적인 말뚝들의 존재 자체가 자칫 판타지처럼 허황된 상상력의 산물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장'이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동시대적인 현실이 핍진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예를 들면 직장인으로서 겪는 직장 내 정치 싸움 내지는 알력 다툼, 영끌 한 아파트, 사회적인 계급 차별로 인한 좌절, 납치 후에 보인 동료들의 다소 비인간적인 태도 등 누구나 적어도 한 두 개쯤은 경험하고 마는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장'아일체를 경험하게 한다. 그러는 동시에 우리 사회가 최근 겪은 국가적 트라우마인 12·3 비상계엄 사태를 똑닮은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상황은 한층 더 현실과 소설의 경계를 흐릿하게 지워버린다. 그런 투명한 경계 층에서 말뚝들이 가지는 서사는 우리를 설득하기에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다.

 집을 나설 때와 같은 자리에 말뚝이 서 있었다. 정오의 태양이 내리쬐는 창을 등진 채 역광의 윤곽이 윤슬처럼 빛났다. 두 사람은 미처 신발을 벗지도 못한 채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나란히 눈물을 흘렸다. 묘하게도 따듯한 위로가 됐다. 아예 말뚝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데보라가 장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 해요?"

 "아무 생각도 안 해요."

 "거짓말.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건 없어요. 말하기 곤란한 걸 생각할 때 그렇게들 말하죠."

 데보라의 말을 듣고 장은 생각해 봤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과연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다.

 "지금 어딘가에서 우리처럼 울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네요."

 "신기해요.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p.187

사람들은 갑자기 출몰한 말뚝들을 보고 불현듯 눈물을 흘린다. 광장에 출현한 말뚝들을 에워싸고 사람들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계속해서 눈물을 흘린다. 엉엉 우는 사람, 오열하는 사람, 조용히 눈물 줄기만을 흘리는 사람…. 말뚝들의 기원도, 존재의 이유도, 그 어떤 것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말뚝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 장에게 직접적으로 찾아온 또 하나의 말뚝. 그 말뚝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 그 말뚝의 기원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에서 마주하는 진실들과 비로소 획득하는 말뚝들의 서사를 목도하며 우리는 익숙하고도 씁쓸한 기시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말뚝들의 정체를 찾아보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알게 된다. 우리는 이미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을 것이다.




 마음은 편안했다. 울고 있기 때문이었다. 장은 이제까지 삶에 대해 너무 큰 거짓말을 해왔다는 걸 이쯤에서 인정하고 싶었다. 희망 같은 건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지금은 기적을 믿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다는 명백한 느낌을 믿었다. 그들은 말뚝을 지킬 것이고, 말뚝을 지키려는 장을 지킬 것이었다. 그 사실은 이후로도 내내 장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두려움은 희미해졌다. p.265

말뚝들의 의미도, 그들을 보고 흘리는 눈물의 의미도 저마다 다르겠지만 같이 앉아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확실하게 설명할 수 없는 위로와 안도감이 들고는 해서 페이지에 오래 머물곤 했다. 물색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고요하고 평온하다. 억눌린 슬픔의 해갈이었을까. 결코 잊힐리야 잊힐 수 없는 죽음들에 대해 생각한다. 몇 번의 국가적 참사들과 사회적 타살들을 목도하던 경험 속에서 우리는 사회적 애도를 통해 광범위한 연대를 이루어 서로를 위로했다. 장과 데보라의 대화에서 데보라가 말했던 불행의 랜덤성은 한 개인의 불행에 위로가 뒤어주기도 하지만 우리가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며 연대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불행 앞에서 우리는 연대한다.

 "쟝한테 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돼요?"

 (중략)

 "세상 모든 일이 이유가 있어 일어나는 게 아니잖아요. 어떤 건 그냥 사고예요.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게 세상의 모든 일이고요. 왜 특별히 쟝에게만큼은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네요."

 "그냥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라는 말이에요?"

 "아니죠. 엄청난 일이 일어났죠. 삶에는 원래 엄청난 일이 계속돼요.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삶이 계속된다는 것부터 봐요. 불행을 특별 대우해 주면 불행이 잘난 척을 해요. 나는 그러고 싶지 않거든요. 이렇게 비교하니 미안한데 나도 기껏 한국 일정 잡고 숙소까지 예약하고서 데이식스 콘서트가 취소됐잖아요. 그냥 일어나는 일들이죠. 랜덤니스." p.185




예상할 수 없이 뻗어 나가던 전개 속에서 인물은 결코 울고만 있지 않는다. 세상이 장을 제대로 골리려는 듯, 온갖 종류의 불행이 한꺼번에 그를 괴롭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은 모든 고난을 뚫고 말뚝을 끌어안는다. 소설 속에서 주어지는 지난한 불행 앞에서도 작가는 유머를 잃지 않고, 핍진한 현실성과 비상계엄이라는 시국성을 더해 산업 재해 노동자의 삶까지 순환한다. 스릴러처럼 흐르려나 했다가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풍기고, 시대상을 고찰하려나 했다가 블랙 코미디를 선사한다. 우당탕탕 하면서 전개를 다채롭게 굴려 나가다 보면 서사의 중심에 살이 붙기 시작하고 마침내 그 정체를 마주했을 때 각자가 맞이할 타인의 무엇이 궁금해진다.



*하니포터 11기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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