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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가정
백승연 지음 / 해피북스투유 / 2025년 11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무명작가였던 남편 대신 10년 동안 가장 노릇을 하며
기자 생활을 했던 희진은 누구나 부러워할 주택단지로 이사를 가게 된다.
인생 한방 이랬던가? 남편 소설이 대박을 치고 쉽게 갈 수 없는
연남동 주택단지가 아주 싼값에 매물이 나왔다.
이제는 남 부럽지 않게 살아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희진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찾아온다. 옆집에 사는 그녀가 이상하다.
아니, 옆집 자체가 그냥 이상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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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승연 작가님의 편지가게 글월이라는 소설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섬세하고 다정하고 아름답고 포근한 소설이라
합리적인 가정이라는 이 소설은 조금 낯설게 다가왔다.
기존의 소설의 장르를 완전 뛰어넘었기에.
이 소설은 굉장히 과감하다. 그리고 직설적이다
그런데 또 너무 선정적이지 않고 절제된 문장들에 호기심이 밀려온다
약간의 끈적거림과 불쾌감은 자연스레 살며시 따라붙는다
합리적인 가정.
제목이 주는 이질감은 소설을 읽다 보면 설명할 수 없는 동의를 하게 한다.
이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불륜이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
아니면 끝내 채우지 못한 욕망에 휩싸인 그들의 최후라고 해야 할지..
가장 즉흥적이고 가장 철없어 보이던 그녀가 실상은
가장 철저하게 모든 것을 설계하고 준비한 듯 보인다.
자신의 그라운드 안에 그들을 끌어들여 당기고 밀어낸다.
그렇게 자신의 손에 모든 것을 다 쥔 것 같지만
잠깐 방심한 사이 이야기는 뒤틀린다.
그녀는 정말 허무하리만큼 아무 힘이 없는 여자였다.
그녀의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 그 남자는 그녀의 계획마저
그의 큰 그림의 일부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소름이 돋는 그 남자의 진짜 정체가 드러난다.
누군가에, 어딘가에 기생해야 살 수 있는 남자와 여자.
그들의 소심하지만 파격적인 반항.
그리고 합리적인 처벌?
씁쓸하지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행복보다 누군가의 불행에 더 공감하며 살아간다.
사랑에 미친 치정 극 같지만 이들의 모습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포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왠지 그녀가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진다.
-밑줄 긋기-
호재는 태생이 한량이었고 유림은 겁이 많았다. 밖에 나가 전투를
치르고도 제 발로 집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에게 기생하는 삶만이
두 사람의 유일한 생존법이었다.
109쪽
"아직도 자기 자신으로 살 준비가 안 된 거예요?"
건우의 붉은 눈이 희진을 뚫어지게 보았다 머리털을 뽑고 피부를 벗기고
두개골을 열어 그 속에 담긴 뇌를 현미경으로 세포 하나하나 들여다볼 기세로
"도대체 뭘 지키고 싶은 건데요."
231쪽
주택단지의 다른 이웃들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품은 채 각자의 행복을 전시하고
있을까?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마음, 남편을 죽이고 싶은 마음, 부모를
버리고 싶은 마음, 뱃속 아기를 지우고 싶은 마음, 혼자서 살고 싶은 마음,
그런 것들을 숨긴 채 가정을 만든 걸까?
울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희진은 그대로 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다.
282쪽
